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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42)화 (42/129)

42화

막사로 들어가기 직전, 나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루퍼트는 배신감과 분노, 상처로 얼룩진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붉게 달아오른 눈가가 막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왜, 당신이 나를 그런 눈으로 보는 건데?

나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차마 발길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 클로에가 그의 팔을 잡는 걸 보고는 정신을 차렸다.

“루퍼트, 가요. 우리.”

그녀가 힘없이 당기는 손길에 루퍼트는 목각 인형처럼 뻣뻣하게, 하지만 순순히 끌려갔다. 그런 사람이 저런 눈빛을 하다니. 하마터면 잠시 착각할 뻔했다. 그렇다 해도 달라질 건 없을 테지만.

“후우.”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드디어 나에게 마련된 공간으로 들어왔다. 그저 사람들의 시선이 차단된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였다.

나는 막사 안 침대 위에 털썩 걸터앉아 잠시 눈을 감았다. 손끝이 바들바들 떨리는 걸 들키진 않았겠지. 심호흡과 함께 다시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원작을 토대로 일을 계획하긴 했지만, 내가 거둔 성과는 정말 얼떨결에 이룬 일이었다. 게다가 절반, 아니 그 이상이 에녹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기뻤다. 뭔가를 해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차마 밖에서 들을까 싶어 소리 내진 못하고, 양손을 꽉 쥔 채 허공에 무언의 함성을 내질렀다. 난 이제 부자가 됐다!

“저…… 흠흠.”

“앗.”

그러다 뒤에서 들리는 헛기침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에녹이 몸을 반쯤 휘장 안으로 들이민 채, 내 모습을 보고 아는 체해야 할지난감해하고 있었다.

주먹을 쥐고 입을 가리는 게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는 것 같았다. 나는 얼굴이 빨개진 채 픽 고개를 돌려 버렸다.

“웃고 싶으면 웃으셔도 돼요.”

“아, 하하, 아닙니다. 기분 좋아 보이시길래.”

에녹이 소리 내어 웃으며 휘장 안으로 완전히 들어왔다. 하루를 그의 비밀 캠프에서 보냈기 때문인지 몰라도, 한 공간에 있다는 게 그다지 어색하지 않았다.

나는 의자를 내어 주고 찻물을 올려 놓았다. 찻잎을 넣으려는데, 색이 좀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나는 코를 킁킁대며 고개를 갸웃했다. 향은 변하지 않은 거 같은데, 습기를 머금어서 그런 건가? 내가 찻잎 든 통을 들고 망설이자, 에녹이 달라는 듯 손을 뻗었다.

“아무래도 찻잎이 변질된 것 같아요. 하루밖에 안 지났는데 왜 이러는 걸까요?”

“드시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차를 드시고 싶으면 내가 사람을 시켜…….”

“아니에요, 이제 여기도 정리할 건데요, 뭐.”

나는 사양하며 에녹의 맞은편에 걸터앉았다. 잠시 차분해진 분위기 속에서 에녹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단정하게 차르륵 떨어지는 검은색 머리카락과 그 아래 에메랄드를 그대로 박아 넣은 것 같은 예쁜 눈동자, 높게 솟은 콧대와 칼날 같은 턱선, 꽤 다부진 어깨와 허리를 곧게 세운 바른 자세까지.

잠시 넋을 놓은 채 그를 보고 있다, 그의 싱긋 웃는 표정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혼 후 내 삶은 어떻게 변하게 될까.

마법석 동굴을 차지하긴 했지만, 그것으로 수익을 내어 빚을 갚고 이혼을 하는 과정까지는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무사히 이혼하여 돈을 갖게 되고, 내 집을 갖고, 그 이후, 그 이후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이혼하고 혼자 지내며, 아무와도 어울리지 않는 채 그렇게 살게 될까? 아니면, 화려한 싱글 라이프를 즐기며 사교계를 휘젓고 살게 될까?

