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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40)화 (40/129)

40화

“이제 사냥 대회가 끝났겠구나.”

나는 리아가 가져온 내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 전에 이곳 주변을 돌아봤는데, 겉보기에는 흙과 나무로 덮여 마치 그냥 산으로 보였다.

하지만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가 보면, 이렇게 안락한 숙소가 나오는 독특한 구조였다. 밖에는 이곳을 지키는 기사들이 있다고는 들었는데, 어디에 숨어 있는 건지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세워 둔 사람도 없으니 그냥 완전히 산이었다.

‘황태자가 이런 곳을 알다니, 의외인걸.’

나는 쉬는 동안 원작의 내용을 다시 한번 머릿속으로 점검했다.

아마 지금 마법석 동굴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클로에일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내가 죽었다고 알고 있다.

그럼 클로에가 동굴을 발견하면서 내 죽음까지 알렸다는 걸 텐데, 시체도 없이 어떻게 죽었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방안을 서성거리며 홀로 고민하는 동안, 기다렸던 사람이 도착했다.

바깥의 두터운 문을 여는 소리에, 내가 먼저 그를 마중 나갔다.

“백작, 더 주무시지 않고요.”

“저 하루 종일 잤는걸요, 이제 정말 괜찮아요.”

열을 확인하려 뻗어 오는 손을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확실히 열은 없군요.”

나 역시 그가 오자마자 위아래로 한 번 훑어본 참이었다. 아까 입고 나갔던 제복은 풀잎 하나 묻지 않은 채 깔끔한 편이었다.

“사냥은 거의 안 하셨나요?”

“적당히, 힘 빼지 않을 만큼만 했습니다.”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루퍼트가 일등을 했겠군요.”

나는 원작의 일을 떠올려 말한 것인데, 에녹의 입장에서는 다르게 들린 모양이었다.

“뭔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씀하시는데요.”

그가 자존심이 상한 듯 중얼거리는 음성에 나는 조금 당황하며 대답했다.

“그야, 뭐, 늘 그랬다고…… 전해 들었거든요. 흠, 이번에는 아닌가요?”

“일단은 이등입니다, 내가.”

“아, 잘 하셨네요.”

순수하게 건넨 칭찬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뭔가 뚱한 표정이었다.

“지금은…… 공개하기에 좋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전심전력을 다하지 않은 건, 루퍼트와 달리 황실 입장에서는 신하들의 사기도 중요하거니와…….”

말을 듣고 있다 보니 어째 에녹이 자신이 일등을 놓친 것에 대해서 변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나는 상관없는데.

그리고 ‘일단은’, ‘지금은’이라는 단어가 줄곧 포함되어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전하, 폐하께서 오실 때 모든 걸 공개하실 생각이신 거군요.”

내 말에 그가 동의했다.

“그렇습니다. 폐하의 앞에서 밝혀야 백작이 쓸데없는 잡음에 휘말리는 걸 막을 수 있습니다.”

거기까지 생각하다니, 나는 동굴만 찾으면 될 거라 생각했는데. 내 계획을 미리 알려 준 것도 아닌데 거기까지 예상했다는 사실에 속으로 나는 감탄했다.

“그럼 언제쯤 준비해서 가면 될까요?”

“점심이 지날 무렵에 폐하께서 도착하실 겁니다. 그때 다시 모시러 오겠습니다.”

그는 아쉬운 듯한 눈길로 나를 보다 일어났다. 나는 그의 마음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피하지 않고 담담하게 웃어 보였다. 이 일이 잘 끝난 후에도 아직 우리 앞에 벽은 남아 있을 것이다.

“역시 루퍼트는 클로에 양에게 점수를 줬겠죠?”

에녹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고, 나는 씁쓸히 웃으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에게 서운하십니까?”

“서운하다기보단…… 그냥, 너무 예상대로라 허탈하네요.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루퍼트가 클로에를 구한 것도 그렇거니와, 이후에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텐데도 그는 여전히 그녀를 아꼈다.

역시 이혼해야겠다. 당장 마법석 동굴을 차지하지 못하는 건 아깝겠지만, 내가 빠져 주는 건 그들에게도 좋은 일일 것이다.

‘그러니 방해하지 말아 주면 좋겠어, 루퍼트. 적어도 네 사랑은 지킬 수 있을 테니까.’

로맨스 소설 남자 주인공으로서의 역할은 뺏지 않을 것이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에 잠겨 땅을 보는 동안, 에녹은 할 말이 남은 듯 나를 보다 곧 밖으로 나갔다.

***

황제가 도착한다는 소식에 하인들과 병사들은 분주하게 주변을 정리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제 벌여 놓은 술판도 정리했고,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무기들도 정리했다. 이제 막 오신다 했으니 황태자 전하만 오시면 되겠는데, 어딜 가신 건지 통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황실 기사단장은 다음 서열인 브리먼 황자에게로 가서 도움을 요청했다.

“아우님께서 안 계신다니, 할 수 없지.”

브리먼 황자는 기분 좋은 미소를 띠며 앞으로 나서 걸었다. 늘 이런 빛나는 자리는 황태자의 몫이었는데, 대신이라고 해도 나쁘지 않았다.

특히 오늘은 그가 원하던 것 중 하나를 이룬 날이었으니 더더욱 그랬다.

황제를 실은 마차가 도착했다. 황제는 호위를 의식하여 화려한 마차가 아닌 겉보기에 평범한 마차를 타고 도착했다.

황제는 마차에서 내리면서, 그를 맞이하는 것이 브리먼 황자임을 알고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

“에녹은 어디 갔느냐.”

