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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36)화 (36/129)

36화

“하아, 하아…….”

루퍼트는 이 시간까지도 홀로 산속을 헤매고 있었다. 이제 곧 해가 밝아 올 무렵이었다.

그는 밤새도록 에린을 찾아 헤맸지만, 결국 오늘은 단념하고 내려가기로 했다.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으나, 자신 혼자만으로는 역부족이라는 걸 깨달았다.

온몸에 땀이 비 오듯이 쏟아졌다.

‘도움을 구해야겠어.’

찾는 내내 에린의 떨어질 때의 그 눈빛, 그 원망스러운 눈빛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 순간 클로에를 구한 건 정말 순간적인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됐던 거였다.

‘그 사람이 낭떠러지에 더 가까이 있었는데.’

누가 더 소중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더 위험한 사람을 구했어야 하는 거였다.

에린에 대한 최근 자신의 감정을 차치하고서라도, 떨어지는 사람과 눈을 마주친 건 그에게 끝없는 죄책감을 가져다주었다.

그렇게 거의 다 내려오던 차에, 익숙한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렸다. 부스럭거리던 어두운 수풀 저편에서 클로에의 목소리가 루퍼트를 불렀다.

“루퍼트……!”

루퍼트는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여기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사람의 목소리였다.

“클로에, 어떻게 여기에 있어?”

“걱정이 돼서 누워 있을 수만은 없었어요. 당신도 나가서 한참 동안 오지 않고, 또 부인께서도…….”

“하지만, 여기까지 혼자 올라왔다는 거야?”

“아닐세. 나와 내 기사들이 도와 드렸네.”

루퍼트는 클로에의 뒤에서 저벅저벅 걸어오는 남자를 보며 가볍게 묵례를 했다.

“브리먼 황자 전하 아니십니까. 어떻게 이 산중에 계시는지. 여기는 위험 구역입니다.”

“내가 찾아보고 알려 줄 테니 막사에 계시라고 했지만, 영애께서 얼마나 걱정하시던지. 할 수 없이 내가 함께 따라나섰네.”

“하지만…….”

루퍼트가 뭔가 석연치 않은 듯 중얼거렸지만, 클로에가 급하게 자신의 품 안에서 뭔가를 꺼내 보여 주었다.

“루퍼트, 내가 어떻게 왔냐는 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이걸 봐요.”

“이건?”

루퍼트는 자신의 눈앞에서 흔들리는 목걸이와 펜던트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육각형 별 모양 가운데 반짝이는 보석이 박혀 있었다.

바로 에린이 차고 있던 목걸이였다.

“어디서 난 거야?”

루퍼트는 눈을 크게 뜨며 클로에를 바라보았다. 클로에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흐린 얼굴로 말했다.

“……찾다 보니 어떤 동굴이 있어서 들어가 봤는데, 거기에 이런 것이…….”

“동굴? 동굴이라고?”

“마물의 사체도 함께 있었네. 하, 이 제국에 어떻게 그런 게 돌아다니고 있는 건지. 다행히 죽어있었네만.”

루퍼트는 마물이란 말에 표정이 굳어졌다. 마물이라는 건 절대로 혼자 돌아다닐 수 없는 생명체였다. 게다가 마기가 없는 곳에서는 금방 죽어 버렸다.

“거기가 마법석 동굴이었어요, 루퍼트. 아마도 부인께서는…… 마물에게…….”

“그만, 그만! 그럴 리가 없어.”

울먹이며 말하는 클로에에게 루퍼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가 괴로움에 머리를 쥐어뜯는 동안에, 브리먼 황자와 클로에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

“……루퍼트, 루퍼트.”

클로에가 더 가련한 목소리로 그의 팔을 다독거리며 매달렸다.

“아냐, 아니라고…… 어떻게 그런……! 마물이 어떻게 거기 있을 수 있다는 거야. 아니, 믿을 수 없어.”

루퍼트는 목걸이를 손에 쥔 채로 다시 산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의 뒤로 클로에가 소리치며 그를 불렀다.

“루퍼트……!”

뒤에서 브리먼이 냉소적인 목소리로 비아냥거렸다.

“그 여자가 죽지 않았다면 그쪽으로 넘어갈 뻔했구나.”

“그럴 리가 없어요.”

“그리 자신만만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저렇게 뛰어 올라가는 거 보면.”

“……그는 의로운 사람이니까요.”

그렇게 중얼거리며 클로에는 루퍼트가 올라간 산 쪽을 바라보았다. 브리먼 황자도 함께 그쪽을 바라보다, 관심 없다는 듯 먼저 발길을 돌렸다.

루퍼트는 결국 바위산에 있는 동굴을 발견했다. 몇 번을 지나쳤지만, 오거 시체만 잔뜩 쌓여 있어 에린이 있을 리 없다며 피한 곳이었다.

“아냐…….”

루퍼트는 입으로 계속 부정하며 터덜터덜 동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반짝이는 마법석들을 보며 감탄하기도 전에, 그는 깊숙한 곳에 자리한 마물의 사체를 발견하고 말았다.

그곳으로 뛰어가 루퍼트는 몇 번이고 확인했다.

벌써부터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사체를 손으로 들춰 보았다.

“마물이, 어째서…… 여기에?”

마물이 여기 있다는 것도 이상하거니와, 에린이 이곳에서 죽었다는 것까지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손에 들린 목걸이는 분명 에린의 것이 분명했다. 루퍼트는 허탈하게 자리에 주저앉았다.

마물은 한 번에 사람을 삼킨 후에 녹여 버린다.

“그렇게 미워한 건 아니었어, 아니었다고.”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른 채, 루퍼트는 그 자리에서 중얼거렸다.