그럼 에녹은 그때 뭘 하고 있을까.

지금 나를 마음에 두고 있는 에녹은, 황태자비를 누구로 맞을까?

끝없이 이어지는 상념에 나는 그만 고개를 저어 버렸다. 바로 앞에 놓인 일만 해도 산더미 같은데, 너무 먼 일까지 생각하는 건 이롭지 않다.

더군다나 지금 내 일만으로도 복잡한데, 거기다 황태자와의 불확실한 미래까지 집어넣으니 혼란만 가중됐다.

내가 그러는 동안 에녹 역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 잔잔하게 다가오는 시선의 의미를 모른 체하며 작게 헛기침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하실 말씀 있으세요?”

“네, 백작. 나는 할 일이 있어 수도에 조금 일찍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아…… 그렇군요.”

멀리서 슬쩍만 봐도 황태자는 늘 바빠 보였다. 이 제국민들이 황태자가 이렇게 부지런하다는 걸 좀 알아 줘야 할 텐데. 그는 아마 좋은 황제가 될 것이다.

아무튼 가 버린다니 아쉬운 건 사실이었다. 언제 또 보게 될까?

“마법석 광산 개발을 본격적으로 시행할 때쯤, 백작의 자리를 마련해 두겠습니다.”

“자리요……? 아.”

“참여를 원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맞아요, 그런데 자리까지 따로 만들어 주실 줄은 몰랐어요.”

“일을 하려면 마땅히 직책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그의 설명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녹은 길게 쭉 뻗은 예쁜 손가락으로 턱 아래쪽을 짚으며 나를 지그시 봤다. 그는 말을 하려 입술을 달싹이다 다시 닫아 버렸다.

나는 입술을 오므린 채 그를 멍하니 보다 결국 말했다.

“왜요?”

“어쩌다 보니 듣게 된 건데, 혹…… 이혼하실 계획이시라면.”

에녹은 아까보다 훨씬 낮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의 말을 들으니, 그가 망설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는 침착하게 다음 말을 기다렸다.

“공작저에 돌아가지 않는 게 좋으실 듯합니다. 루퍼트와 계속 부딪히면 백작께서 힘들어지실 겁니다.”

나도 에녹의 말에 동의한다. 지금 루퍼트와 한 집에 있으면 시한폭탄과 함께 사는 기분이겠지. 하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정리할 건 직접 정리를 해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당장 나와서 갈 곳이 없는걸요. 어느 정도 자금이 생기면 그때 타운하우스를 마련해서…….”

“황궁 내에 묵으실 곳을 마련해 두겠습니다.”

“네?”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황궁에서 일을 하는 이들 중에, 출퇴근이 어려운 사람에게는 거처를 마련해 주게 되어 있습니다. 백작께서 황궁에 계시면 서로 일을 처리하기도 편하고, 또…….”

나는 그가 진심인지 알아보기 위해 눈을 마주한 채 천천히 깜빡거렸다. 그러자 그의 목덜미가 붉게 달아오르며, 슬쩍 아래로 눈을 피했다. 조금 장난기가 발동했다.

“음, 다른 마음은 없으시고요?”

그냥 툭 던진 말에 에녹은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찔했다. 목 아래까지 물든 붉은 기가 얼굴까지 올라왔고, 시선을 한곳에 두지 못했다.

“그건…….”

그는 잠시 목덜미를 한 손으로 감싸 쓸어내리다, 입술을 굳게 다물고는 나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있습니다, 다른 마음.”

예상치 못하게 직구로 던져진 그의 발언에 나는 순간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하아아…….”

뒤늦게서야 두 손으로 붉어진 얼굴을 가리고,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나는 불안했었나?

그가 내내 도와주고, 지켜 주고, 마음까지 털어놨건만, 나는 조금 불안했던 것 같다.

