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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33)화 (33/129)

33화

처음 눈을 떴을 땐 새카만 어둠 속에 있었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고, 잠시 후 눈을 떴을 땐 화려한 빛의 향연에 눈살을 찌푸려야 했다.

무도회가 펼쳐지는 파티장 구석에서 홀로 낡은 드레스를 입은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빛이 반짝이는 공간, 중앙에는 클로에가 있었고 오른쪽에는 루퍼트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있었다.

거기까지는 익숙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왼편에서 클로에의 손을 잡고 있는 사람은 바로 에녹이었다.

“……왜?”

에녹이 왜 클로에의 손을 잡고 있는 거지?

그는 아주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클로에를 바라보며, 춤을 신청했다.

클로에는 루퍼트에게 눈으로 허락을 구하고는 에녹에게로 갔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사랑스러웠다.

그 눈빛에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에녹이 대체 왜 저기 있는 거지? 아니, 아니야. 에녹은 원래 서브 남주였잖아. 결국 원작대로 클로에를 좋아하게 된 건가? 하지만…… 언제부터?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고, 홀 중앙의 에녹과 클로에는 서로를 마주 보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들을 뒤로한 채 루퍼트가 내게 다가왔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 짓고 있던 그 냉소적인 표정을 오랜만에 보여 주었다.

“에린 스필렛.”

대답을 해야 하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입만 달싹이는 나에게, 루퍼트는 상관없다는 듯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이혼 후에도 또 이렇게 만나다니 유감이야. 빚은 잘 해결한 건가?”

이혼했다고? 빚? 무슨 말이야? 여전히 나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 와중에 루퍼트는 무도회장의 측문 쪽을 보며 빙긋 웃었다.

“잘 해결이 안 된 것 같군. 봐, 널 잡으러 왔어. 에린 스필렛.”

그는 내 귓가에 음산하게 속삭인 후 다시 몸을 돌려 중앙을 향해 다가갔다. 클로에와 춤을 추던 에녹은 다시 루퍼트에게 그녀의 손을 넘겨주었다.

잠시 에녹의 눈이 나를 향했다.

“백작, 이게 당신의 운명입니다.”

멀리서 입 모양만 보았음에도 나는 그가 하는 말을 또렷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곧 험악하게 생긴 어떤 사내들에 의해 무도회장에서 끌려 나갔다. 깊은 무력감이 또다시 나를 지배했다. 익숙하고 또 두려웠다.

강제로 마차에 태워지자마자, 또다시 시야가 어두워졌다.

정신이 아득히 멀어졌다 다시 돌아왔다.

“여긴…….”

목소리가 다시 돌아왔다. 그런데 내가 있는 곳이묘하게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여기는 내 방이었다.

그러니까 내 방, 에린 스필렛의 방이 아닌 이전의 생애에서 살았던 내 방이었다.

방 한구석에는 반쯤 마신 소주병과 약봉지가 굴러다녔고, 침대 위에는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 내가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저게 나라면, 지금 이렇게 선 채로 보고 있는 나는 누구지?

방문이 벌컥 열렸다.

부모님이 깜짝 놀라 침대에 누워 있는 나를 흔들어 깨웠지만, 그녀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죽은 것이다.

그렇다고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 실제로 보니 무섭고 또 슬펐다. 정말 저렇게 죽어 버린 거야? 황당하고 허무하게?

갑자기 차가운 기운이 스멀스멀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추위에 몸이 덜덜 떨렸다.

‘백작……!’

‘에린, 에린 스필렛 백작!’

누군가 애타게 나를 불렀다. 춥고 귀찮고 졸렸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나를 불렀고, 어쩔 수 없이 눈을 떴다.

“아…….”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나는 벌떡 일어났다. 여전히 나는 동굴이었고, 아까 눈이 마주쳤던 새카만 마물과 누군가가 싸우고 있었다.

“백작, 깨어났습니까!”

그 주인공은 바로 에녹이었다. 에녹, 에녹이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

하지만 그는 조금 힘겨워 보였다.

칼로 아무리 베어 내도 마물은 다시 몸을 재생해서 그를 공격했다.

왜 마법을 쓰지 않는 거지? 무슨 문제라도 있나? 어쨌든 그를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조금만 버텨 주세요!”

나는 바로 동굴 밖으로 뛰어나갔다. 나가자마자 보이는 오거들의 시체에 조금 놀랐지만, 속도를 줄이지 않고 맨 처음 죽은 오거의 시체를 찾았다.

거기서 나는 내 단검을 뽑아냈다.

그리고 다시 동굴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전하!”

정말로 에녹이 밀리고 있었다.

그의 칼은 그 사이 두 동강이 나 있었고, 에녹은 땅에 누운 채 마법으로 그를 상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얼핏 봐도 강한 마법은 아니라 거의 타격을 주지 못했다.

마물이 커다란 입을 벌린 채 그를 삼키려 들었다. 내가 직접 뛰어가면 늦을 것 같았다.

“전하! 받아요!”

나는 있는 힘껏 단검을 그의 곁으로 던져 주었다. 다행히 에녹이 들었는지, 옆에 떨어진 단검을 손에 쥐고 단숨에 마물에게 찔러 넣었다.

그 순간, 마물의 소름 끼치는 비명이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다.

마물은 바로 죽지 않고 발악하며 날뛰었다.

저러다가 에녹이 다칠 것 같았다. 나는 그대로 달려가 에녹 위에 엎드려 그를 감싼 채, 펜던트를 눌렀다. 투명한 막이 생성되어 우리를 감싸주었다. 오 분, 제발 오 분 안에는 죽기를.

