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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44)화 (44/129)

44화

클리포드 성에 도착하자마자 난 엄청난 환대에 기가 죽고 말았다. 성문 밖에서부터 마차가 가는 길목 내내 영지 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우리를 마중했다.

또한 성문이 열리자 기사들과 영지의 가신들이 모두 나와 우리를 맞이했다.

마차가 열리고 루퍼트가 먼저 내려 내게 손을 내미는 동안, 나는 문밖에 있는 이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의 진심 어린 환대의 눈빛을 본 순간 나는 시선을 피해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부담스럽다, 부담스럽다.

머릿속엔 이 말만 반복되었다.

이들의 환대가 부담스러운 건 내가 곧 떠날 사람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여기 오기로 한 게 역시 잘못이었나? 공작이 죽든 말든 상관하지 말 걸 그랬나?

그러는 와중에 옆에 선 루퍼트가 팔꿈치로 툭 나를 건드렸다. 옆을 올려다보니, 루퍼트가 입술을 움직이지 않은 채 복화술로 내게 말하는 게 아닌가.

“좀 웃는 게 어때.”

내가 웃지 못하는 이유 중 절반 이상이 본인이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따뜻한 환대 속에 계속 죽을상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최대한 기쁜 생각을 떠올렸다.

‘광산, 마법석 광산, 나는 이제 부자다, 그걸 팔면 이 남자와 이혼할 수 있다.’

주로 뭐 이런 생각이었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입가에 미소를 머금을 수 있었다.

이런 이미지 관리를 하는 이유는 내 삶이 이혼한다고 해서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깔끔하고 우아하고 세련되게 끝맺음을 하는 게 앞으로 귀족으로서 살아갈 나날들에 조금이나마 흠 잡히지 않을 것이다.

예상과 달리 이 세계가 이혼이라는 것을 흠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해도, 이후 사교계에서 쏟아지는 억측과 소문은 피할 길이 없었다.

그렇게 머릿속을 정리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와중에, 우리 뒤쪽으로 누군가 다급히 말을 타고 달려왔다.

집사장 대신 루퍼트가 대신 그를 보며 말했다.

“황실 기사단에서 무슨 일이지?”

황실 기사단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은회색 바탕에 푸른 장미가 그려진 단복을 입고 있었다.

그가 말에서 뛰어내리며, 루퍼트에게 팔을 올려 간단히 예의를 갖췄다.

“황제 폐하께서 전하라 하셨습니다. 이 나라 원로대신이며 대귀족인 공작의 건강을 매우 염려하시며, 위로차 황태자 전하로 하여금 귀한 약재를 보낸다 하셨습니다.”

기사는 자신의 손에 들린 서신을 루퍼트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을 본 루퍼트의 표정이 한순간에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나는 그런 루퍼트를 보고 있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옆구리를 툭 건드렸다. 루퍼트가 정색한 표정 그대로 날 봤다.

나는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환한 표정을 지으며 그와 마주 봤다. 그리고 그에게만 들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웃어요.”

***

성 안에서 우리를 맞이하는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 바로 클리포드 공작의 동생, 멜라톤 클리포드 백작이었다.

그를 본 루퍼트는 살짝 굳었던 표정을 풀며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숙부님, 언제부터 와 계셨습니까.”

“오오, 루퍼트. 이게 얼마 만이냐. 형님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어찌 오지 않을 수 있겠느냐. 참, 결혼했다는 소식 들었다. 뭐가 그리 급해서 알리지도 않고 그렇게 서둘러 한 게야?”

멜라톤은 나를 슬쩍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루퍼트가 슥 내 앞을 가리며 대답했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나 역시 루퍼트의 등 뒤에서 멜라톤의 면면을 관찰했다.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건 소설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루퍼트의 뒤에서 나와 살짝 무릎 인사를 했다.

“에린 스필렛 입니다.”

“스필렛 가문에 하나 남았다는 여식이 자네였군.”

멜라톤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나를 보다 루퍼트에 의해 시야를 다시 가로막혔다.

“아버지께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러려무나.”

공작의 침실로 가는 동안 복도를 걷던 루퍼트가 멈추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숙부와는 가까이하지 않는 게 좋아.”

“왜요?”

“분가 후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던 사람이 지금 시점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결코 좋은 의도일 리가 없지.”

나에게 이런 걸 알려 주는 루퍼트가 의외라고 생각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루퍼트는 열애 중인 클로에에 관한 문제를 제외하고는 그래도 아주 바보는 아니구나, 라고 생각했다.

똑똑-

루퍼트가 육중한 문 앞에 서서 노크를 했다. 나는 조금 긴장되는 마음으로 그의 뒤에 있었다.

루퍼트와 공작은 사이가 좋지 않다. 내가 아는 건 그 정도로, 왜, 어느 정도 안 좋은지는 알 수 없었다.

뭐 그래도 아픈 아버지라고 찾아오는 거 보면 아예 원수지간은 아닌 건가? 아니지, 아직 작위를 계승받지 않았지. 그건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공작의 동생인 멜라톤 클리포드 백작이 이곳에 온 것도 그것과 관계되어 있을까?

곧 하녀 하나가 나와 문을 열어 주었다.

“어서 오세요, 도련님, 작은 마님. 공작 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루퍼트와 나에게 공손히 머리 숙이는 그녀를 나는 잠시 바라보았다. 이 하녀일까?

