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수도의 타운하우스에 도착하자마자, 일단 씻고 뻗어 버렸다.
이혼을 결심한 지금 이곳이 마음 편한 집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따뜻한 물이 나오는 욕실과 침대가 주는 안락함은 무시할 수가 없었다.
창밖에서 지저귀는 새소리에 일어나 보니 어느덧 점심 무렵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나는 부스스한 머리를 손으로 빗어 넘기며 창문을 활짝 열었다. 따뜻한 늦여름의 바람이 나뭇잎 사이사이로 흩어져 내 로즈핑크빛 머리카락을 날려 주었다.
바람을 즐기며 잠시 눈을 감았다 떴는데, 정원 한가운데서 루퍼트가 나를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뭐야, 언제부터 저기서 날 보고 있었던 거지?
나는 화들짝 놀라 창문을 쾅 닫은 후에 커튼까지 쳐 버렸다. 뒤늦게 생각해 보니 이렇게까지 할 건 없나 싶었지만, 왠지 그의 마음이 읽히는 것 같아 싱숭생숭했다.
그에게 이혼하겠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그걸 언제쯤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의 태도가 처음과 같았다면 나는 말하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변했다.
그것이 내가 에린의 몸에 들어와서 보인 변화와 관계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루퍼트는 결혼식 날 보여 줬던 태도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분명히 그는 나, 에린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
더군다나 사고 이후에는 죄책감 같은 것까지 더해져 자꾸 길 잃은 강아지처럼 나를 쳐다본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약해지는 건 아니었고, 혹 원만한 이혼에 방해가 될까 싶어 우려가 됐다.
“클로에도 여전히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것이 참 애매하고도 짜증 나는 대목이었다. 물론 지금 이 시점에서 그가 클로에를 포기하고 나에게 올인하는 건 더더욱 곤란하겠지만 말이다.
“곤란하지, 곤란해.”
클로에는 앤드론 백작의 집으로 간 건지, 이 저택에 함께 돌아오지 않았다. 왜 함께 오지 않았지? 겪어 보니 클로에는 분명 어딘가 수상했지만, 반드시 루퍼트와 이어져야 하는 여주인공이다. 그래야 내 신상에 이롭다. 설마 정말 나 때문에 멀어진 건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초조해졌다.
차라리 루퍼트가 나에게 한눈팔지 않게끔, 그 둘을 조금 더 가깝게 이어 줘 볼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더 이상 엮이는 건 사양이다. 게다가 그건 분명 오지랖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다시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었다. 그는 그 자리에 없었다. 몸을 돌려 문밖으로 나가려는데, 멀리서 말을 타고 달려오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싶어 눈을 찌푸리며 오고 있는 이를 바라보았다. 어느 정도 가까이 와서야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리차드?”
얼마 전에 왔다 갔는데 대체 무슨 일로 저렇게 급하게 오는 거지?
나는 그를 맞이하기 위해 서둘러 문밖으로 나가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나가 보니 리차드가 거의 다 도착해 있었고, 정원에서 그를 본 루퍼트가 정문까지 나가 있었다.
나도 잰걸음으로 정문을 향해 갔다. 다가가니 루퍼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지?”
“공작 각하의 건강이 매우 악화되셨습니다. 속히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원작과 오늘 날짜를 비교해 보았다. 소설에서 정확한 날짜가 나오는 건 아니었지만, 사냥 대회가 끝난 후 확실히 이쯤 해서 공작의 죽음이 가까워져 오긴 한다.
어쩌면…… 그를 살릴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래도 되는 걸까?
“마님께서도 함께 가시지요. 바로 출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이혼을 생각하고 있는 시점에서 그곳에 간다는 게 꺼림칙했다.
“가서 스필렛 백작의 빈소에도 들르는 게 어때.”
아, 에린 아버지의 빈소가 거기 있었구나.
루퍼트가 나를 보며 동의를 구했고, 나는 결국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줬다. 사실 공작에게도 내내 편지했던 사람이라 그런지, 만나지도 않았는데 얄팍한 정이 있었다. 원작에서 그가 에린의 편이라는 것도 물론 한몫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이혼을 앞두고 있다 해도, 죽기 전에 한 번쯤은 직접 보고 싶었다.
