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말도 안 돼요……! 분명히 제가 먼저!”
흥분하여 벌떡 일어나려는 내 어깨를 에녹이 부드럽게 잡아 진정시키며 앉혀 주었다. 나는 눈을 크게 부릅뜬 채로 그를 보았다.
“그 자리에는 전하께서도 계셨습니다. 제 증인이 되어 주지 않으실 건가요?”
“당연히 나는 본 대로 말할 겁니다. 하지만 내 말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마법석 광산을 발견했다는 사람이 둘 나타난다면, 어느 쪽이 먼저인가를 판별해야겠지요.”
그의 말에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눈을 깜빡거렸다.
“방법이 있는 건가요?”
“지금 본부 쪽에는…… 백작이 죽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아직 그리 많은 수가 아는 건 아닙니다만, 곧 다들 그렇게 알게 될 겁니다.”
그의 말을 듣고 나는 잠시 생각해 봤다.
아마 에녹이 이렇게 하는 이유가 있겠지. 나는 내가 추측하고 있는 것들을 하나씩 질문했다.
“그렇다면 일부러 제가 여기 살아 있다는 걸 숨기시는 거죠?”
“그렇습니다.”
“마법석 동굴을 발견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우연히 발견했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는 거예요?”
황태자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의 진중한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바라보며,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에녹은 그런 내 입술을 잠시 바라보는 듯하다 시선을 피했다. 고개를 돌리는 그의 귓바퀴가 조금 붉었다. 왜 그러는 거지?
“그럼 언제쯤 밝히게 되나요?”
“오늘 저녁 본격적인 소탕 작전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내일 점수 집계가 끝나고 황제 폐하께서 도착하시면, 백작을 모시러 오겠습니다.”
“아, 소탕 작전…… 오늘 밤이 본격적인 사냥 대회라고 할 수 있겠네요.”
에녹은 내 말에 대답은 않고, 나를 빤히 보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미안합니다.”
무엇을 사과하는지 몰라 바라보다, 곧 그게 사냥 대회 점수 이야기라는 걸 알았다. 이번에는 미안하다는 건, 그럼 다음에는?
그나저나 이런 데 나가는 기사에게 레이디가 무운을 빌며 뭔가 준다는 걸 읽은 것 같은데, 내가 가진 게 뭐가 있지?
나는 목 아래를 더듬거렸다. 그러다 펜던트 목걸이를 그 동굴에서 잃어버린 게 생각이 났다.
아까워라. 나는 결국 아무것도 주지 못한 채 입술을 다물고 고개만 끄덕였다. 나는 그를 이해한다는 뜻이었는데, 그는 큰 오해를 하는 것 같았다.
그는 한순간 당황한 듯하더니, 오히려 아까보다 개운해진 얼굴로 대답했다.
“너무 내 입장에서만 생각했군요. 알겠습니다. 뜻이 그러하시다면.”
“네?”
무슨 말인지 몰라 입술만 달싹거리자, 다시 그가 내 입술을 바라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만 가 보겠습니다, 백작.”
어쩐지 뭔가 참는 것처럼, 그는 이를 가는 소리와 함께 작별 인사를 고했다.
“네, 기다릴게요.”
그는 일어나지 말라는 듯 나를 향해 손바닥을 내보였다. 그리고 갑자기 고개를 휙 돌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침착해 보이면서도 어딘가 허둥지둥한 모습이 그답지 않아 보였다.
“앗, 전하.”
“그래.”
막 들어오려던 리아와 정면으로 마주쳤는지, 리아가 인사를 건네기가 무섭게 그는 막사 밖으로 나가 버렸다.
“전하께서 어디 아프신 걸까요?”
리아는 뒤를 한 번 돌아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가왔다. 리아의 질문에 나는 되물었다.
“왜?”
“얼굴이 막 벌겋게 달아올라서는 나가셨어요.”
“응? 정말?”
“근데 어제 절 데리러 오실 때도 그러시더니…….”
에녹이 앉아 있던 자리에 리아가 다시 앉았다.
“어제도 그랬다고?”
“네, 막 얼굴이 벌게지셔서는, 뛰어와서 절 급하게 찾으시고…….”
왜 그랬을까? 당사자가 없으니 물을 수도 없고.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려다 문득 내가 입고 있는 옷을 살펴보았다.
소매가 넓고 긴 게 아무래도 내 옷은 아니고, 남자 옷 같은데. 혹시나 싶은 마음에 리아에게 물었다.
“혹시 리아, 네가 내 옷을 갈아입혔니? 이 옷은 누구 거야?”
“네? 아뇨? 제가 왔을 땐 이미 다 갈아입고 주무시고 계셨는데요. 마님께서 혼자 갈아입고 주무신 거 아니세요?”
리아와 나는 동시에 눈을 마주쳤고, 나는 에녹이 그랬던 것처럼 얼굴이 새빨개졌다. 설마, 그럼…… 에녹이 직접?
둘 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바는 같았으나 차마 뱉진 않았다. 리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주어서 나는 참 고마웠다. 나는 허둥지둥하며 달아오른 두 뺨을 손으로 가리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나, 나는 좀 더 자야겠어.”
“그, 그……러세요, 마님.”
덩달아 리아도 얼굴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쟤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나는 표정 관리가 안 되는 것 같아, 그녀가 보이지 않는 방향으로 돌아누웠다.
그래, 어제 옷이 젖어 있었고, 젖은 그대로 눕힐 순 없으니까 갈아입혔겠지만…… 그랬겠지만.
