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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38)화 (38/129)

38화

에녹은 단상에서 훌쩍 뛰어내려 루퍼트의 곁으로 다가왔다. 황태자는 사실 딱히 속한 팀이 없어 누구와 함께 가든 그의 자유였다. 여태까지는 거의 빠져 있거나, 가더라도 후방에서 뒤따라가는 정도였다.

“피곤해 보이는군. 자네가 힘을 내야 빨리 끝내고 내려올 텐데.”

“이쪽으로 가실 생각입니까.”

“그렇네, 내가 그쪽으로는 아직 안 가 봤거든.”

루퍼트는 혹시나 싶어 가까이에서 에녹의 기색을 살펴봤지만, 그는 전혀 침울하거나 화나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점점 루퍼트를 화나게 했다.

에녹이 자신과 같은 감정을 느끼길 바란 것도 딱히 아니지만, 에린을 완전히 잊었다는 듯한 태도는 너무하지 않은가.

하지만 에린의 남편은 자신이었고, 에녹에게 ‘에린의 죽음이 슬프지 않느냐’고 직접 묻는 것도 이상하다 여겨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은 기색을 내보일 자신도 없었다.

에녹이 흘끔 자신을 보는 시선을 느꼈지만 애써 무시하고, 앞으로 전진했다.

루퍼트와 몇 명이 팀을 이루었지만, 사실 팀 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나머지 사람들은 거의 신입이었다.

루퍼트의 팀은 맡은 구역까지 올라와 걸음을 멈췄다. 그는 에녹을 흘끔 봤고, 에녹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손을 저었다.

“난 없다고 생각하게.”

이 팀의 리더는 당연히 루퍼트였다. 그는 에녹의 말에 지도 한 장을 팀원들에게 펼쳐 보이며 말했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가 우리의 구역이다. 올라가면서 남김없이 소탕하는 것이 목표이다. 너희들이 먼저 가고, 나는 그 뒤를 따라가며 남은 것들을 잡겠다.”

“예, 알겠습니다!”

“위험한 몬스터는 무리하지 말고 합심해서 처리하길 바란다. 그럼, 이상.”

말이 끝나자 에녹을 제외한 팀원들이 먼저 올라갔다. 루퍼트가 먼저 올라가 버리면, 그가 몬스터를 거의 몰살해 버리기 때문에 다른 팀원들이 잡을 몬스터가 없게 된다.

루퍼트는 땅을 발로 짓이기며, 잠시 시간을 끌었다. 에녹에게 할 말은 많았지만, 할 수 있는 말도 없어 답답하고 어색하기만 했다.

늘 먼저 말을 건네는 에녹도 오늘따라 말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 흔한 위로의 말 몇 마디조차 그는 하지 않았다. 혹시 정말 못 들은 건가?

“전하.”

“자네, 마물이 출현했다는 소식은 들었나.”

루퍼트가 입을 열기 무섭게, 에녹이 먼저 물어 왔다. 루퍼트는 일단 그의 질문에 먼저 답을 했다.

“들었습니다.”

“누가 마물을 소환했다고 보는가.”

루퍼트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 확신 없는 어조로 대답했다.

“주인 잃은 마물은 종종 나타나곤 하지요. 흑마법사가 소환해 놓고 죽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그건, 그래. 하지만 참 공교롭지 않은가.”

무슨 말인지 몰라 루퍼트는 인상을 찌푸렸다. 에녹은 뒷짐을 진 채 숲을 둘러보며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마물이 죽은 장소는 마법석 동굴이었네. 그것을 찾은 사람이 자네의 정부라지, 아마도.”

“마물은 마기를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마기가 가장 짙은 장소가 그곳이니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클로에를 언급하시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에녹은 그를 향해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따지고 보면, 이번 일들이 그녀에게는 다 좋은 일들이니까.”

