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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32)화 (32/129)

32화

데이먼은 긴장한 눈빛으로 에녹을 봤다.

약한 마기는 몬스터를 끌어당기지만, 강하고 짙은 마기는 오히려 약한 몬스터들을 도망가게 만든다.

따라서 소수의 강하고 위험한 몬스터들만 저곳에 서식하고 있었다. 아까도 그랬지만, 데이먼은 지금도 저곳에 내려갈 자신이 없었다.

그러는 와중, 에녹이 나직이 명령했다.

“넌 가서 황실 기사단에게 이 사실을 알려라.”

“네? 앗, 전하!”

에녹은 그 말만을 남기고 아래로 몸을 날렸다. 데이먼은 그를 따라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다가 그의 명령을 수행하기로 했다. 어설픈 실력이라면 오히려 방해만 될 것 같았다.

데이먼은 결정하자마자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

여기는 뭔가 이상했다.

특별한 능력이 없는 나였지만, 느낄 수 있었다.

풀은 다 죽어 있었고, 간간이 있는 나무들도 그 잎이 바래 곧 죽을 것만 같았다. 마치 전염병이라도 도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바람조차 멈춘 것 같은 이곳은 아무리 걸어가도 비슷한 풍경이라, 같은 곳을 헤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분명 같은 산인데 이렇게 다른 느낌이라니.

단도를 손에 꼭 쥔 채 나무 하나에 흠집을 냈다. 그러자 흠집이 난 나무가 빠르게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잠시 당황하던 나는 루퍼트가 전에 설명해 준 내용을 기억해 냈다. 이 단도에는 독이 있어서, 어떤 생명체이든 단숨에 죽일 수 있다고 했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살짝 흠집을 낸 정도로 순식간에 썩어 버릴 줄은 미처 몰랐다. 날이 내 몸에 닿지 않게 조심해야 할 것 같았다.

조금 난감하던 찰나에, 하늘에서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 진짜 미치겠네.”

그리고 곧 비가 쏟아졌다.

난 서둘러 비를 피할 곳을 찾아보았지만 딱히 갈 만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굳이 뛰어가지 않았다. 몸은 이미 너무 지쳐 있었고, 뛰든 걷든 젖을 건 분명해 보였다. 터덜터덜 한참 동안 걷다 보니 어느 바위산에 도착했다.

“응? 동굴?”

바위산 아래쪽 수풀로 가려진 곳에 작은 동굴이 있었다. 저기 들어가서 비가 그치면 다시 출발할까? 사실 이미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굵은 빗줄기는 점점 가느다랗게 변해있었다. 조금 있으면 그칠 것 같기도 했다.

어찌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뒤쪽에서 커다란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뭐…….”

거인? 괴물? 무엇인지 바로 알아차리진 못했지만, 사람처럼 두 발로 서서 다니는 몬스터가 나를 보며 침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크기는 보통 사람 키의 두 배에 달했다. 머릿속에 경고등이 켜졌다.

뭔가 생각하기도 전에 그 괴물이 팔을 벌리며 나를 덮쳤다. 다행히 큰 덩치 때문인지 그렇게 재빠르진 않았다. 나는 간신히 옆으로 몸을 피했다.

어쩌지? 어떡하지?

이 몸은 원래 예전 세계의 내 몸보다도 연약했다. 절대로 전투에 적합하지 않았다.

나는 손에 들고 있는 단도를 흘끗 바라보았다. 이걸로 저 괴물을 찌를 수 있을까? 최대한 머리를 굴려 몬스터 도감에서 봤던 지식을 떠올렸다. 괴물의 피부는 척 보기에도 질겨 보였다.

도망칠까 생각도 해 봤지만, 뛰면 소리가 날 테고, 에린의 다리로는 저 괴물의 달리기 속도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다행히 괴물은 시력이 안 좋은지, 한번 놓친 후에 한참 동안 코를 킁킁대며 나를 찾았다. 나는 단도를 두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살금살금 괴물의 뒤로 돌아갔다.