“그럼 갈 준비를 하죠.”
루퍼트와 함께 본채로 들어가며 잠시 나는 스치듯이 고민했다.
“클로에 양은 뭐하고 있나요?”
나는 물어 놓고도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생각해 보면 내가 클로에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 좋은 반응이 나온 적이 없는데.
“아마도 자기 집에서 쉬고 있을 거야.”
“……그래요.”
하지만 생각보다 그는 평이한 톤으로 대답했다. 정말 클로에는 안 데리고 가는 건가? 보기 싫은 사람을 보지 않는 건 좋았지만, 역시 조금 신경은 쓰였다.
원작에서는 클로에와 루퍼트가 함께 먼저 출발하고, 에린이 따로 마차를 타고 간다. 그리고 에린이 도착하기도 전에 공작은 먼저 사망하고 만다.
그런데 클로에는 이 집에 있지도 않으니, 결국 나와 루퍼트가 함께 가야 하나. 하지만 그와 별개로 생각해 보니, 원작에 비해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게 아닐까?
조급한 마음을 뒤로한 채, 나는 제니를 불러 간단히 짐을 싸게 했다.
“리아, 이걸 황궁에 좀 전해 줘.”
그러는 동안 짧게 편지를 써서 리아를 통해 에녹에게 전달하게 했다. 아무래도 마법석 광산과 관련된 일로 그가 연락을 취해 올 것 같아, 미리 내 부재를 알려 줘야 할 것 같았다.
마차에 오르기 전, 루퍼트는 미리 나와 마차 옆에 서서 내게 손을 내밀었다.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나와 루퍼트 사이에는 당연하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손끝만 살짝 잡은 채로 마차 위로 올랐다. 나도 모르게 작게 한숨이 나왔다.
앞으로의 원만하고 빠른 이혼을 바라는 내 입장에서, 그가 나에게 친절해진 건 좋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고 그걸 대놓고 지적할 수도 없고.
맞은편에 앉는 루퍼트를 보며 마음이 영 심란했다. 차라리 내가 다소 기분이 나쁘더라도 예전처럼 막 대하는 편이 지금으로선 훨씬 나았다.
나는 출발하는 마차 위에서 애써 눈을 감은 채, 결혼식 때 느꼈던 수치심과 절벽 위에서 떨어질 때의 배신감을 상기하려고 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땐, 루퍼트 역시 눈을 감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공작의 영지까지는 얼마나 걸리려나.
나는 마차의 창문 밖을 바라보며 거리를 가늠해봤지만, 역시 이런 쪽으로는 문외한이라 예상할 수가 없었다.
내가 적절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까?
도착해서 공작을 구할 수 있을까? 그 하녀를 알아볼 수 있을까?
그리고…… 구해도 되는 걸까?
“도착까지는 앞으로 반나절 정도 걸려.”
“……아.”
마치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루퍼트가 툭, 하고 말을 건넸다.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아버지께서는 예전부터 스필렛 백작을 참 좋아하셨지. 더불어 에린 당신까지도.”
그가 갑자기 꺼낸 옛이야기에 나는 표정 관리를 해야 했다. 나는 에린의 어릴 적 이야기 같은 건 전혀 몰랐다. 하지만 적절한 대답 정도는 해낼 수 있었다.
“그래서 뵈러 가는 거예요, 당신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퉁명스러운 대답에 별 반응 없던 루퍼트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그날 일은 미안하게 생각해.”
뜬금없는 사과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다, 이게 그날 절벽에서의 일을 말한다는 걸 깨닫고 아, 하고 입을 벌렸다.
“됐어요, 목숨을 대가로 얻은 이익치고는 상당하니까요. 물론 이게 당신 덕분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순간 가까운 곳에 있는 말을 잡았던 것뿐이야.”
그는 내 대답과 상관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변명을 계속했다. 나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당신이 덜 중요해서 그런 게 아니었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마음 약해지지 말자.
