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31)화 (31/129)

31화

래빗은 거의 말에 탄 영애의 허리 높이만큼 뛰어올라 그녀를 덮치려 했다.

하지만 곁에 있던 기사가 검으로 툭 내리치는 것만으로 간단하게 막아 버렸다. 영애도 놀라긴 했지만, 그래도 잡았다며 기뻐했다. 그 모습을 빤히 보고 있는데 루퍼트가 주의를 줬다.

“가지. 조심해, 앞을 똑바로 봐.”

잠시 멈춰 서서 지켜보던 루퍼트는 다시 나와 말을 이끌고 걸어갔다.

그런데 한참을 들어가도 내가 가는 길에는 개미 새끼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나는 내 사냥복의 가슴 위에 달린 브로치를 발견했다.

아, 그래. 이게 몬스터가 오지 않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했지? 손으로 브로치 위를 슥, 쓰다듬었다.

잠깐 보석 안쪽의 새카만 것이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의아했지만 그냥 잘못 본 거로 생각하며 다시 앞을 봤다.

가는 내내 참 무심하게도 루퍼트는 아무 말이 없었다. 이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클로에에게 가고 싶다고 생각하려나?

그렇게 생각할 쯤에, 조용하던 뒤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클로에가 오고 있었다. 아까는 어디로 사라졌던 거지? 함께 있던 기사는 어디 갔는지, 그녀는 혼자였다.

이렇게 되면…….

“루퍼트!”

예상대로 클로에는 나를 호위하는 남편을 불렀고, 루퍼트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돌아봤다.

말의 고삐를 잡고 있던 손이 멈칫거렸다. 그걸 보고 있자니 우스웠지만, 내가 보기에도 클로에는 말 위에서 아슬아슬해 보였다.

“가고 싶으면 가도 돼요, 난 데이먼 경을 불러올 테니.”

“누가 간다고 했어? 혼자 단정 짓지 마.”

루퍼트는 발끈하며 말고삐를 더 세게 잡았다. 참 이상한 성격이었다. 클로에를 분명히 좋아하는 것 같은데, 왜 저렇게 나에 대해서도 소유욕을 드러내는지 모르겠다.

저렇게 이기적인 성격의 남주인공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럼 당신 혼자 둘을 호위하겠다는 거예요?”

“어차피 그 브로치가 있으면 몬스터는 안 올 테니까, 문제없어.”

맞는 말이긴 했지만, 이건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부인인데 정부와 나란히 남편의 호위를 받고 있으면 꼴이 뭐가 되나. 그런 생각은 털끝만큼도 안 하는 모양이다.

“난 그냥 돌아가 있을게요. 어차피 몬스터 사냥도 안 할 텐데.”

“일정 시간만큼은 있어 줘야 돼. 안 그러면 이걸 준비한 황실을 무시한다는 뜻으로 비춰지니까.”

“안녕하세요, 부인.”

클로에가 눈가를 사르르 접으며 내게 먼저 인사했다. 어쨌든 내가 위였기 때문에 나는 고개만 까딱하는 것으로 인사를 받았다.

클로에는 조금 당황하는 듯하면서도, 다시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 웃음을 보니 왠지 마음이 더 확고해졌다.

“후,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어요. 나는 그냥 혼자 다닐게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브로치가 있으면 괜찮다면서요. 말은 나 혼자서도 탈 수 있어요.”

그렇게 옥신각신 하고 있는 사이, 클로에는 스스로 말고삐를 움직여 느리게 주변을 돌았다. 아주 능숙했다. 아까는 되게 못 타는 것 같았는데?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루퍼트에게 보호 본능을 일으키려고 일부러 무서운 척 가식을 떨었구나. 너도 참 애쓰며 산다.

그렇게 생각하며, 뭐라고 해야 루퍼트가 나를 순순히 놔줄까 고민하는데 갑자기 땅이 울렸다.

“뭐, 뭐지? 지진?”

사람도 놀랐지만, 말은 예민하여 더욱 놀랐다.

“꺄악!”