이 괴물은 아마도 ‘오거’일 것이다. 그리고 책에서 본 내용이 맞다면, 저 오거의 약점은 무릎 뒤, 오금이었다.

괴물이 두리번거리는 사이 나는 재빨리 뛰어가 놈의 무릎 뒤에 단도를 찔러 넣었다. 다행히 단도는 쑥 들어갔다.

괴물이 괴성을 지르며 나를 잡으려 허우적거렸다. 나는 최대한 빨리 다시 뒤로 물러났다.

“하아, 하아…….”

막상 저지르고 나니 손과 발이 덜덜덜 떨렸다. 나도 참 대단하지, 성공했으니 망정이지 무슨 용기로 뛰어든 거지. 처음 괴물을 맞닥뜨린 이 상황이 무서워 죽을 것만 같았다.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며 나는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고통에 울부짖으며 주위를 둘러보던 괴물은 결국 나를 발견했고, 날 잡기 위해 절뚝거리며 뛰어왔다.

너무 지쳐 있는 상황에 공포가 겹치니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바위산에 등을 딱 붙이고 서서 달려오는 오거를 응시했다. 그리고 완전히 가까워진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참이 지나도 나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살짝 실눈을 떠서 보니, 오거의 몸이 새카맣게 변한 채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나는 놀라움에 눈을 크게 떴다.

단검을 회수하려고 다가가는데, 또다시 쿵쿵, 하는 발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그 수가 좀 많았다. 둘러보니 이런 괴물이 사방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아까 발견한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무서움에 동굴 안으로 한참을 뛰어 들어와서야 멈춰 섰다. 입구가 작기 때문에 저렇게 덩치 큰 괴물은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다행……이다.”

다리가 풀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정말 다행이라고 말할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흐물흐물 긴장이 풀려갔다.

나는 새삼 나 자신이 이렇게 삶이 미련이 많은지 이제야 깨달았다. 그것도 에린 스필렛으로서의 삶에 말이다.

동굴 밖에서 쿵쿵대는 소리는 여전히 들려왔지만, 예상대로 그들은 여기까지 들어오지 못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할까.

막막함이 몰려왔다.

동굴 벽에 기대앉아 무릎을 모아 세웠다. 그 상태로 엎드리려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굴 안은 빛이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앞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이 동굴은 조금 어둡긴 해도 보는 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

자세히 보니 벽 여기저기 박혀 있는 투명한 돌들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가장 가까이 있는 빛나는 돌 위를 손으로 쓸어 보았다. 빛이 깜빡거렸다. 나는 바로 펜던트와 팔찌에 있는 마법석을 살펴보았다.

이것들도 스스로 빛나고 있었다.

“여긴 그럼…….”

눈이 크게 뜨였다. 심장이 쿵쿵대며 울리기 시작했다. 여긴, 사냥 대회에 오기 전부터 내가 이미 알고 있던 곳이었고, 찾고 싶은 곳이었다.

바로 ‘마법석 동굴’이었다.

제국에서 그토록 찾길 원했으나 아직도 찾지 못한 곳이었다. 북부 지방에 몬스터가 많이 살 수밖에 없던 이유가, 바로 이 마법석 동굴이 내뿜는 마기 때문이었다.

“하…… 하.”

실없이 웃음이 났다. 이런 상황을 놓고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그저 기가 막혔다. 그리고 동굴을 발견하면 뭐하나, 일단 살아 돌아가야 이 사실을 알릴 수 있었다.

제국법에 따르면 이런 동굴, 광산은 처음 찾는 사람에게 그 소유권을 주게 되어 있었다. 물론 생산되는 광석의 절반 이상은 제국에 팔아야 한다는 단서가 있었지만 말이다.