생각할수록 민망하여, 나는 홀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그렇게 이불을 덮고 나니 느낄 수 있었다. 확실히 옷에서 에녹의 체향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홀로 민망해하며 옷에 코를 킁킁거리다, 리아가 식사를 챙겨 주러 올 때까지 다시 잠이 들고 말았다.
***
해가 이제 막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산 중턱에 있는 넓은 평원 위, 본격적인 사냥 대회가 이제 막 시작될 참이었다.
서로 힘을 북돋아도 모자랄 판이었지만, 어쩐지 다들 침울한 기색이었다.
한쪽에서는 향이 피어오르고, 국화꽃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에린의 목걸이와 함께 옷가지들을 모아 태우고 있었다.
지나가는 이들은 짧게 묵념하며 흘긋 그 앞에 선 루퍼트의 눈치를 보았다. 옆에 있던 클로에 역시 눈물을 닦아내며 루퍼트를 바라보았다.
“……루퍼트.”
루퍼트는 아무 말 없이 주먹을 꽉 쥔 채 서 있었다.
이 사냥 대회는 사람이 중간에 죽었다 하여 멈추진 않았다. 원래 이 행사에서 사망자가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에, 장례 대신 대회가 끝난 후 일괄적으로 위령제를 지내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다만 에린이 고위 여성 귀족인 데다, 안타까운 죽음이라 여겨 작게 애도의 공간을 마련해 준 게 그나마의 배려였다.
루퍼트에게는 그 또한 안타까운 일이었다.
“……가엾은 사람, 이렇게 마음이 따뜻한 당신인데 얼마나 슬프겠어요.”
클로에가 루퍼트를 등 뒤에서 살포시 감싸 안았다.
“불안했어요, 당신이 가 버린 동안. 내게서 멀어질까 봐…… 하지만 이런 결과를 바란 건 정말 아니었어요.”
가만히 있던 루퍼트는 그녀의 손목 위를 쓰다듬다 팔을 풀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래도 내가 있잖아요, 루퍼트. 기운을 내요.”
그녀의 말에 루퍼트는 힘없이 대답했다.
“그래, 그럴게. 걱정해 줘서 고마워.”
클로에는 안쓰러운 듯 그를 바라보며 루퍼트의 얼굴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이번엔 무리하지 말아요, 난 괜찮으니까.”
그러자 루퍼트가 씁쓸한 듯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힘들긴 하지만 그 일과는 무관하니까.”
“정말…… 괜찮겠어요?”
조심스럽게 살피는 기색에 루퍼트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클로에는 머뭇거리며 그의 눈치를 살피다 결국 입을 열었다.
“이런 와중에 이러면 안 된다는 거 알지만…… 저에게 점수를 주세요.”
루퍼트는 그녀의 오렌지빛 눈동자를 찬찬히 들여다봤다. 그녀의 예쁜 눈동자에서는 어떠한 악의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저도 당신께 줄 게 있으니까요.”
어차피 에린도 없는 지금, 클로에에게 점수를 줄 생각이었기 때문에 루퍼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았어, 기다리고 있어.”
그녀를 안으려던 루퍼트의 팔이 움찔하며 허공에서 멈췄다. 에린의 넋을 기리는 향이 아직 채 절반도 타지 않은 것을 봤기 때문이었다.
이런 태도는 클로에에게도 상처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마지막 에린의 모습은 잘 떨쳐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클로에에게 가진 마음과는 별개로, 이 앞에서만큼은 이러고 싶지 않았다.
대신 가볍게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고는, 작별 인사를 했다.
그리고 조금 착잡한 마음으로 다시 본부로 돌아갔다.
루퍼트는 그 후,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장비를 점검하고 검을 닦아냈다. 어젯밤 치열하게 몬스터와 싸웠던 흔적이 아직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 덕지덕지 묻은 피를 닦아내다가도, 한 번씩 멍하니 가만히 앉아 있기 일쑤였다.
다른 사람들도 루퍼트의 눈치를 보는지 다른 때보다는 조금 더 조용히 자신의 장비를 챙겼다.
황실 기사단 소속의 누군가 막사로 뛰어 들어와 큰 소리로 외쳤다.
“자, 다들 모이세요! 황태자 전하의 연설이 있을 예정입니다.”
막사들이 둥글게 늘어선 한가운데에는 단상이 있었고, 단정하게 정복을 차려입은 황태자 에녹이 그곳에 올랐다.
아래에는 루퍼트를 비롯해 이번 대회에 참가하는 전사들이 모여 그를 올려다보았다. 브리먼 황자 또한 아래에 있었다.
에녹은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다 큰 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군들은 들으시오.”
에녹은 앞에서 연설하며 오늘 대회의 의의를 설명해 주고, 참가하는 전사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에린이 죽어 버린 다음 날이었지만, 하늘은 맑았고 그 아래 위풍당당한 에녹의 모습은 여전히 빛나 보였다. 그것이 루퍼트에게는 한스러웠다.
“빌어먹을.”
루퍼트는 남들이 듣지 못하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도 분명 지금쯤 에린의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태연할 수 있단 말인가.
특별한 사이라고 생각한 것은 자신의 오해라 하더라도, 에녹과 에린 사이에 나름 친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녀의 죽음이 자신에게는 이렇게나 힘든데, 에녹에게는 아무 영향도 끼치지 않은 것처럼 멀쩡하기만 했다.
“모두 행운을 빌겠다. 그럼, 출발한다.”
에녹의 마지막 말이 끝나고 뿔나팔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며 긴 핏빛 물결을 만들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