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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45)화 (45/129)

45화

문밖으로 나오니 집사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안내하는 대로 따라가 보니 안락해 보이는 방이 나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높고 전망 좋은 방에는 화사하고 하늘하늘한 커튼과, 그와 색을 맞춘 것 같은 화려한 레이스 침대가 놓여 있었다.

밝은색의 벽지와 아기자기한 장식들, 바닥도 역시 크림색의 카펫이 깔려 있었다.

고풍스러운 장식의 침대 협탁과 티 테이블에는 막 갖다 놓은 것 같은 싱싱하고 붉은 장미꽃이 꽃병에 꽂힌 채 놓여 있었다.

티 테이블의 의자는 두 개였고, 테이블 위에는 하트 모양의 케이크와 찻잔 두 잔이 놓여 있었다. 나는 다른 것보다도 그게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이건 마치 신혼부부를 위한 방 같은…… 내가 멀뚱멀뚱 그 방을 쳐다보는데 집사장이 만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두 분이 쓰실 침실입니다. 양쪽으로는 두 분의 옷방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불편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다른 것들은 지내시며 도련님께서 직접 마님께 안내해 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수고했네.”

내가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동안 루퍼트는 아무렇지 않게 그의 말에 대답한 후, 집사장을 내보냈다.

“잠……깐! 루퍼트, 방을 같이 쓴다고요?”

“목소리를 낮춰. 여기서는 우리를 부부로 알고 있는데, 당연히 한 방을 준비하겠지.”

“그래도 그냥 저렇게 보내면 어떡해요?”

루퍼트는 내 말에 대꾸도 없이 재킷을 벗어 소파 위에 던져 두었다. 소파도 널찍해서 한 사람이 눕기에 충분해 보였다.

여차하면 난 저곳에서 자야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 보니 하인 하나가 나를 보며 안절부절못하는가 싶더니, 조심스럽게 루퍼트를 불렀다.

“저, 도련님…….”

“무슨 일인가? 내게 할 말이 있어?”

루퍼트도 용건을 모르는 듯 그에게 물으며 저벅저벅 걸어왔다. 그러자 하인이 루퍼트에게 양해를 구하며 그의 귓가에 뭔가를 속닥거렸다.

“뭐……? 와 있다고?”

루퍼트는 눈을 크게 뜨며 하인에게 다시 한번 확인했고, 하인은 허리를 굽힌 채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그러자 루퍼트가 곤란한 눈으로 갑자기 나를 돌아봤다.

“……?”

나는 무슨 내용인지 모르니 그저 눈만 깜빡이며 쳐다봤을 뿐이다. 대충 루퍼트의 말만으로 추측해 보면, 누가 왔다는 것 같은데 그게 누굴까.

루퍼트는 소파에 던져 놓았던 겉옷을 집어 올리며 내게 말했다.

“먼저 저녁 먹고 쉬어. 난 가 볼 곳이 있어서.”

왠지 그의 얼굴에서 미안한 기색이 엿보였다.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래요.”

그리고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말하지 않아도 왠지 알 것 같았다.

클로에가 온 것 같다. 이 성에 우리보다도 먼저.

조금은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그녀의 방문이 내게 놀랍진 않았다.

다만 방금까지 침실을 같이 쓸 것처럼 굴던 그가 헐레벌떡 나가는 걸 보니, 그 가벼운 엉덩이에 실소가 나왔을 뿐이다.

문이 닫히고 나는 천천히 창문 근처로 다가갔다. 오후의 햇살이 긴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클리포드 성의 정원은 아름다웠다.

둥근 정원 한가운데를 중심으로 하여 십자가 모양으로 길게 뻗은 수로에서는 일제히 물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늦여름 볕 아래 싱싱한 잔디들이 물방울을 머금으며 선명한 초록빛을 띠고 있었다.