말 두 마리가 동시에 요동치기 시작했다. 루퍼트는 순간적으로 클로에의 말을 먼저 잡았고, 그러는 동안 내 말은 혼자 날뛰다 비탈길로 발을 헛디뎠다.

“아……!”

말과 함께 산비탈로 떨어지는 순간, 루퍼트와 눈이 마주쳤다. 놀람, 미안함, 죄책감 같은 것이 짧은 사이에 그의 눈동자 속에 스쳐 지나갔다.

그럼 뭐해, 이미 늦었어.

나는 그대로 눈을 감고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불행하게도 이 와중에 정신이 또렷했다. 여기저기 긁히고 부딪히는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아팠다. 온 몸이 아프고 서러웠다.

루퍼트는 내가 아닌 클로에를 구했다. 그에게는 당연한 일이라지만, 지금 내가 겪는 일은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가 요새 내게 보이는 요상한 집착과, 가끔 보이는 친절에 혹시나 했다. 하지만 역시나 그는 클로에만을 사랑한다. 끔찍하게도.

어느덧 속도감이 줄고 바닥에 몸이 닿았다. 닿자마자 나는 엎드린 채 간신히 고개를 들어 속에 있는 걸 게워내기 시작했다.

너무 굴렀는지 속이 메슥거렸다. 골이 울리고 눈물까지 나와 상태가 엉망이었다.

그래도 조금씩 손과 발을 움직여 봤다. 여기저기 긁히고 부딪혀 몸이 상처투성이였지만, 다행히 어디가 부러지거나 하진 않은 것 같았다.

“……하, 다행이야.”

이 와중에 다리까지 부러졌다면…… 아, 생각도 하기 싫다.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여 주위를 둘러봤지만, 여기가 어딘지 도무지 알 리가 없었다.

“루퍼트, 이 나쁜 새끼.”

저절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루퍼트가 원래부터 클로에를 사랑했든 말든, 중요한 건 나를 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분노로 일렁대는 마음을 잠재우려고 노력했다. 그래야 여기서 무사히 살아나갈 수 있으니까.

아무튼 이걸로 내 마음은 더욱 확고해졌다.

나는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하든, 루퍼트에 대한 배려나 걱정을 아예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생각해보면…… 그래, 차라리 잘된 일이다.

잠시 몸을 추스르며 그렇게 마음을 정리한 후, 나는 곡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목에 걸린 펜던트가 잘 있는지 손으로 확인해 보았다.

“후.”

다행히 이건 떨어지지 않고 잘 붙어 있었다.

귀족 여성용 사냥복은 평소보다 짧고 폭이 좁은 치마 안에 가죽 반바지를 받쳐 입는 형태였다. 나는 치마 속에 숨겨 뒀던 단검을 꺼내 손에 들었다.

이제 나는 혼자였고,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온몸이 비명을 질렀지만, 이를 악물고 주위를 살피며 한 걸음씩 발을 옮겼다.

나는 가면서 소설의 내용을 떠올려 보았다.

소설 속 사냥 대회에서도 에린의 얕은 계략에 빠진 클로에가 미끄러지고 넘어져서 조금 다치는 내용이 있기는 했다.

그런데 지금 넘어지고 깨지고 있는 것은 나 에린이었다. 뭘까, 이 상황은. 내가 원작대로 가지 않아서 지금 벌을 받는 걸까?

***

데이먼은 결국 칼리나 백작을 놓친 채 터덜터덜 돌아가야만 했다.

저레벨 몬스터 구역에서는 기사가 잡은 몬스터도 결국 파트너인 레이디에게 바치는 게 관례였다.

칼리나 백작도 없는 마당에 혼자 몬스터를 잡아 봐야 아무 소용도 없을 테고, 관심 있는 레이디는 바람난 자신의 남편과 다니고 있을 테니, 데이먼이 지금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돌아가는 와중에 저 멀리 루퍼트가 있는 걸 발견했다. 데이먼은 그를 보자마자 짜증이 나서 그냥 길을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루퍼트 옆에 있는 여자는 에린이 아니었다. 데이먼은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 더 가까이 다가갔다.

