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루퍼트, 이렇게 전야제에 당신과 함께 참가하다니 너무 기쁘네요.”
“아, 그래.”
아까부터 클로에가 웃으면서 그에게 말을 건넸지만, 루퍼트는 뭔가 다른 생각에 빠진 사람처럼 건성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아까부터 신경 쓰이는 소리에 귀 기울이느라 미처 옆에 있는 클로에를 챙기고 있지 못했다. 그는 뛰어난 검사였기 때문에 남들보다 청력이 훨씬 좋았다.
“흥, 남편이 정부에게 빠져서 외면당하는 걸 내가 다 들었는데, 그렇게 콧대 높게 굴다가는 손가락만 쪽쪽 빨고 가시게 될 겁니다.”
움찔.
저 말을 듣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에린이었다.
루퍼트는 그 말에 자신도 모르게 그쪽으로 발길을 돌리려 했다. 옆에 붙어 있던 클로에가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루퍼트?”
“아니, 아냐. 아무것도.”
“저쪽이 뭔가 소란스러운 것 같은데, 가 볼까요?”
그나마 클로에가 가리키는 방향이 자신과 같아 다행이었다. 루퍼트는 순순히 그녀가 끄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는 그쪽은 거울을 잘 안 보고 사시나 보죠? 제가 얼굴을 좀 따지는 편이라, 안타깝게도 제 취향은 아니시네요. 기사님과 함께 춤을 추고 점수를 받느니 그냥 예쁜 제 손가락이나 빠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에린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귀에 콕콕 박혀 들었다. 루퍼트는 슬쩍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쓸어 보았다. 정말로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그나저나 저 무례한 놈은 누구지? 확인하려는 데 남자가 주섬주섬 장갑을 빼려는 게 아닌가.
이것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감히, 미친 자가 아닌가? 추태를 부리는 거로도 모자라 여자에게 결투를 신청해? 그것도 클리포드 소공작 부인에게?
루퍼트는 무의식적으로 클로에가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 앞으로 나서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누군가가 장갑을 대신 맞아 한발 늦어 버렸다.
황태자 에녹이었다.
번번이, 황태자가 에린의 일에 끼어들고 있었다. 늘 자신보다 한 박자 빨리. 그러면서 그녀를 정말 정부로 둘 생각은 없다고?
“루퍼트, 정말 전하랑 저 사람이 싸울 건가 봐요.”
그제야 자신의 팔을 꽉 부여잡은 클로에가 눈에 들어왔다. 루퍼트는 흥분을 가라앉히며 제 팔 위에 얹혀 있는 가녀린 손을 다독거렸다.
“보기 힘들면 다른 곳으로 갈까?”
“아니에요, 진귀한 광경인걸요. 저도 구경할래요.”
내기를 주도하며 돈을 걷는 사내가 그들 앞으로 다가왔다. 클로에가 눈을 반짝이며 흥미를 보였다. 그녀가 그의 팔을 살짝 잡아 흔들었고 루퍼트는 한쪽 바구니에 툭 동전을 집어넣었다.
그가 동전을 던진 곳은 ‘론’의 바구니였다.
***
보는 내내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론이란 놈은 계속해서 에녹에게 덤벼들었다. 에녹은 큰 움직임 없이 조금씩 몸을 비틀며 그의 공격을 모두 피했다.
사람들은 그때마다 론에게 야유를 보냈고, 황태자를 응원하는 소리는 갈수록 높아졌다. 하지만 에녹이 전혀 공격을 하지 않고 있어 언뜻 보면 밀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결투가 벌어지는 한편에서는 정신 사나운 음악 소리가 여전히 울려 퍼졌고, 여자들은 에녹의 잘생긴 얼굴에 감탄하며 공격하는 론을 비난했다.
나도 이들과 완전히 한마음이 되어 에녹을 응원했다. 론이 주먹을 꽉 쥐고 휘두를 때마다 내 눈이 질끈 감겼다. 저러다 다치면 어떡하지?