하얀 담장을 따라 잘 가꾼 붉은 장미 덩굴이 늘어져 있었고, 덥고도 시원한 바람은 그곳에서부터 꽃향기를 실어다 이곳 창가까지 전해 주었다.

수도의 타운하우스에도 나름 넓고 잘 가꾼 정원이 있었지만, 역시 성에 비할 바는 못 됐다.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하트 모양의 케이크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포크로 그 가운데를 푹 파서 입에 집어넣었다.

상큼한 스트로베리의 향과 달콤한 생크림이 어우러져 입안에 살살 녹아들었다. 이렇게 맛있는 걸 루퍼트와 함께 앉아 먹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나는 그렇게 좋은 풍경과 맛있는 차와 케이크를 홀로 즐기며, 노곤노곤한 여독을 푸느라 앉아 있었다. 그렇게 피로가 좀 가시고 나니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클로에가 왔다면…….”

나도 한번 만나 볼까.

나는 태평하게 포크를 입에 넣은 채 그렇게 생각했다.

확실히 나는 클로에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저 청순가련한 여주인공이라기엔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았다.

명확한 증거는 없지만, 예전에 마차 납치 사건을 어느 정도 아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기도 했고.

클로에가 날을 세우는 이유가 루퍼트를 내게 뺏길까 봐 불안한 것에서 기인한다면, 나는 전혀 관심 없으니 이혼 후 너나 가져가라고 말할 셈이었다.

그렇게 해서 불필요한 잡음들을 잠재울 수 있다면, 한 번쯤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게 나쁘지만은 않을 것이다.

“……에녹도 온다고 했지.”

단 걸 계속 먹다 보니 속이 조금 느끼해졌다. 씁쓰름한 차로 입 안을 씻어내자 나는 조금 더 기분이 좋아졌다.

어쨌든 소설 속 주요 인물 네 명이 또다시 한 무대에 모인 셈이다.

우연인 듯하지만 모두 필연적인 상황이었다. 나는 찻잔을 놓고 하녀를 부르는 끈을 잡아당겼다.

문밖에서 딸랑딸랑 종소리가 울렸다.

“네, 마님!”

옆방에서 짐을 풀고 있던 제니가 얼른 달려왔다.

“좀 씻어야겠어. 목욕물 좀 준비해 주렴.”

***

에린이 그렇게 마음 편히 휴식을 즐기는 동안, 루퍼트는 하인이 알려 준 동쪽 별궁으로 갔다. 동쪽 별궁은 주로 손님들을 모시는 공간이었다.

클로에가 와 있다는 소식에 루퍼트는 기쁘면서도 조금은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별궁에 들어서기 전에 루퍼트는 에린이 있는 침실을 올려다봤다.

남들 눈 핑계를 대서라도 처음으로 한방을 쓰나 했는데, 오늘은 결국 넘어가야 할 모양이었다.

자신을 보러 이곳까지 온 클로에를 모른 척할 순 없으니 말이다.

오늘도 역시나 담담한 에린의 태도가 거슬렸지만, 그녀는 결혼 후 늘 그랬으니 특별할 건 없었다.

‘차라리 서운해한다면 못 이기는 척 앉아 있을 텐데.’

그때 벌컥 문을 열고 클로에가 뛰어나왔다. 여리한 갈색 머리카락이 포근한 햇살을 머금은 채 좋은 향을 풍기며 품에 와락 안겨들었다.

루퍼트는 그녀를 다독거리면서도 얼른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혹시나 에린이 볼까 싶어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루퍼트, 루퍼트.”

“클로에. 정말 놀랐어, 언제 도착한 거야?”

“당신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어요. 공작 각하께서 아프시다니 걱정도 되고…… 물론 제가 가서 뵙진 못하겠지만요.”

클로에는 눈썹을 아래로 늘어뜨리며 우울한 듯 중얼거리면서도, 루퍼트와 은근히 몸을 붙였다.

“할 말도 있고요.”