이전 생애에 한 번 배신당한 뒤론, 사랑이라는 감정의 불확실성에 대해 깊이 깨닫고 있는 터라 누군가 날 좋다고 말해도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그의 말은 기뻤다.

“스필렛 백작? 혹시 언짢으십니까?”

늘 당당하던 황태자 에녹이 조심스럽게 나를 살피는 기색에 목구멍이 간지러웠다.

나는 다시 한번 숨을 크게 내쉰 후, 손을 내려 그를 마주 보았다.

어떻게 할까, 일국의 황태자이다. 이 사람이 내 미래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일까? 아니, 그의 미래에 내가 들어갈 자리가 있을까?

그 질문의 답은 회의적이었다.

결국 나는 담담한 얼굴로 그를 보며 입꼬리만 살짝 끌어올렸다.

“배려 감사합니다, 전하.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쨌든 바로 집을 나오진 못하더라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황궁이든 어디든 묵을 곳이 있는 게 좋을 것이다.

내 깍듯한 태도에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시선을 내렸다.

그래, 아직은.

천천히 일어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수도에서 뵙겠습니다.”

짧은 인사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에녹은 잠시 머뭇거리다 막사 밖으로 사라졌다.

내 방에 그가 들어왔다 나갔을 뿐인데 유난히 텅 비어 보였다. 어느새 허전함을 느낄 만큼 그가 익숙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음이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했다. 안 돼, 다잡아야 해, 하면서도 나는 그가 앉아 있던 의자에 한동안 시선을 뒀다.

잠깐 그렇게 멍하니 있던 나는 리아를 부르기로 했다.

“짐을 싸야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가 죽은 줄 알고 여기 있던 옷가지들을 다 태워 버리는 바람에 가져온 것 보다 가져갈 것이 절반 이상 줄어 버렸다.

리아와 함께 짐을 싸고, 하인을 시켜 마차에 싣게 했다. 에녹은 아까 그의 말대로 먼저 떠난 것 같았다.

사람들이 하나둘 자신의 마차를 타고 떠나기 시작했다. 루퍼트는 클로에와 갔겠지? 곧 이혼할 남편을 챙기는 건 좀 우습잖아.

그렇게 생각하며 리아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오르려는데, 내 반대편 손을 잡는 사람이 있었다.

마차에 올라앉아서 보니 루퍼트였다. 그는 아까의 흥분한 모습은 사라지고 평상시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그래도 정상적인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아직 안 갔어요?”

“같이 타고 가.”

“……왜요? 클로에 영애는요?”

“몸이 안 좋은 것 같아서 일찍 보냈어. 난 타고 갈 마차가 없고.”

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하기를 꺼리자, 루퍼트는 무거운 한숨과 함께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탁해, 할 일이 있어서 수도로 돌아가야 해.”

자기 뜻대로 안 되면 화부터 내는 모습만 보다가, 진지하게 부탁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조금 의아했다.

“알았어요, 타세요.”

“고마워.”

그의 인사에 나는 또 한 번 움찔했다. 왜 사람이 착해진 거지?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죄책감 때문인가?

나는 떠오르는 의문을 뒤로한 채 맞은편에 앉은 그를 보지 않기 위해 창문 밖을 보았다.

황실 마차는 부드럽게 출발했다.

이 마차에 대해서도 뭔가 말할 줄 알았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한참을 그렇게 말없이 있던 그는 평온한 음성으로 의외의 말을 꺼냈다.

“다친 곳은 없어?”

나는 흠칫 놀라 눈을 크게 뜨고 깜빡이다 짧게 대답했다.

“다 나았어요.”

그러자 루퍼트가 마치 다행이라는 듯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태도 변화에 당황하면서, 나는 그새 어두워진 창밖을 바라보았다. 수도가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어느새 공기 속에 더운 기운이 많이 사라져 있었다. 푸릇했던 들판이 서서히 노랗게 바래다, 지는 태양에 붉은 물결을 만들어 냈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면서도, 나는 끝끝내 그를 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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