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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35)화 (35/129)

35화

위험한 숲속, 한밤중이었다.

늘 조용하던 위험 지대의 숲속에서는 한 무리가 떠난 이후 또 다른 무리가 헤매는 중이었다.

그들은 다른 이들과 달리 위험한 몬스터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 눈치였다. 애초에 몬스터들은 이들이 나타나기가 무섭게 멀리 도망가 버렸기 때문에 마주치지도 않았다.

“손으로 가리켜라.”

“흣…….”

무리 중에는 파리한 안색의 여자가 검은색 로브를 뒤집어쓴 채 누군가에게 업혀 있었다. 여자가 간신히 손을 들어 방향을 가리키자, 그쪽으로 한 사람이 걸어갔다.

턱수염을 기른 남자는 얼굴에 짜증이 가득했다.

“제대로 가리키지 못해? 쓸모없는 녀석은 내게 필요 없다고 했지.”

“저쪽, 이에요. 분명 저쪽에서…… 끊겨서…….”

“만일 찾지 못한다면 네년을 산 채로 몬스터의 밥으로 먹일 것이다.”

“…….”

“일단 가 봐라.”

남자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그녀를 쳐다보다 결국 명령을 내렸다. 남자의 명령에 그의 수하들이 일제히 여자가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움직였다.

헐떡거리는 그녀를 보는 남자의 시선에는 안쓰러움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남자의 짧은 인내심이 한계를 드러낼 무렵, 여자가 가리킨 방향에서 소리가 났다.

“찾았습니다!”

“오, 찾았군!”

그제야 남자는 히죽 웃으며 그곳을 향해 갔다. 여자를 업은 기사도 함께였다.

하지만 동굴 입구에서 오거들의 시체를 발견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이 덩치들은 왜 여기서 죽어 있지?”

남자의 질문에 부하 중 한 사람이 어영부영 대답했다.

“덩치 큰 몬스터들끼리는 서로 영역 다툼을 하기도 합니다. 서로 싸우다 죽은 게 아니겠습니까.”

“하필 이 앞에서…….”

남자는 혀를 차면서도 더 급한 일이 있어 발길을 재촉했다.

자세히 찾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을 만한 크기의 작은 동굴이었다. 입구는 작았지만, 안으로 들어가니 제법 넓었다.

무엇보다도 은은하게 빛나는 광석이 동굴 벽과 천장에까지 빼곡하게 박혀 있었다.

“오오, 여기구나. 그토록 오랫동안 찾아 헤맸건만 이제야 찾았군.”

남자는 정말 기쁜 듯이 중얼거리며, 빛이 나는 광석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이것들이 전부 마법석이란 말이지. 대단하군, 대단해. 크큭, 바닥에 내려놔라!”

기사는 업고 있던 여자를 거칠게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네가 먼저 들어가거라. 네년이 부른 마물이니 네가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아니냐.”

남자가 여자를 발로 툭툭 차며 말했다.

그러자 여자는 벽을 짚고 간신히 일어나려다 결국 다시 주저앉았다.

“콜록, 콜록.”

여자가 처량한 눈으로 남자를 쳐다봤지만, 남자는 봐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 당장이라도 없애버릴 것 같은 눈빛에 여자는 결국 기어서라도 가야 했다.

남자는 여자와 두 걸음 뒤에서 느리게 따라가면서도 결코 더 가까이 가진 않았다.

무언가 안에 위험한 것이 있다는 듯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벽에 박혀 있는 마법석의 원석을 황홀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여자는 좀 더 어두운 곳까지 기어가 바닥에 쓰러진 진득한 사체를 직접 확인했다. 마물의 사체는 빠른 속도로 썩어 들어가, 원래 무엇이었는지 형체를 거의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역시, 죽었습니다.”

“쯧쯧, 아깝게 됐군. 하지만 마물이 마법석 동굴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로구나.”