“별로 상관없어요. 당신의 마음이 어찌 됐든.”
“나를 많이 미워하고 있다는 거 알아.”
나는 그의 눈을 피하며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떨어지는 순간 배신감도 들었고 서운한 감정도 있었지만, 애초에 그것 때문에 그를 많이 미워하진 않았다.
왜냐하면 그에게 그런 쪽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었으니까. 그래, 아주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하지만 진짜 에린 스필렛이었다면 이쯤 해서 깊은 애증을 품었을 것이다.
“당신은 아닌가요? 나는 당신의 연인을 인질로 삼아 협박한 사람이에요. 당신이 날 구하지 않는다 해도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죠.”
그러니 나도 이제 진짜 루퍼트의 마음을 확인해 볼까.
“그랬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싶기도 해. 내가 그만큼 오랫동안 당신을 외면해 왔으니까.”
아, 안 돼. 왜 그렇게 쉽게 용서하려 하는 거야, 에린을? 당신이 끔찍하게 아끼는 연인을 담보로 잡았다고.
“……그건 지금도 유효해요. 지금 가서 클로에 양과 당신이 만나고 있어서 내가 정말 곤란하다고, 공작님께 말씀드릴 수 있다고요.”
“정말? 정말 그런 말을 한다고?”
루퍼트는 조금 밝아진 얼굴로 확인하듯이 되물었다. 뭔가 내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말려드는 기분이 들어 나는 다시 입을 닫아 버렸다.
나는 나에게 강한 자에겐 얼마든지 냉정해질 수 있었지만, 약하고 부드러운 자에게는 내 감정과 상관없이 독해지기가 어려웠다. 이건 이성이나 감정과는 별개로 내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였다.
물론 그렇다 해도 이혼은 하겠지만. 저 사람이 저런 감정을 내비칠수록, 냉정해지진 못해도 이혼에 대한 결심은 굳어져만 갔다.
그게 서로를 위해 좋다. 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 역시 최근 에린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낄지라도, 진심으로 사랑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역시 오지랖을 부려야 하나. 아님, 원래 에린처럼 들러붙어야 좀 나한테서 떨어지려나.
내가 루퍼트를 어떻게 하면 잘 떼어놓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이, 마차는 빠르게 이동해서 클리포드 공작의 영지에 도착했다.
클리포드 영지는 온화한 날씨와 비옥한 땅, 큰 항구 덕분에 유동인구가 많고 물자가 풍부한 지역이었다.
그들은 그 옛날 대마법사 리케포로스와 함께 이 제국을 세운 개국 공신이었다. 때문에 전통적인 황제파이며, 또한 대마법사의 핏줄이 뚜렷한 황태자만을 지지했다.
그래서 황실에서도 그들을 늘 대우했고, 그들의 집안에서 황후도 많이 맞아들였다.
듣자 하니 스필렛 백작 가문은 원래 클리포드 공작 가문의 가신이라고 했다. 백작의 작위를 받은 건 한참 전이었지만, 영지를 따로 받아 나온 건 불과 선선대 정도라고 했다.
그냥 가신은 아니었고, 그들 또한 선대까지 타고 올라가면 클리포드 가문에서 나온 서자쯤 되는 것 같았다.
클리포드 가문이 황실과 각별하여 황후를 많이 배출했듯이, 스필렛 가문에서도 공작 부인을 많이 배출했다.
사실 에린이 루퍼트를 차지하려 한 것도, 그렇게 무리한 욕심을 부린 건 아닌 셈이다. 따지고 보면 클로에가 사랑이라는 이름하에 에린을 밀어냈다고 봐야…….
창문에 팔꿈치를 기댄 채 밖을 보던 나는 잠시 얼굴을 굳혔다.
그게 뭐가 어쨌다는 거야. 클로에가 선인이든 악인이든 상관은 없다. 나를 직접 건드리지만 않는다면야.
심란한 마음과 달리 바람은 잔잔했고, 따뜻한 햇살 아래 에메랄드빛 바다도 잠잠했다. 그 바다를 보고 있자니 누군가 생각이 났다.
그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