원작에서는 클로에가 사냥 대회 중 우연히 이 마법석 동굴을 찾게 되고, 그 공적을 치하받아 동굴에 대한 소유권과 별도의 작위를 수여받는다.

나는 그 내용을 힌트 삼아, 내가 먼저 마법석 동굴을 찾으려고 계획했었다.

완전히 혼자서는 무리였고, 기회를 봐서 에녹에게 말해 도움을 받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마법석을 판매한 수익금으로 빚을 갚고 최대한 빨리 이혼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렇게 위험한 곳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나는 입구 쪽을 보기 위해 쭉 고개를 빼고 돌아보았다. 어른어른 보이는 그림자가 아직 그들이 가지 않았다는 걸 말해 줬다.

“후우.”

어떻게 해야 하지, 내게는 지금 단검도 없었다.

펜던트 마법 효과를 이용해서 탈출해 볼까? 하지만 지속 시간은 5분이랬다. 5분 동안 미친 듯이 달려도 놈들은 나를 쉽게 쫓아올 것이다.

입술을 깨물며 고민하는데, 동굴 안쪽 깊은 곳에서 짐승이 웃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나는 숨을 죽이고 뻣뻣해진 고개를 간신히 돌려 바라보았다.

안쪽은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태어나서 처음 겪는 공포감이 밀려왔다.

제발, 잘못 들은 것이길.

***

에녹은 과거의 자신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팔찌를 보고 뛰어갔다.

에린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에린의 팔찌에는 사실 추적 마법이 걸려 있었다.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거리가 가까워지면 팔찌가 반짝거리면서 진동했다.

당시 그 마법을 걸 때는 장난 같은 마음이었는데, 지금으로선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적어도 이 팔찌가 반응한다는 건, 아직 에린이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분명히 이 근처에 있는데…….”

쿵쿵거리는 발소리에 에녹이 다급히 그쪽을 바라보았다.

자세히 보니 죽어 있는 오거가 있었다. 피부가 새카맣게 변해 있어 바로 알아볼 수는 없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 오거들이 모여 바위산 쪽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있었다.

머릿속에 어떤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에녹은 한쪽 팔을 들었다. 길게 시간을 끌 순 없었다. 마른하늘에 순식간에 구름이 모이더니, 오거 무리를 향해 말 그대로 날벼락이 떨어졌다.

콰앙-!

벼락을 정통으로 맞은 그들은 몸을 부르르 떨다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에녹은 성큼성큼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살이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뭘 보려고 한 거지.”

덩치들에 가려 멀리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가까이 가 보니 작은 동굴이 있었다. 에녹은 급히 자신의 팔찌를 봤다.

팔찌에 박혀 있는 마법석이 미친 듯이 떨리며 빛을 깜빡거렸다.

“하, 찾았어.”

에녹은 망설이지 않고 그 동굴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동굴 안이 밝다는 게 이상했지만, 지금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당장 급한 건 에린이었다.

‘제발.’

동굴 안은 짙은 마기 때문에 질식할 지경이었다. 마법사인 에녹은 마기에 누구보다도 민감했다. 게다가 지금은 준비 과정 없이 연달아 쓴 고급 마법의 여파로 마력이 잘 제어되지 않았다. 머리가 계속 지끈거렸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려던 에녹은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걸음을 주춤거렸다. 차마 부를 수도 없었다.

에린이 마물에게 사로잡힌 채 축 늘어져 흐느끼고 있었다. 에녹은 저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정신 공격.’

마물은 시커먼 촉수를 꿈틀거리며, 커다란 입을 벌린 채 에린을 삼키기 직전이었다.

에녹은 지체 없이 달려가 에린의 팔다리를 감고 있는 촉수를 검으로 잘라 버렸다.

떨어지는 에린을 받아들며, 에녹은 그녀를 조금 떨어진 곳에 눕혔다.

“백작, 스필렛 백작.”

그녀를 흔들며 깨워 봤지만, 에린은 여전히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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