마물은 그 자체가 마기를 내뿜기도 했지만, 또한 많은 양의 마기를 필요로 했다. 마계가 아닌 이 세계에서 가장 마기가 많은 곳은 바로 이 마법석 동굴이었다.

따라서 마물을 풀어놓으면 살기 위해 알아서 동굴을 찾아갈 것이라는 게 그녀의 주장이었다.

“……왕이시여, 이제 그만…… 콜록.”

여자가 더는 못 견디겠다는 듯 기침을 하며 무너져 내렸다. 그녀의 안색은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창백했다. 마물을 소환하며 기력을 다 소진했기 때문이었다.

“나약한 녀석.”

여자를 내려다보던 남자는 혀를 차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네년의 일 처리 속도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쨌든 아직까진 쓸모가 있으니 목숨은 붙여 두겠다.”

“……읏, 감사합니다.”

남자는 그녀의 턱을 잡아 위로 올리고는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췄다.

끈적한 입맞춤이 오고 간 뒤엔, 미처 삼키지 못한 어두운 기운이 그들 주위에 스멀스멀 퍼져 있었다.

남자가 허리를 편 후, 여자의 안색은 그 전보다 훨씬 나아져 있었다.

“그 여자, 떨어졌다던 루퍼트의 부인은?”

“이쪽 숲으로 떨어진 이후…….”

여자는 바닥을 손으로 짚었다가 뭔가를 발견하고는 들어서 살펴보았다. 육각형 별 모양의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였다. 자신이 끼고 있는 반지와 같은 모양에 그녀는 루퍼트의 말을 떠올렸다.

여자는 입술 끝을 희미하게 말아 올렸다.

“……이곳에서 마물의 먹이가 된 것 같습니다.”

“저런, 애석하게도. 예쁜 아이였는데.”

남자의 표정은 미묘했다. 좋은 것 같으면서도 아쉬운 듯 턱수염을 만지작거렸다.

“그렇다면 너에게 걸리는 것이 없겠구나.”

“아직 공작이 남아 있습니다.”

“그 일은 천천히, 눈치채지 못하게 진행해라. 어차피 힘 빠진 늙은이니까.”

그 명령을 끝으로 남자는 여자의 손을 잡고 일으키더니, 그 자리에서 작은 폭풍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

‘무서워.’

긴 촉수들이 달려들어 팔다리를 옥죄고, 심장을 갉아먹는 꿈을 꿨다.

마물은 이미 죽어 버렸는데, 나는 아직도 그 마물의 정신 공격이 남긴 후유증에 괴로워했다.

꿈에서 깨어나고 싶어 허우적대다 보니 누군가 손을 잡아 주는 감촉이 느껴졌다. 몸이 더우면서도 추워서 괴로웠다.

“이제 괜찮습니다.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나를 안심시키는 목소리가 곁에서 들렸다.

나는 헐떡거리는 숨을 진정시키며 다시 잠의 늪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깨어났을 땐, 그윽한 약초 냄새가 진동을 했다. 의식은 깨어났지만,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 아직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깨어나면 이 약을 드시라 하십시오.”

“알았네.”

두런두런 뭔가를 심각하게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둘이었는데, 하나는 익숙한 에녹의 목소리였고 또 하나는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그럼 이 브로치는…… 확실히…….”

“……예, 전하. 제가 신전에 가서 의뢰하겠습니다.”

아직도 눈꺼풀이 무거웠다.

곁에서 울리는 에녹의 목소리가 듣기 좋아서 좀 더 자고 싶었다.

동굴 속에서 에녹과 함께 나간 것까지 기억나는데…… 그리고 그가 날 안아 들었고. 어?

나는 갑자기 확 끓어오르는 수치심에 눈을 뜨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내 곁에 앉아 얘기하던 두 사람이 놀란 듯이 쳐다봤다.

“깨어나셨습니까, 백작.”

“아, 전……하.”