정말 미워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슬퍼 통곡하기에는 그녀와 함께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먹먹하던 가슴이 점점 죄여 오듯 아팠다. 루퍼트는 뒤늦게 밀려오는 상실감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눈빛, 나를 늘 따라오던 그 눈빛을 이제 못 보겠구나, 영원히.’

부담스럽고, 싫다고만 생각했던 눈길이었다.

에린 스필렛은 자신에게 그렇게 거추장스러운 존재였다.

하지만 또한 유일한 것이었다.

황태자와 함께 섰을 때, 모든 이들이 그를 바라봤을 때, 유일하게 내내 자신을 봐 주던 시선은 에린, 하나뿐이었다.

그녀의 시선을 외면했던 모든 순간이 떠올랐다. 그리고 결혼 후, 자신 안에서 변해 버린 그녀에 대한 감정을 깨닫기도 전에 이렇게 끝나고야 말았다.

루퍼트는 팔을 바닥에 댄 채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래도 답답함은 가시지 않았다. 눈물도 나지 않아 더더욱 답답했다.

***

깨어나 보니 이번엔 리아가 내 곁에 앉아 졸고 있었다.

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햇빛과 사람들의 소리를 들어 보니 이미 한낮인 것 같았다.

팔다리를 들썩이기도 하고, 손과 발도 오므렸다 폈다를 반복해 봤다.

생각보다 어디가 아프지도 않았고, 몸도 뽀송뽀송했다. 자는 동안 아마 갈아입혀 준 것 같았다.

“리아.”

“아…… 응.”

“리아, 일어나 봐.”

“응…… 아, 마님? 깨어나셨어요?”

나는 상체를 일으켜 앉아 어깨와 목을 한 번씩 돌려 보며 말했다.

“응, 난 이제 괜찮아. 지금이 몇 시니? 여기는 어디고?”

여전히 내 막사가 아닌, 어젯밤 잠든 곳이라는 걸 깨닫고 묻자 리아 역시 나처럼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지금 점심 무렵이에요. 여기는 아마도 황태자 전하께서 따로 머무는 캠프인 것 같은데…… 전하께서 어제 새벽에 절 이리로 데리고 오셨어요. 마님을 돌봐 달라고요.”

안에서는 봐도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잠깐…… 날 좀 부축해 줘.”

리아에게 도움을 받아, 침대 위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신고 바닥에 섰다. 약간의 어지럼증이 있었지만 괜찮은 것 같았다.

어제의 그 고생을 한 것치곤, 에린의 체력을 생각하면 이 정도면 아주 양호했다.

“나가시게요? 여긴 정말 산중이에요. 아무것도 없어요. 꽁꽁 감춰 놔서 오면서 봤을 땐 여기 막사가 있는 줄도 몰랐다니까요.”

“그래도 나가 봐야지, 어딘지도 모르는데 계속 누워만 있을 수는 없잖아.”

그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집을 피웠다. 리아는 난처한 듯 나를 부축하며 말했다.

“본부 쪽 캠프에서는 이제 막 사람들이 마님이 없어졌다는 걸 알았어요. 다들 찾아다니고 난리였는데…….”

“날 찾았다는 걸 아직 다들 몰라?”

“제가 올 때만 해도요.”

아직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잘 되지 않았다. 때마침 휘장이 살짝 들려 올라갔다.

“백작,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전하, 들어오세요.”

안 그래도 찾아 나서려 했는데 와 줘서 잘됐다 싶었다.

리아는 나를 다시 침대에 앉힌 후, 눈치껏 밖으로 나가 주었다. 에녹은 내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몸은 좀 어떻습니까.”

“많이 좋아졌어요. 솔직히 거의 평소와 비슷하다고 할 만큼. 어떻게 이렇게 하루 만에 좋아질 수가 있죠?”

“안토니아 신관은 제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치유력을 갖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백작께서 많이 다친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 아, 그렇지. 제가 문제가 아니잖아요.”

에녹은 단추를 목 끝까지 단정하게 채운 정복을 입고 있었다.

“전하는 괜찮으신 거예요? 상처가 깊었는데.”

나도 모르게 그 단추에 손을 뻗어 깃을 잡았다. 그러자 그가 웃으며 내 손을 살며시 잡아 내렸다.

“괜찮습니다, 다 나았습니다.”

“아…… 그래요.”

나는 그제야 또 내가 에녹을 마구 벗기려고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손을 거뒀다. 동굴에서야 워낙 급박했다 치더라도,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정말 다 나은 거겠지?

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보다, 고개를 끄덕이는 에녹에게 결국 수긍했다. 당장 상처를 입은 그날도 아물어 가고 있긴 했으니까.

“해야 할 말이 있어 왔습니다, 백작. 저녁엔 바빠서 기회가 없을 수도 있으니까요.”

“말씀하세요.”

제복을 입었다는 건, 이곳에 황태자보다 높은 신분의 사람이 온다는 걸 뜻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이 제국에 딱 두 사람.

황제와 황후였다.

“황제 폐하께서 급히 이곳으로 납신다고 했습니다.”

“사냥 대회에 보통 참석하시나요?”

“아니요, 보통은 안 하십니다. 황태자와 황자들 선에서만 참가하고, 황궁에 돌아가서 폐하의 치하를 받지요.”

“그럼 왜…….”

“황궁에 보고가 도착했다고 합니다.”

“무슨 보고인가요?”

에녹은 자신의 무릎 위에 놓인 손가락을 까딱까딱 두어 번 움직였다. 나는 답답했지만, 채근하지 않고 기다렸다.

“누군가 마법석 동굴을 발견했다는 보고였습니다.”

“그게…….”

“백작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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