그의 느긋한 태도와 말투에 루퍼트는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푸른 눈동자에 불꽃이 일듯 일렁거렸다.

“제 아내가 죽었습니다. 한데 전하께서는 그에 관한 언급은 한 번도 없으시고, 마물이나 마법석 동굴에 관한 이야기만 하시는군요.”

그러자 에녹은 의아하다는 듯 루퍼트를 바라보았다.

“내가 그분의 이야기를 자네와 하길 바라는가? 나는 자네가 오히려 싫어할 거라 생각했다만.”

“…….”

생각해 보면, 에녹이 자신만큼이나 슬퍼하고 애통해하는 걸 본다고 해서 기분이 나아질 리 없었다. 오히려 이미 죽은 에린과 황태자 사이에 대한 의구심만 피어나겠지.

“후, 그녀는 사고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클로에는 제가 걱정이 돼서 올라갔다 동굴을 찾게 된 것일 뿐, 그저 우연입니다.”

루퍼트는 일단 클로에에 대한 에녹의 말도 안 되는 의구심부터 지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으로서도 의혹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에린은 이미 죽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를 많이 아끼나 보네.”

루퍼트는 에녹이 말하는 그녀가 누군지 고민하다, 곧 클로에라는 걸 알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사고는 우연일지라도, 결국은 필연인 거지. 언젠가 일어날 일이었어, 어떤 형태로든.”

“전하……!”

“슬퍼하기만 하고, 죽음에 대한 의혹을 파헤쳐 주지 않는 건 기만이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네.”

에녹은 그 말을 끝으로 걸음을 옮겼다. 루퍼트는 그런 에녹을 보다 신경질적으로 검을 잡고는 산 위로 뛰어 올라갔다.

루퍼트는 눈앞에 나타난 몬스터 한 마리를 그대로 베어 버리며 숨을 골랐다.

‘기만이라고? 내가?’

하지만 에녹의 의심은 뜬금없었다. 에린의 죽음이 클로에랑 무슨 상관이라는 거지? 애초에 떨어지는 에린을 잡지 않은 건 자신이었다.

여기서 클로에를 자신이 의심한다면 그야말로 책임 회피가 되어 버린다.

그때부터 루퍼트는 닥치는 대로 몬스터를 검으로 베기 시작했다. 에녹을 신경 쓰는 일도 접어 두었다.

오로지 몬스터 잡는 일에만 몰두하니 차라리 마음이 덜 답답했다.

클로에는 사랑스럽고, 지켜 주고 싶은 여자였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열등감에 빠져 있던 자신을 위로해 주고, 공감하고 이해해 준 사람이었다.

반면 에린에 대한 감정은 좀 더 복잡했다.

그녀의 시선을 받을 때면 부담스러워 숨고 싶으면서도, 황태자가 아닌 자신을 본다는 것에 한편으로 뿌듯해했다.

하지만 못난 모습까지 같이 보여 주고 있다는 생각에 수치스럽기도 했고, 그 시선을 의식해서 좀 더 멋져 보이려 자신을 갈고 닦기도 했다.

에린은 그저 보고 있을 뿐이었지만, 자신은 그것만으로도 휘둘렸다.

에린에 대해 ‘좋다’는 말보다 ‘싫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만일 에린에 대한 감정이 여기서 더 구체화되었더라면, 자신은 에린에게 집착하면서도 결코 상냥하게 대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차라리…… 그래, 이쯤에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가슴 한편이 죄여 오는 기분을 끝내 감당하지 못했다.

루퍼트는 다시 검을 휘둘러 그것에서부터 달아나려 했다.

***

“후우, 클리포드 경은 역시 대단하군요.”

테리언 자작은 먼 곳에서 그를 보며 감탄했다. 한 마리라도 더 잡고 싶어 안달이 났지만, 옆에 있는 에녹은 느긋하기만 했다.

“그래서, 찾았어?”