역시 에녹이 가까운 곳에 앉아 있었고, 또 다른 사람은 복장을 보니 신관인 것 같았다. 치료를 위해 와 줬던 건가.

“안토니오라고 합니다.”

“에린…… 스필렛입니다.”

나는 ‘클리포드’와 ‘스필렛’ 사이에서 잠시 고민하다 후자를 택했다. 조기 이혼 결심이 굳어졌다는 것과, 에녹이 늘 그렇게 불러 줬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고 보니 이 세계에서는 신관이 의사 노릇도 함께 겸하는 것 같았다. 생명을 살리는 일은 신성한 의무라나 뭐라나.

“아직 약간의 미열과 군데군데 타박상이 있습니다만,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습니다. 이만하길 천만다행입니다.”

그의 설명을 듣고 보니 손목을 포함한 온몸 여기저기에 상처를 치료한 흔적이 보였다. 다친 곳은모두 언덕에서 굴러떨어지며 생긴 상처들이었다.

마물에게도 공격당했었는데, 그에 당한 상처는 하나도 없다는 게 의외였다. 정신 공격만 했던 건가?

그래도 크게 다친 곳이 없다는 말을 듣고 나니 나 역시 안심이 됐다. 앞으로 할 일이 많은데, 아파서 누워 있는 시간이 길다는 건 아까운 일이기 때문이다.

에녹이 내게 잔 하나를 들려 주었다. 아까 잠결에 냄새를 맡았던 약초물이 담겨 있었다. 쓴 건 싫은데…… 슬쩍 눈치를 보니 둘 다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결국 남기지도 못하고 다 마신 후에 다시 컵을 건네주었다.

“고맙습니다, 신관님.”

“별말씀을.”

감사의 인사를 한 후에도 그는 어쩐지 나를 관찰하듯이 바라보았다. 의아한 눈으로 마주 보자 그는 흐뭇하게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관님?”

“자세히 보지 않아서 확답은 못 드리겠지만, 자매님께서는 다른 사람과는 조금 다른 기운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중에 혹 궁금하시거든 신전에 한번 들러 주십시오.”

“…….”

나는 애써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혹 그는 내가 다른 세계의 영혼이라는 걸 알아본 게 아닐까? 내가 이 세계에서 다른 건 그것 하나뿐이니까.

안토니오 신관은 다시 한번 자애로운 미소를 지어 보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하,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수고했네.”

에녹은 앉은 채로 인사를 받은 후 곧장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더니 내 이마로 손을 갖다 대려 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순간 몸을 뒤로 뺐다. 그는 당황한 듯 허공에서 손을 거뒀고, 나도 당황하여 눈을 둘 곳을 찾지 못했다.

“아…….”

열을 재 보려고 한 걸 텐데, ‘그에게 안긴 채 쿨쿨 잤다’는 그 부끄러움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해서 혼자 민감하게 반응하고 말았다.

그가 다시 한번 눈으로 나에게 동의를 구한 후 이마를 짚어 주었다. 시원한 감촉이 이마에 닿자, 내가 정말 열이 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제가, 잠들었나 봐요…….”

“예, 조금 더 주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직 새벽입니다.”

“그렇군요.”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이곳이 내가 있던 막사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눈으로 어디냐는 듯 물으니 그가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일단 급한 대로 다른 곳으로 모셨습니다.”

“왜죠? 본부까지 가기엔 멀어서 그런가요?”

“그런 이유도 있습니다.”

‘그런 이유도’라는 건, 다른 이유도 있다는 뜻이었다. 내가 물끄러미 바라봤지만, 에녹은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다시 자리에 눕히려 했다.

“지금은 일단 조금 쉬는 게 좋겠습니다. 깨어나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궁금하긴 했지만, 그의 말마따나 정말 더 이상 대화할 수 없을 만큼 졸리긴 했다.

에녹은 목까지 이불을 끌어다 덮어 주었고, 나는그가 곁에 있는 기척을 느끼며 다시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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