“내내 찾아봤지만,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아 제가 대신 나왔습니다, 폐하.”

황제는 유심히 그를 보다 끄덕이며 지나쳐 갔다.

“너도 고생이 많았다.”

“황공합니다.”

중앙에 모인 사람들은 황제를 보자 일제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면면을 보며 황제가 단상 위로 올라섰다.

이번에 모인 사람 중에서는 황제를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인 사람도 있었다.

일반 행사였다면 이렇게 가깝지 못했겠지만, 사냥 대회라는 특수성 때문에 거리가 가까웠다.

“와, 황태자 전하와 정말 닮았네. 아주 빼다 박았어.”

그는 기분 좋은 듯 보이면서도, 날카롭게 빛나는 눈매가 꼭 에녹과 닮아 있었다.

“오늘 기쁜 소식이 있다 하여 짐이 이렇게 친히 왔노라. 자, 오늘의 우승자는 앞으로 나오거라.”

사람들 사이에 앉아 있던 클로에가 수줍은 미소를 띠고 일어났다. 주위에서는 찬사를 보냈고, 그녀는 루퍼트를 돌아보았다.

루퍼트는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클로에가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사뿐사뿐 사람들 사이로 걸어 나갔다. 단상에 오르기 전 아주 잠시 브리먼과 눈이 마주쳐 주춤했을 뿐, 그녀의 발걸음은 가볍고 상쾌했다.

미혼인 전사들은 그저 예쁜 영애를 봐 기분 좋은 듯 헤벌레 웃고 있기도 했다. 클로에는 그들에게도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이 레이디의 기사께서도 앞으로 나오시게.”

보좌관의 말에 가만히 있던 루퍼트도 결국 일어나 단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황제 앞에 클로에와 함께 무릎을 꿇었다.

“흠.”

황제는 그들을 보며 잠시 뜸을 들이다 다시 황태자를 찾았다.

“에녹은 아직인가?”

“예, 폐하. 아직 전하께서는 보이지 않으십니다.”

“녀석, 꾸물거리기는.”

황제의 옆에는 빛나는 트로피를 든 보좌관이 서 있었다. 황제가 그것을 받기 전, 클로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폐하, 그것을 받기 전에 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말해 보거라.”

황제는 트로피를 다시 놓고 클로에를 내려다봤다. 클로에는 일어나 공손히 허리를 숙이고는 슬픈 듯하면서도 감격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바로 마법석 동굴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흠, 네가 말이지?”

황제가 눈썹을 한 번 까딱거렸고, 클로에는 여전히 시선을 내리깐 채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것을 찾기 전에 끔찍한 비극이 있었습니다. 그 비극에 희생된 그녀를 위로코자, 저는 그 동굴의 소유권을 그녀의 남편이신 루퍼트 클리포드 기사님께 드리고자 합니다.”

***

적당한 바람과 온화한 햇볕이 드는 좋은 날이었다. 이런 날 숲은 싱그러운 녹빛을 머금고 더욱 푸르게 빛났다. 마치 이 사람의 눈빛처럼.

그 푸른 숲이 지금 내 발 아래로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저, 전하, 꼭 이렇게 가야 하나요?”

“다른 방법도 있겠지만 지금으로선 이게 제일 빠른 방법입니다. 또 효과적이죠. 꽉 잡으세요, 백작.”

“꺄악!”

나는 지금 하늘 위를 날고 있었다.

풍성한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며, 에녹의 품에 답싹 안긴 채 바들바들 떨리는 팔로 그의 목을 안아 꼭 매달렸다.

언젠가 한번 들은 것 같은 그의 낮은 웃음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그런데, 진짜 마법사이시네요!”

바람이 웅웅대는 소리에 말을 하려면 소리를 질러야만 했다.

“그럼 아닌 줄 아셨습니까?”

그건 아니지만. 사실 에녹이 마법 쓰는 걸 몇 번 보긴 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실감 난 적은 처음이었다.

조금은 무서우면서도, 솔직히 재밌고 흥분됐다.

“백작께서 나는 걸 이렇게 좋아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니까요, 왜 진작 말씀 안 하셨어요?”

처음에는 눈을 꼭 감고 있기만 했던 나는, 이제 그에게 의지한 채 살짝살짝 눈을 뜨고 아래를 봤다.

탁 트인 숲과 계곡과 폭포까지 보였고, 저 아래 사냥 대회의 본부도 조그맣게 눈에 들어왔다. 이제 거의 다 온 것 같았다. 너무 빨리 온 것 같아 조금 아쉽기도 했다.

“평소에도 그럼 날아다니면 되지 않나요? 이렇게 신나는데.”

“으음,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는 사냥 대회 본부 막사 뒤편, 조금 한적한 곳에 나를 내려 주며 말했다. 아까는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던 그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나는 얼른 손수건을 꺼내 그의 이마를 닦아 주었다. 그러자 에녹이 자상하게 눈을 마주했다.

“무섭진 않으셨습니까?”

“무서웠지만, 좋은 경험이었어요.”

한숨 돌리며 나는 저편에 있는 단상 위를 바라보았다.

이미 황제 폐하가 나와 있었고, 그곳에 클로에와 루퍼트가 무릎을 꿇은 채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것을 보고 나니, 찬물을 맞은 듯 흥분이 가라앉았다. 나는 그들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다 가진 줄 알았다가 뺏기는 기분을 맛보게 해 줄 것이다.

“백작.”

에녹이 나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손을 잡고 단상 앞으로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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