펜던트를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줄이 툭 끊어져 버렸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놓지 않고 계속 쥐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방어막 위로 마물의 비명과 화풀이는 계속되고 있었다.

“백작.”

내가 그의 위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데, 에녹의 손이 내 등을 토닥거렸다. 그러고는 나머지 한 손을 방어막 밖으로 뻗었다.

에녹이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나직이 주문을 외웠다.

“에스토 글라치에스.”

내 등을 토닥이던 손이 나를 꽉 감싸 안았다. 그가 뭔가 마법을 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주변의 공기가 차가워지는가 싶더니, 시끄럽게 날뛰던 마물이 조용해졌다. 순식간에 고요해진 동굴 속에서, 나는 에녹의 두근대는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서서히 몸을 일으켜서 그와 눈을 마주했다.

마법석이 내뿜는 은은한 빛 아래, 아름다운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꽉 쥐고 있던 손에 힘이 풀리고, 펜던트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조금은 멍한 기분이 되어 그의 눈과 코, 입술까지 뜯어보던 나는 호선을 그리는 그의 입꼬리를 보았다.

“계속 그렇게 계실 겁니까? 그렇다면 나로서는 환영입니다만.”

그의 말에 정신이 돌아오며, 나와 그의 자세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아예 몸으로 그를 깔고 뭉갠 채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

“아, 아니요!”

화들짝 놀라며 옆으로 비켜 앉았다.

“아쉽군요.”

그는 여전히 누운 채로 웃음 띤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빨개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뒤를 돌아보았다.

마물은 그대로 꽁꽁 얼어 있었다. 마물뿐만 아니라 주위가 온통 살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걸 보니 뭔가 생각이 났다.

“아…… 혹시 일부러 마법을 쓰지 않으신 건가요?”

“저런 놈을 잡으려면 강력한 마법을 써야 하죠. 하지만 이렇게 좁은 곳에서 그런 마법을, 나나 백작까지 다칠 수도 있습니다. 평소 같으면 범위를 조절했겠지만…….”

조절했겠지만? 에녹의 말은 거기서 멈췄다. 그는 곤란하다는 듯이 웃으면서도 일어나지 않고 그대로 누워 있었다.

나는 그제야 그의 상태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눈치챘다. 옷 여기저기가 찢어져 있었고, 그 사이에서 핏물이 배어 나왔다.

“전하, 상처가……!”

“괜찮, 괜찮습니다. 백작, 잠시만요.”

나는 만류하는 그를 무시하고 일단 상의부터 벗겨 버렸다.

“……윽.”

옆구리와 가슴 주위로 창에 찔린 것 같은 상처들이 눈에 띄었다. 이런 상태로…… 대체 어떻게 싸운 거지? 게다가 이런 사람을 나는 깔고 엎드려 있었다니.

에녹은 민망한 듯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원래는 금방 낫는데, 마물의 피가 묻어서…… 조금 늦는 겁니다. 괜찮으니 걱정 마십시오. 시간이 지나면 아물 겁니다.”

그의 말에 나는 괜히 내 심장이 아릿하게 아파 오는 걸 느꼈다.

“하지만…… 아프잖아요.”

에녹은 말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누구를 불러야 하나, 하지만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동굴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

에녹은 누운 채 에린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 자신의 상처를 조심스럽게 닦아 주고 있었다.

아마 테리언 자작도 자신을 찾고 있을 거고, 데이먼이 황실 기사단에 알렸으니 그들도 찾고 있을 것이다.

나가서 어떻게든 여기 있다는 걸 알리면 그만이었지만, 에녹은 잠자코 있었다. 가슴 아픈 듯 자신을 바라보는 에린의 시선이 꽤나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프기도 꽤 아팠다. 에린이 안겨들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대로 기절해서 마지막 마법은 쓰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피를 닦아 주던 에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처가…… 이상해요. 낫고 있는…… 건가?”

에린의 말에 에녹은 자신의 상처를 슬쩍 바라보았다. 실제로 상처는 아물어 가고 있었다. 얼마 전, 마물의 피가 묻은 화살에 당했을 때도 평소보다 빠르게 아물었다.

그새 자신에게 마물의 피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걸까? 아니면…….

에녹은 서서히 일어나 앉으며 에린을 빤히 쳐다봤다.

“어…… 일어나도 괜찮으시겠어요?”

그런 에녹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녀의 가슴에 달려 있는 브로치였다.

“그건 뭡니까?”

눈으로 가리키자 에린이 브로치를 떼어 내어 보여 주었다.

“몬스터가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응? 색이 왜 이러지?”

“원래 무슨 색이었습니까?”

“새카만 색이었는데…… 색이 많이 옅어졌네요.”

“제가 좀 봐도 되겠습니까.”

에녹은 에린이 건네준 브로치를 살펴보았다. 손에 닿자마자 알 수 있었다. 이건 마물의 피가 듬뿍 담긴 마법석이었다.

“……확실히 약한 몬스터는 안 오겠군요.”

웬만한 몬스터는 마물의 피를 본능적으로 무서워하기 때문에 가까이 오지 않는다. 하지만 일정 레벨이 넘어가는 몬스터와 마물은 오히려 끌어당길 수도 있었다.

“루퍼트가 준 거예요. 웬일이지 했는데.”

“……루퍼트가요.”

하지만 색이 옅어진 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에녹은 자신의 상처가 아문 것과, 이 브로치 색이 옅어진 것 간의 상관관계를 떠올려 보았다.

“전하?”

고민에 빠진 에녹을 에린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에녹은 대답 없이 그대로 일어서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여기는 마법석 동굴이었다. 에녹은 처음 여기 왔을 때 마법석이 각기 내뿜는 마기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마기가 꽤 옅어져 있었다.

에녹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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