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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39)화 (39/129)

39화

루퍼트가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에녹이 와서 그가 놓친 몬스터 한 마리를 검으로 잡고 있었다.

“어딜 다녀오셨습니까.”

“다른 구역도 좀 다녀왔네. 그래도 여기가 역시 제일 넓군. 벌써 자네가 일등인 것 같던데.”

루퍼트는 에녹의 등 뒤로 박쥐 몬스터가 날아오는 걸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검을 날렸다.

에녹은 바로 귀 뒤에서 벌어진 참상에 끔찍한 듯 몸을 피했다.

“예고는 좀 해 주지 그랬나.”

“전하께서도 알고 계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작년보다 훨씬 수가 많은 것 같군. 떼로 몰려다니기까지 하니.”

“마물 때문이겠지요. 그 마물의 영향으로 일대 짐승들이 전부 몬스터로 변한 것 같습니다.”

루퍼트는 그렇게 대꾸하면서도 에녹의 검술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조금은 안심했다.

에녹의 검술은 황실에서 내려오는 화려한 검술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남에게 선보이기는 좋으나 궤적이 크고 넓어 동선의 낭비가 심했다.

에녹의 검 실력 자체는 결코 나쁘지 않았지만, 저런 겉멋만 잔뜩 든 검술에 바탕을 둔 것이라면 자신의 실용적인 검술에 비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진지하게 검을 잡으니, 격차는 금방 좁혀졌다. 루퍼트는 관찰을 관두고, 자신도 모르게 그와 경쟁하며 더욱 격차를 벌려 놓았다.

“마법은 쓰지 않으십니까.”

“그럼 공정한 경쟁이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반칙도 아니지요.”

실제로 마법과 검술을 같이 익힌 이들도 있었고, 그들은 상황에 맞춰 유리한 것을 썼다. 더군다나 황태자가 마법을 쓴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는가.

“하지만 남아나는 것이 없으면 곤란하지.”

그의 마지막 중얼거림에 루퍼트는 또다시 열등감을 느꼈다. 저 자신 있는 태도, 당연히 가능하다는 그 말투가 때때로 옆에 있는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들곤 했다.

“그렇게 정하셨다면야.”

이미 남아 있는 몬스터의 수는 별로 많지 않았고, 2등인 에녹이 저걸 다 잡는다 해도 뒤집을 순 없을 것 같았다.

루퍼트는 검기를 날려 남은 것들까지 모조리 쓸어 버렸다.

에녹은 놀라운 듯 박수 치며 휘파람을 불었다.

“풀이 죽어 있을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평소보다 일찍 끝났네.”

“전하께서는 누구에게 점수를 주실 겁니까.”

질문하는 루퍼트의 푸른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나며 에녹을 향했다. 에녹은 그에 옅게 웃으며 애매하게 답을 피했다.

“글쎄, 그러는 자네는?”

루퍼트는 왜 뻔한 질문을 하냐는 듯 그를 쳐다보다, 에녹의 눈동자에 순간 스치는 경멸에 인상을 찌푸렸다.

“어떤 대답을 원하시는지?”

설마 죽은 에린에게라도 바치라는 의미인가? 무엇을 위해서? 단순한 애도를 위해?

“아닐세. 자네의 그 사랑이 앞으로도 순탄하길 빌겠네.”

“전하께서도 황태자비를 맞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루퍼트는 자신의 연애사에 신경 끄라는 의미로 황태자가 제일 질색하는 말을 꺼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에녹은 여유롭게 웃음 지어 보였다.

“생각 중일세.”

‘역시 재수 없는 놈.’

먼저 내려가는 에녹의 뒤통수를 보며 루퍼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에녹이 후에 피식 비웃은 것까지는 보지 못했다.

***

밤사이 전투는 격렬했다.

루퍼트와 에녹이 있는 곳은 몬스터를 그나마 깔끔하게 해치웠지만, 다른 곳도 그렇지는 못했다.

평소보다 몬스터의 숫자가 훨씬 많았기 때문에, 죽은 사람도 몇몇 있었고 다친 사람들도 속출했다.

그들을 모두 이송한 후, 해가 뜰 무렵이 되어서야 전사들은 자신의 구역에서 내려와 본부에 모였다.

비교적 멀쩡한 사람들은 차례로 줄을 서서 자신의 팔찌를 마법구에 갖다 대었다. 그러면 자신이 잡은 몬스터의 숫자가 마법구에 떠올랐고, 그걸 서기관이 받아 적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점수를 등록한 후에도 떠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것을 함께 구경했다.

비록 점수가 순위권에 들지 않더라도, 잡은 수는 무공이 되어 나중의 승진에 도움이 되었다.

에녹은 한쪽으로 물러나 무표정하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참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별일 없이 잘 있겠지.’

그는 허공을 바라보는 듯, 산중턱에 시선을 주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전하……!”

눈에 익은 얼굴이다 싶어 살펴보니, 데이먼 로젠이었다. 그는 에린의 사고를 제일 처음 에녹에게 전달해 준 앳된 기사였다.

그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에녹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그분이 돌아가신 건가요? 정말인가요?”

에녹은 침을 삼켰다. 자신에게 일러 준 공로를 인정해 미리 진실을 말해 주는 게 나을지, 보안을 위해 입을 다무는 게 나을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을 듣고 확실히 굳혔다.

“처음으로 마음을 뺏긴 레이디인데…… 이럴 수가…….”