그리고 공작의 침대 머리맡에 앉아 있는 여자 하나가 있었다. 그녀는 우리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조심스럽게 머리를 조아렸다.

“엘리아나입니다.”

나는 그녀가 누구일지 잠시 생각했다. 성을 소개하지 않은 거로 봐서는 귀족은 아닌 것 같고, 하지만 복장을 봐선 하녀도 아닌 것 같았다.

“너는…… 전에 아버지를 모시던 하녀가 아니었나.”

아, 하녀‘였’었구나.

“네, 맞습니다, 도련님.”

엘리아나는 뒤의 설명을 생략하는 대신에 얼굴을 붉혔다. 그녀의 반응을 보고 나서야 나는 상황이 이해가 됐다.

엘리아나는 아무래도 측근에서 하녀로서 공작을 모시다 그대로 정부가 된 것 같다. 깍듯한 그녀의 태도는 과거 하녀 시절에 몸에 배인 습관일 것이다.

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소설에는 엘리아나에 대한 이야기는 언급되지 않았다. 그녀의 존재가 앞으로의 일에 영향이 있을까?

그때 공작이 손을 들어 이리로 오라는 듯 까딱까딱 움직였다. 가까이에서 본 공작은 힘없는 노인으로 보이긴 했지만, 정말로 당장 죽을 것 같진 않았다.

곁으로 온 엘리아나가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앉아 계셨는데, 어제부터 갑자기 힘들어하셨어요. 의사는 그냥 기력이 쇠하셔서 그렇다고만 하고, 그래서 신관이라도 모실까 하는데…….”

엘리아나는 진심으로 공작을 걱정하는 듯한 뉘앙스로 말하며 루퍼트를 흘끔 올려다봤다.

신관의 치료 능력은 확실히 보통 의사보다 뛰어나지만 보통 사람이 그를 만나기는 어려웠다.

황족은 당연히 가능했지만, 그 외 보통의 귀족은 미리 신청한 후 한 달은 기다려야 신관의 얼굴이나마 볼 수가 있었다.

전에 사냥 대회에서 내가 신관의 치료를 받을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에녹이 황태자였기 때문이다. 새삼스럽게 내가 받은 특혜가 무엇인지 떠올리자 속이 조금 간지러웠다.

그래도 클리포드 공작은 ‘보통의 귀족’은 아니니까 조금은 빨리 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 신청은 일개 평민인 엘리아나가 할 수 없었다.

듣고 있던 루퍼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고려해 보지.”

공작은 루퍼트와 나를 번갈아 보다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가 버석거리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너로구나, 에린. 아주 어릴 적 봤는데 정말 예쁜 숙녀가 되었구나.”

아픈 와중에도 환대해 주는 공작에게 나는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마치 할아버지가 예뻐하는 손녀를 대하는 것과 같은 태도였다.

나는 그저 치맛자락을 들고 그에게 공손히 무릎 인사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에린 스필렛입니다, 클리포드 공작 각하.”

“스필렛 백작이 죽지 않았다면 너를 보며 얼마나 좋아했을지.”

하지만 공작은 나에게는 반가움을 표했지만, 하나뿐인 아들은 한번 쓱 보기만 할 뿐 뭔가를 얘기하진 않았다.

공작은 나를 향해 손을 한 번 더 까딱거렸다. 나는 루퍼트를 한번 흘끔 보고는 침대 가까이 가서 곁에 걸터앉았다.

고목나무처럼 뻣뻣해진 손이 허공에서 맴돌기에, 나는 공작의 손을 잡아 주었다.

“얘야, 에린.”

“예, 말씀하세요.”

공작의 눈가는 주름져 있었지만, 그의 눈동자만큼은 아픈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형형한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고생이 많겠구나, 내가 다 알고 있단다.”

그의 말을 듣고 먹먹해지는 마음은 내 것이 아닌 에린의 것이었다.

나는 루퍼트를 사랑하지 않았고, 때문에 클로에와 루퍼트에게 때로 화가 날지언정 가슴앓이를 하진 않았다. 그래도 어쨌든 나 역시 에린이기 때문인지 공작의 말에 어쩐지 위로 받고 있었다.

“어서 쾌차하세요, 아버님.”

비록 루퍼트와 이혼하겠다고 마음먹긴 했지만, 별개로 공작은 에린을 아끼는 사람이었다. 와 보길 잘한 것 같다.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그가 죽었다면 아쉬웠을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공작은 힘에 겨운 듯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잡은 손을 이불 안으로 넣어 주었다.

엘리아나가 익숙하게 그의 옆으로 가서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주었다. 나는 잠시 그녀에게 시선을 두다, 루퍼트와 함께 문밖으로 나왔다.

“살펴 가십시오, 도련님, 작은 마님.”

그리고 인사하며 문을 닫는 하녀도 다시 유심히 살펴보았다.

내가 하녀들을 경계하며 바라보는 이유는 한 가지였다.

소설 속에서 공작이 죽은 후, 루퍼트는 클리포드 공작이 되고 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한 하녀에게 묻는다.

비록 공작의 병이 깊었다고는 하나 그가 죽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하녀가 음식에 몰래 탔던 독이 원인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하녀가 누구인지 살펴보려 했으나, 역시 이렇게 보기만 해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정말 공작은 나갈 때까지 루퍼트에게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는 대체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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