“어, 어떡해요. 부인께서, 죽었으면, 흐윽…… 나 때문에.”

‘이게 무슨 소리지? 누가 죽어?’

자세히 보니 여자는 루퍼트의 정부로 알려진 클로에였다.

“여기로 떨어지면 죽은 거나 다름없는 거잖아요, 이 아래는…… 루퍼트, 서둘러서 찾아 봐요.”

여자는 자책하며 울고 있었고, 루퍼트는 산 아래로 이어진 비탈길을 보며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울고 있던 여자는 뭔가를 더 말하려다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데이먼은 그 상황만으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 비탈길을 타고 내려가면 혹 있지 않을까? 하지만 저 아래는 황실 기사단에서 출입을 금지한 구역이었다.

혼자 갔다가는 같이 죽을 수도 있었다.

결심이 선 데이먼은 그 길로 곧장 최대한 빨리 본부로 뛰어갔다.

***

에녹은 내내 북쪽 산맥에 흐르는 비정상적인 마기에 대해 조사하고 있었다.

“벌써 끝난 건 아니겠지.”

오전 내로 끝낼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그는 오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막 저레벨 지역으로 갈 생각이었다.

“저기요! 큰일 났어요! 사람이, 클리포드 소공작 부인이!”

그때, 휘장 안으로 누군가 뛰어 들어오며 소리쳤다. 에녹은 그 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는 헐떡거리는 데이먼에게 급히 다가갔다.

황태자에게 저기요, 라고 부르며 들어왔지만, 에녹에게 지금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데이먼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

“클리포드 소공작 부인? 그녀가 어떻게 됐지?”

“몰라요, 산비탈로 떨어진 것 같은데.”

“루퍼트는, 클리포드 소공작은 뭘 했고.”

“정부랑, 아니,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어요.”

그 막사에는 테리언 자작도 있었다. 테리언 자작은 내내 에녹과 함께했기 때문에, 그가 에린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전하.”

테리언이 허락을 구하는 의미로 그를 부르자, 에녹은 다급하게 명령했다.

“가자, 가면서 위치를 설명해다오. 테리언, 나는 먼저 갈 테니 뒤따라 와. 오면서 샅샅이 뒤져, 어서!”

데이먼은 그제야 자신 앞에 있는 사람이 황태자라는 걸 알아봤다.

“전하……?”

“떨어지지 않게 꽉 잡게.”

데이먼은 에녹에게 다짜고짜 팔을 잡혀 그대로 막사 밖으로 끌려 나갔다.

“어어어……!”

그리고 난생처음 몸이 붕 뜨는 것을 경험했다.

데이먼은 필사적으로 에녹의 허리를 안고 매달렸다. 에녹은 그의 팔 하나만을 잡아 준 채 다그쳐 물었다.

“어디, 어디지? 정확히 짚어라.”

데이먼은 덜덜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며 간신히 손을 뻗어 길을 가리켰다.

“확실한가?”

“맞아요, 저 산비탈을 보고 있었어요. 그러다 여자가 쓰러졌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에녹과 데이먼은 급하강했다. 데이먼은 갑자기 떨어지는 느낌에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그저 황태자에게 매달렸다.

땅으로 내려온 다음, 데이먼은 더 정확히 길을 찾아 아까 루퍼트와 클로에가 있던 장소로 에녹을 안내했다.

루퍼트와 클로에는 이미 거기 없었다. 구하러 간 건지, 그냥 돌아간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여기 둘이 서서 아래를 보고 있었어요. 정부가 부인께서 죽었으면 어떡하냐, 하면서 울고 있었고요.”

에녹은 데이먼의 설명을 들으며 아래를 봤다.

“전하?”

그때 에녹의 코에서 핏물이 흘러내렸고,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것을 소매로 닦아 버렸다. 너무 급하게 고급 마법인 플라잉을 실행하는 바람에 몸속의 마력이 날뛰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에녹은 저 아래 산맥에서 매우 강한 마기가 흐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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