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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34)화 (34/129)

34화

“왜…… 그렇게 보세요?”

나는 그의 시선에 민망함을 느꼈다. 그러자 에녹은 다시 브로치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 브로치는 내가 보관해도 되겠습니까? 좀 알아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 그러세요.”

그런 후에도 에녹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지만, 결국 말해 주진 않았다. 나는 조금 궁금하긴 했지만 묻지 않았다. 필요한 이야기라면 그가 어련히 알아서 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아…….”

정말 궁금해서 물은 것이었는데, 에녹은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일단, 누군가가 당신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려 줘서 정신없이 달려왔고…….”

“누구요? 루퍼트와 클로에인가요?”

내가 떨어질 당시 있었던 사람은 루퍼트와 클로에였다. 혹시 그들일까?

“아닙니다, 젊은 기사였습니다. 내가 왔을 때 그들은 이미 없었습니다.”

그렇구나, 그들은 가 버렸구나. 내가 죽었을 수도 있는데, 루퍼트는 정말 나 에린을 싫어하는구나.

그에게 기대하는 바가 없어 상처받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번 일은 목숨이 달린 일이라 그런지 좀 충격이 컸다.

“그 팔찌……로 찾았습니다.”

“팔찌요?”

에녹은 왼쪽 팔을 들어 자신의 팔찌를 보여 주었다. 아직까지는 별다를 게 없어 보였다.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의 팔찌에 박힌 마법석을 문지르자 마법석이 갑자기 빠르게 점멸하며 웅웅, 소리를 냈다.

“마력을 주입하고 가까이 오면 이렇게 표시를 냅니다. 이것으로…… 흠, 그러니까, 매번 백작을 이렇게 찾아다닌 건 아니었고, 만약을 위해…….”

“고마워요.”

에녹이 어렵게 변명을 이어가다 입을 다물었다. 그는 내가 자신을 감시하거나 미행한다 생각하고 변명했을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건 그로 인해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고마워요, 그게 아니었으면 난…….”

따뜻한 것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긴장이 풀리자 서러움과 안도감이 함께 밀려왔다.

내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자, 에녹은 쉽사리 말문을 열지 못하면서도 조금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그의 손이 머뭇거리다 내 등을 토닥거렸다.

그렇게 한번 울고 나니 정신이 맑아졌다. 그는 내가 진정하는 걸 확인하고는 일어나 피 묻은 상의를 대충 걸치고 혼자 밖으로 나갔다.

나가면서 뭐라고 설명은 했는데, 대충 들어 보니 구조 요청을 한다는 것 같았다. 나는 그동안 이 동굴 안을 살피며 생각을 정리했다. 은은하게 빛을 내는 보석들을 보며 나는 황홀함을 느꼈다. 그건 단순히 아름다운 것을 보고 느끼는 감상은 아니었다.

원래는 클로에가 발견했어야 할 이 동굴은 마법석 동굴이었다. 지금 보이는 것만 해도 상당한 양이었지만, 땅속에 묻힌 매장량도 어마어마했다.

모르긴 몰라도 천문학적인 금액이었을 것이다. 클로에는 이것을 아무 대가 없이 루퍼트에게 넘겨주었지.

물론 정말로 대가가 없는 건 아니었고, 그녀의 평판과 위치가 이전과 확연히 달라지게 됐지만 어쨌든 당시에는 그랬다.

하지만 나는 누구에게도 넘겨줄 마음이 없었다. 심지어는 지금 나에게 다가오는 내 목숨의 은인인 에녹에게조차도 말이다.

뭐…… 그가 정 필요하다면 조금은, 아니 조금 많이, 원석을 줄 마음은 있었지만, 그래도 소유권은 안 된다.

그래서 에녹에게 지금 그 이야기를 꺼낼 참이었다. 너무 속물적이고 욕심 많아 보일까 싶어,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하나 잠시 망설였다.

에녹은 들어와서 나를 지나쳐 가더니, 동굴 깊은 곳에 죽어 있는 마물 근처로 가서 뭔가를 툭 잘라냈다. 나는 징그럽게 느껴져서 일부러 그곳은 보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나에게 다가온 에녹이 먼저 말을 꺼냈다.

“녀석의 이름은 다리온이라는 촉수형 마물입니다. 일단 알아 두십시오. 그리고 황제 폐하께는 내가 아뢰겠습니다.”

“뭘 말이에요?”

“백작이 이곳을 찾았다는 이야기를요. 그전까지는 누구에게도 말씀하셔서는 안 됩니다.”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먼저 결론지어 버렸다.

“그래서 만나기로 한 장소도 여기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지정했습니다. 일단 나가면서 이야기하죠.”

에녹은 앉아 있던 나에게 잡으라며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고 일어서려는데 다리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 왜, 잠시만요, 아, 왜 이러지?”

오래 쪼그리고 앉아 있어 쥐가 났나 했지만, 아예 힘 자체가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게 끙끙거리던 나를 보고 있던 에녹이 손을 놓더니 내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

“전하, 안 돼요, 다쳤잖아요!”

“아까 보지 못하셨습니까, 낫고 있는 것을요.”

“하지만…….”

“더 지체하면 엇갈릴 겁니다.”

부끄러워하는 나와 달리, 에녹의 태도는 담백하고 또 단호했다. 확실히 내 민망함 때문에 혼자 가겠다고 고집을 피우면 민폐겠지.

그래도 정말로 민망하고 쑥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기 위해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왠지 그가 웃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차마 보고 확인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들면 이 사람과 너무 얼굴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사실 아까 비에 맞아 옷이 다 젖어 있었는데, 그와 몸이 닿아 있는 곳들은 유난히 뜨거웠다.