“무슨 이야기인데 그래?”

“우리 들어가서 얘기해요.”

작게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에, 루퍼트는 순순히 그녀가 이끄는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방은 커튼이 쳐져 있어 어두운 편이었다. 그곳의 소파에 나란히 앉아 클로에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당신…… 부인과 일 년 동안 결혼을 유지하기로 계약했다고 했었죠?”

루퍼트는 클로에가 꺼낸 화두에 조금 긴장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마음이 변한 걸까?

에린의 제안을 클로에에게 처음 전했을 때, 그녀는 마음 아파하면서도 수락할 것을 제안했다. 지금에 와서 클로에의 마음이 변한 거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다 해도 계약은 계약이었다. 또한 왠지 지금은…… 일 년이란 기간이 무척이나 짧게 느껴졌다.

“그건 왜 묻는 거야?”

“혹시 마법석 광산…… 이야기 해 보셨어요? 어떻게 하실지?”

루퍼트는 잠시 그녀의 오렌지빛 눈동자를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전혀.”

“아…… 그래요. 아니에요, 아무것도.”

“클로에?”

클로에는 그의 거친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올리고 팔목까지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당신, 사실대로 말해 봐요. 부인에게 조금은…… 마음이 있는 거죠?”

그녀의 물음에 순간 루퍼트의 손과 팔에 힘이 들어갔다.

“클로에.”

긴장한 낯빛이 역력했다. 하지만 루퍼트는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클로에는 힘없이 웃으면서도 그의 손을 만지는 걸 멈추지 않았다.

“괜찮아요, 이해해요. 난 당신을 늘 보고 있으니까 쉽게 알 수 있겠던걸요. 결혼해서 살다 보면…… 그럴 수 있죠. 비록 내 목숨을 노렸더라도, 그것조차 잊게 되는 거겠죠.”

“클로에, 잠시만, 그건.”

“서운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에요.”

클로에가 검지를 세워 다급하게 움직이는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일 년, 그 이후에도 계속 결혼 생활을 유지하세요. 당신 마음이 허락할 때까지.”

의외의 발언에 루퍼트의 눈이 커지며 클로에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열심히 살펴봤지만, 클로에는 여전히 눈물이 가득 고인 커다란 눈을 하면서도 단호히 그를 보고 있었다.

“괜찮겠어? 클로에…….”

“난 괜찮아요. 당신만 내 마음을 알아 준다면, 나는 아무 욕심 없어요.”

루퍼트는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에 클로에의 얼굴을 커다란 손으로 감싸 안았다.

“루퍼트, 내게 하듯, 그녀에게도 잘해 주세요. 지금은 너무 서운해서 변한 것 같아 보여도…… 부인 역시 내내 당신을 지켜본 사람인걸요. 너무 내치지 말아요. 같은 여자로써 불쌍하니까.”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클로에가 그의 손바닥에 얼굴을 비비다 다시 그의 목을 팔로 끌어안았다. 그녀의 손목에 채워진 마법석 팔찌가 마치 흑요석처럼 검게 빛났다.

“내가 더 미안해요, 당신에게 도움 되는 가문에서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루퍼트는 그녀의 등을 감싸 안으며 토닥거렸다. 포근한 냄새가 나는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으며 그녀를 들어 올렸다.

“무슨 말이야, 네가 어디에서 태어났어도 난 널 사랑했을 거야, 클로에. 절대로 널 버리지 않을 거야.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래요, 루퍼트.”

클로에는 더 이상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지 않았다. 오렌지빛 눈동자가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번뜩거렸다.

“나도 사랑해요.”

검게 변한 입술을 그의 목덜미에 묻고, 클로에는 루퍼트와 함께 침대로 갔다.

슬슬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그날 루퍼트는 결국 에린이 있는 침실로 돌아가지 않았고, 덕분에 에린은 그날 밤 깨지 않고 오래오래 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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