초조하게 구경하고 있는데, 별안간 퍽, 소리가 났다. 나는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에 입을 벌린 채 바라보았다.
에녹의 다리가 올라가 있었고, 론은 명치를 부여잡으며 나뒹굴고 있었다.
“어, 뭐야?”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했다.
그 상황은 에녹이 론에게 발차기를 했다기보단, 공격하려고 달려온 론이 에녹의 올라간 발에 부딪혔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았다.
어쨌든 아픔에 바닥을 구르던 론은 급기야 축 늘어져 기절해 버렸다.
잠깐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조용하던 관객들이 곧 환호성을 터뜨렸다.
“와아아! 전하께서 이겼다!”
“멋있어요, 에녹 전하!”
황태자에게 돈을 건 사람들은 특히나 더 기뻐하며 그 자리에서 방방 뛰어다녔다. 론에게 걸었던 사람들은 이미 쓰러진 론을 향해 곱지 않은 눈길을 보내며 흩어졌다. 그러면서도 나름대로는 즐거워 보였다.
“백작.”
“전하.”
나는 그를 보자마자 무릎 인사를 했고, 에녹도 바로 팔을 올려 고개를 숙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에메랄드빛 눈을 접으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 한쪽 손을 정중하게 들며 말했다.
“어떻습니까, 내 얼굴은 좀 취향에 맞으신지요.”
“그…… 말을 들으셨어요?”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눈짓으로 자신의 손을 가리켰다. 나는 빠르게 눈동자를 굴려 주위를 봤다. 그러다 클로에와 눈이 마주쳤고, 그녀는 무해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뭐야, 저게. 날 보고 인사하는 건가?
나는 시선을 돌리며 다시 에녹을 바라보았다.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서 있던 그가 조금은 우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혹 나도 취향에 맞지 않으신 거라면…….”
“아, 아니에요!”
나는 물러나는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급하게 올려놓았다. 에녹의 얼굴이 취향이 아닐 리가.
취향에 맞아떨어지다 못해, 얼굴만 보고 살아도 배부를 것 같은데.
“전하는 잘생겼어요.”
다른 누구도 아닌 에녹이 자신의 외모 때문에 우울해하는 건 말이 안 된다. 나도 모르게 그에게 그렇게 말했고, 에녹의 묘한 표정을 보고 나서야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그러니까, 제 취향…… 이라고…….”
말을 하면 할수록 가관이었다. 나는 그냥 입을 다물기를 택했고, 나를 빤히 보던 에녹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다행입니다.”
그는 내 손을 꽉 잡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대로 그의 가슴에 부딪히나 했는데, 그는 두 손을 마주 잡은 채 나를 뱅글뱅글 돌렸다.
“전하, 전하……!”
흥겨운 음악은 아까부터 계속해서 연주되고 있었다. 나는 결국 그의 리드에 따라 춤을 추었고, 사람들의 관심도 곧 각자의 파트너에게 흩어졌다.
멀리서 라파엘르 후작 부인이 이제 막 기사 호칭을 달았을 법한 앳된 청년과 춤을 추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재미있었다. 이곳에 와서 이런 날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놀다 힘에 부쳐, 누군가 주는 맥주까지 벌컥벌컥 마신 뒤, 나는 에녹의 손에 이끌려 조용한 곳으로 이동했다.
너무 급하게 마셔서 그런 건지, 아니면 에린이 알코올 분해 능력이 없는 건지, 얼마 마시지 않은 것 같은데 곧 취기가 몰려왔다.
“조금 취하신 것 같습니다, 백작.”
“아…… 맞아요. 그래도 오랜만에 즐거웠어요.”
에녹이 데려간 곳은 산 중턱에 있는 커다란 나무였다. 그 나무의 굵은 가지는 딱 앉기 좋게 옆으로 뻗어 있었다.
그가 먼저 성큼 올라가더니 내게 손을 뻗었다. 나는 그 손을 잡으면서도 슬쩍 아래를 봤다. 굴러떨어지면 죽진 않겠지만, 다리 하나는 충분히 부러질 것 같은 높이였다.