그리고 보기보다 탄탄하고, 힘도 세고, 가슴도 넓고…… 아, 내가 무슨 생각을. 몸이 따끈따끈한게 그의 체온이 높은 건지, 내 오염된 머릿속이 문제인 건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아무튼 따뜻한 느낌과 안정적인 흔들림에 피로가 몰려왔다. 안 되는데, 이렇게 안겨서 쿨쿨 자 버리면, 정말 면목이 없는데.

“그래도…… 이제 이혼할 수 있으니까…….”

에녹의 묵직한 체향이 짙게 풍겨 와 눈을 감겨 주었다. 그리고 이후의 기억은 끊겨 버렸다.

***

밤늦은 시각, 북쪽 숲 금지 구역에는 검은 복면을 쓴 사람들이 원을 그리고 서서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시야가 닿지 않는 어두운 곳에서 미약한 소리가 날 때마다 그들은 검을 들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 원 가운데에는 그림자 기사단 소속 마법사가 책을 참고하여 바닥에 뭔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었다. 한 번씩 에녹이 답답한 듯 그를 볼 때마다, 마법사는 비 오듯이 땀방울을 흘려 댔다.

이미 트롤 떼를 한 번 만났고, 이후 오거와도 만나 드잡이를 한 이후였다. 더 이상 위험지대를 걸어서 이동하는 건 무리라고 판단하여, 이렇게 이동용 마법진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걸 그린다고 해서 슥슥 쉽게 그릴 수 있는 건 아니었고, 정교하고 복잡한 모양을 커다랗게 그려야 하기 때문에 생각보다 시간이 소요됐다.

마법사는 황태자가 시선을 보낼 때마다 움찔 떨었지만, 그의 생각과 달리 에녹이 답답하다 여기는 건 자기 자신이었다.

‘겨우 그 정도 마법을 썼다고 이렇게 맥을 못 추다니.’

그러나 그렇다고 하기에는, 이미 몬스터 떼를 만났을 때 그의 마법이 상당히 유용했다. 실외라 따로 마력 조절을 하지 않고 퍼부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동 마법은 마력의 양보다 조절이 중요했다. 평소라면 괜찮겠지만, 이미 마력이 많이 흐트러진 상태에서 에린까지 함께 간다는 건 위험했다.

에녹은 에린이 조금도 위험해지는 걸 원치 않았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마음이 급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전에 그렇게 마법 펑펑 써 대면서 돌아다니지 말걸 그랬어.”

“제가 누누이 말씀 드렸습니다만, 전하께서 듣지 않으셨습니다.”

투덜거리는 에녹에게 테리언 자작은 그 특유의 무뚝뚝한 말투로 대꾸했다.

“그런데 그분은 어디로 모실 생각이십니까? 역시 본부로?”

“아니, 일단 비밀 캠프 쪽으로 가겠다. 뭔가 이상해. 마물이 혼자 저렇게 돌아다닐 리가 없잖아?”

“누군가 소환한 것이겠죠. 다리온은 하급 마물이지만 소환자는 타격이 좀 있을 텐데요.”

에녹은 마법진이 완성되길 기다리며, 나무둥치 위에 앉아 있었다. 품 안에는 아직 에린이 기대 잠들어 있었다.

안겨 있는 에린의 몸이 뜨거웠다. 담요를 둘렀음에도 그녀는 덜덜 떨고 있었다. 오늘 그녀가 겪은 일들을 떠올려 볼 때 무리도 아니었지만, 에녹의 속은 계속해서 타들어 갔다.

마법사가 이제 막 마법진을 완성한 참이었다. 그가 황태자를 보고 머리를 조아리며 주문을 외우려 하자, 에녹이 그를 말렸다.

“됐다, 내가 하지. 좌표만 불러라.”

저 마법사가 이 마법진을 발동시키려면 또 마력을 끌어모으기 위해 기나긴 주문을 외워야 한다. 여기서 더 기다리기엔 인내심이 바닥이 나 버렸다.

자신의 불안정한 마력은 마법진이 상쇄시켜 줄 것이다. 마법사가 알려 주는 좌표를 기억해 두고는 에녹이 직접 시동어를 외쳤다.

“아페리 이아누암.”

마법진에 빛이 번쩍하더니, 순간적으로 강한 회오리가 몰아쳤다.

“에린……!”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에녹은 자신도 모르게 에린을 안은 팔에 힘을 줬다. 확인해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에린에게는 언급하지 않았을 뿐, 그자가 정말 그렇게 모른 척 가 버렸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에녹은 자신이 한발이라도 늦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위기감을 먼저 느꼈다.

자신이 아닌 루퍼트가 먼저 에린을 발견했다면, 에린은 감동하여 이혼하기로 했던 결심을 돌릴지도 몰랐다. 에녹은 자신의 곁에 서 있는 수족들에게 차갑게 읊조렸다.

“너희도 흔적을 지우고 흩어져라. 오늘 일은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마라.”

곧 빛과 바람이 사그라들자, 그 자리에 있던 에녹과 에린도 사라지고 없었다.

에녹의 명령에 따라 그들은 마법진을 발로 짓이겨 지운 후에 역시나 사라져 버렸다. 모두가 사라지고 난 자리에 루퍼트가 도착했다.

“하아, 하아, 누군가 분명 있었던 거 같은데.”

루퍼트는 신경질적으로 땅을 한번 차고는 다시 달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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