“예, 이곳입니다. 시간이 없었던 건지, 대담한 건지 몰라도 길에서 별로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수고했네.”

에녹은 뒷짐을 지고, 테리언 자작이 안내하는 곳으로 따라 들어갔다. 마법사가 먼저 은은한 불을 밝힌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에녹을 보자 인사하려 했지만, 그가 손을 들어 만류했다.

“아아, 쉿. 얼른 보고 돌아갈 거니까.”

“정말 대회에 참가하시는 겁니까?”

“……하긴 해야 할 것 같네. 내 레이디께서 지는 건 싫다 하셨으니.”

에린은 절대 그런 말을 한 적 없었지만, 에녹은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며 홀로 웃었다.

“이건가?”

에녹은 마법사가 들고 있는 종잇조각을 건네받았다. 타다 남은 조각은 언뜻 보면 보통의 종이 같아 보여도, 실은 마물을 소환하는 부적이었다.

에녹은 그것을 이리저리 뒤집어 보고 난 후, 다시 마법사에게 건넸다. 그는 그것을 두툼한 책갈피 속에 잘 끼워 보관하고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전에 흑마법사였으니, 뭔가 더 잘 알 거 아니야.”

“마물을 소환한 사람은 대단한 마법사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마물이 그렇게 홀로 도망쳤다는 건 소환자가 결국 직후에 의식을 잃었다는 것을 말해 주니까요. 뜨내기 흑마법사들이 흔히 저지르는 일 중 하나이지요.”

“살아는 있을까?”

“기력이 다해 시름시름 앓다 죽거나, 살았다면 따로 보충을 해야 합니다.”

“보충은 어떻게 하지?”

마법사는 한숨 고른 뒤 다시 말했다.

“흑마법사들은 상하 관계가 뚜렷한 집단입니다. 각자 모시는 마족이나 마왕의 서열이 곧 그들의 서열입니다. 이 세계와는 또 다른 규칙을 갖고 있는 집단이라 보시면 됩니다.”

“계속, 말해라.”

“예를 들어 황태자 전하께서 중급 마족 발록과 계약하시고, 노예 중 하나가 마왕과 계약했다면 인간 세계의 신분과 상관없이 노예에게 복종하게 되는 겁니다.”

“하필 왜 내가 발록이야?”

에녹이 엉뚱한 곳에서 투덜거리자, 마법사는 우물쭈물하며 말문을 닫아 버렸다. 그러자 다시 에녹이 그를 재촉했다.

“그래서, 더.”

“흠흠, 아무튼 그렇게 차이가 많이 나는 상급 흑마법사와 접촉하면 기운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더더욱 그를 따르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것만으로 거기까지 추측하긴 무리가 있지. 이 소환자가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모르지만, 살았다면.”

에녹이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말을 멈췄다. 그와 눈이 마주친 테리언 자작이 숨을 들이마셨다.

마법사가 그의 말을 이어 결론을 내렸다.

“그보다 높은 흑마법사가 존재한다는 겁니다.”

“정말 머리가 아프군.”

에녹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있던 곳에서 빠져나왔다.

“전하, 짐작 가는 사람을 조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증거가 없잖아. 게다가 그런 집단이 존재한다면, 그들이 뭘 원하는지도 모르겠고.”

“어릴 적 읽은 동화에서 마왕은 늘 세계 정복을 꿈꾸던데요.”

테리언 자작은 또 그 무뚝뚝한 음성으로 아무렇지 않게 동화 속 내용을 언급했다. 에녹은 그 부조화를 빤히 보다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자네 레이디에게 줄 점수는 다 벌어 놨고?”

“이제 갈 겁니다.”

“내가 오래 잡아 두었군.”

“잘 아시는군요, 그럼 이만.”

테리언 자작은 가볍게 예를 취해 인사한 후 바람처럼 사라졌다. 마법사도 사라지자, 에녹은 홀로 남아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럼 나도 가 봐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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