“괜찮아요, 아래 말고 나를 보세요.”
에녹의 목소리는 부드럽지만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결국 나는 발을 딛고 나무 위로 올라갔다. 물론 절반 이상은 그의 팔 힘에 의지했다고 봐야 했지만, 에녹은 나를 별로 힘들이지 않고 끌어올릴 만큼 보기보다 힘이 셌다.
나무 위에 올라앉으니 탁 트인 밤하늘이 보였다.
오늘은 날이 흐린 건지 별이 보이지 않아 조금은 아쉬웠다. 이곳에 와서 좋았던 유일한 건, 하늘이 맑아 별이 잘 보인다는 것이었다.
“스필렛 백작.”
조용히 있던 에녹은 나를 부르며 여길 보라는 듯 검지를 들어 보였다. 내가 그의 손끝을 본다는 걸 확인한 후, 그는 허공에서 빙글빙글 원을 그려 보였다.
“아…….”
짧게 감탄하며 홀린 듯이 그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손가락 끝에서 반짝거리는 빛이 흘러나왔고, 그 빛은 빠르게 위로 올라가더니 넓게 흩어져 밤하늘에 수를 놓았다.
그리고 폭죽처럼 팡팡 터지기 시작했다.
아래에서 아직도 왁자지껄하게 놀던 사람들은 누군가가 밤하늘을 가리키자 즐거운 듯 소리를 질렀다.
나는 입을 반쯤 벌린 채 멍하니 그 광경을 보다, 그런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의 시선을 느꼈다. 보지 않아도 그의 눈빛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그에게 답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에녹의 시선을 알면서도 오로지 하늘에만 눈을 고정시켰다. 내게서 떨어지는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속으로 아쉬워하면서도 그저 그렇게 내버려 뒀다.
***
론이 깨어났을 땐 자신의 막사였다.
황태자의 발차기에 맞은 순간에는 너무 아파 억,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창피하다는 감정도 잊은 채 데굴데굴 구르다 기절하고는 이곳으로 실려 온 것 같았다.
“어휴, 내가 미쳤지.”
사실 처음에는 상대의 신분이 고귀한 황태자라는 것을 감안하여 살살 하려고 했다. 하지만 남자 자존심에 질 수는 없으니, 그래도 지지 않을 만큼만.
하지만 황태자는 보기보다 빨랐고, 맞을 것 같으면서도 결코 안 맞았다. 오기가 생겨 있는 힘껏 그에게 달려들다가, 그 속도만큼의 강도로 맞았으니 기절하는 게 당연했다.
론은 황태자가 예상보다는 실력이 있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절반은 운일 거라고 생각했다.
술기운과 흥분에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뽐내지 못했다고 자책했다.
“아까워, 황태자를 한번 이겨 볼 기회였는데.”
그렇게 머리를 벅벅 긁던 론은 몸을 일으켜 막사 밖으로 나갔다. 아직도 맞은 배가 욱신거렸다.
어느덧 전야제가 거의 끝이 났는지, 몇몇 사람들만 도란도란 모여 있을 뿐 대다수는 숙소로 돌아간 뒤였다.
용변을 보기 위해 으슥한 숲속으로 들어가는데, 누군가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았다.
“누구…….”
얼굴을 확인한 론은 뭔가 아차, 싶은 표정이 되었다.
“클리포드 소공작…….”
“그래, 네가 내 부인에게 추근거리다 결투를 신청했다지.”
“그게, 그런 게 아니라요, 어억!”
곧장 정강이에 꽂히는 발길질에 론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그러나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산한 목소리가 그의 입을 다물게 했다.
“소리 내지 마라. 소리가 날 때마다 한 대씩 추가할 테니.”
퍽, 하는 소리가 몇 번인가 울려퍼진 후, 루퍼트는 손을 털며 다시 숙소로 갔다. 론은 앓는 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두들겨 맞은 채, 다음날 급히 수도로 돌아가야 했다.
못생긴 얼굴이 부어서 더 못생겨 보이더라는 소문이 잠시 돌다 곧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