눈물을 뚝뚝 떨구는 데이먼을 보며 에녹은 헛웃음을 지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그분은 이미 그때 클리포드 경의 아내였네. 마음을 뺏겨서 어찌할 생각이었나.”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어차피 그분은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걸요. 제가 구애하다 여차하면 그 자리를 차지하면 되는 거죠.”

너무나 솔직한 발언에 할 말을 잃은 동안, 데이먼은 자신의 불경을 용서하라며 중얼중얼 땅에 머리를 박고는 홀로 풀이 죽은 채로 돌아갔다.

“로젠 경.”

에녹이 그를 부르는 목소리는 이어진 함성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와아아아……!”

바로 루퍼트가 팔찌를 갖다 댄 순간 울려 퍼진 소리였다.

“……천, 천 마리가 넘어! 점수로는 오천 사백 점?”

에녹은 점수를 듣고 훅 한숨을 쉬었다. 하마터면 따라잡힐 뻔하지 않았나. 어릴 때부터 보아 왔지만, 루퍼트는 역시나 대단한 검사였다.

그리고 그때, 가녀린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루퍼트……!”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에녹이 얼굴을 굳히며 바라보았다. 루퍼트는 달려오는 클로에가 넘어질세라 먼저 다가가 끌어안았다.

사람들은 휘파람을 불며 그 연인들을 놀려 댔다. 순식간에 축제 분위기가 물씬 풍겨 나왔다.

밤사이 고생했을 전사들을 위해 푸짐한 음식들이 차려지고, 저마다의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루퍼트와 클로에는 그 한가운데 있었다.

루퍼트와 클로에의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안도와 분노가 교차했다. 원래 친하지 않았던 부인들도 다가와 클로에에게 상냥하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정말 쉽게 잊히는구나.”

에녹은 멀지 않은 곳에서 즐거워 보이는 사람들을 훑어보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저쪽 한구석에는 국화 무덤과 아직 타다 남은 향이 부스러져 있었다.

정말 에린이 죽었더라면, 자신은 이 장면을 두고 보지 못했으리라.

그때 멀리 있던 루퍼트가 에녹을 봤고, 그와 눈이 마주친 에녹은 휙 돌아가 버렸다.

가진 것을 지키지도 못한 주제에, 금세 잊고 영광을 누리는 모습이 꼴 보기 싫어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루퍼트는 그를 그냥 보내 주지 않았다.

“전하, 아직 팔찌를 등록하지 않으셨습니다.”

“아, 깜빡했네.”

에녹은 직접 가는 대신에 시종에게 자신의 팔찌를 풀어 건네주었다. 시종은 조심스럽게 그것을 들고 가 서기관에게 건네주었고, 서기관이 그것을 마법구에 댔다.

“이천 팔백 점입니다!”

“오오오, 전하께서도 상당하신데!”

비록 이등이었지만, 에녹이 거의 처음 이 대회에 참가했다는 점에서, 생각보다 높은 점수라는 듯 모두 감탄했다.

하지만 일등과 이등과의 점수 차이는 거의 두 배에 달했고, 루퍼트는 그제야 안심한 듯 에녹에게 축하 인사를 전했다.

“축하드립니다, 전하.”

“이르네, 아직.”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사람들은 그저 황태자인 에녹이 생각보다 선전했다 생각하며 나름의 축하를 건넸다.

에녹은 손을 허공에 저으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무슨 뜻이지?’

신경 쓰이는 와중에 클로에가 잔을 채워 주었다.

루퍼트는 에린을 떠올리며, 속으로 씁쓸한 애도를 표하고 잔을 들이켰다.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는 클로에의 얼굴에는 맑은 미소가 떠올랐지만, 그녀는 이내 웃음을 능숙하게 감추었다. 그리고는 곧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우리끼리 이렇게 즐거워도 되는 걸까요. 생각할수록 마음이 아파 견딜 수가 없어요…….”

그녀의 슬픈 음성에 모두가 숙연해졌다. 클로에는 누군가에게 부탁하여 에린의 목걸이를 가지고 오게 했다. 그리고 자신의 반지를 빼냈다.

“장례를 치를 때 이것도 함께 태웠으면 해요. 부인께서 갖고 싶어 했던 건데, 드렸으면 혹시 살아 돌아오셨을지도…….”

“그만해, 클로에.”

그녀의 말에 괴로운 듯 루퍼트는 다시 잔을 들이켰다.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잊어.”

그건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런 루퍼트를 보던 클로에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끄덕이며 눈물을 훔쳐냈다.

“알았어요, 더는 언급하지 않을게요. 하지만 장례는 꼭 제 말대로 해 주세요.”

루퍼트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산에 올라갔을 때 에녹이 한 말이 떠올랐다.

‘따지고 보면 이번 일들이 그녀에게는 다 좋은 일들이니까.’

그는 클로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눈물이 가득 고인 오렌지빛 눈동자를 보며 다시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클로에는 늘 한 발짝 뒤에서 자신을 이해해 주고, 모든 걸 양보해 주는 천사 같은 여자였다.

‘그럴 리가 없어.’

루퍼트는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보드라운 갈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었고, 애써 웃음 지어 보였다.

“내 점수를 모두 클로에 앤드론 영애에게 양도한다.”

뚜렷한 목소리에 서기관이 그 말을 받아 적었고, 사람들은 또 한 번 웃으며 축하했다.

“우리의 두 주인공을 위하여.”

먼 곳에서 브리먼 황자가 혼자 잔을 든 채, 루퍼트와 클로에를 향해 건배하듯이 손짓하고는 입술에 갖다 대었다.

술이 묻은 입술을 훑는 혀가 까맣게 변했다가 곧 원래 색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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