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황실 기사단장과의 전략 회의가 끝난 후, 루퍼트는 다시 클로에의 막사 안을 찾아갔다.
침대 위에는 파리한 안색의 클로에가 앉아 들어오는 루퍼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은 불을 밝히지 않아 어두웠다.
“왜 일어났어, 좀 더 쉬지 않고.”
“충분히 쉬었어요. 루퍼트, 브로치는…… 부인께 전해 드렸나요?”
“그래, 일단은 전해 줬어. 뭘 그런 걸 다 준비하고 그래. 착해 빠져서는.”
루퍼트는 클로에의 침대 맡에 걸터앉으며,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잠시 잠자코 있던 클로에가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루퍼트는 클로에를 다시 침대 위로 눕혀 주었다.
“당신이 반지를 내게 줬잖아요. 왠지 좀 미안해서…… 루퍼트 당신이 그녀에게 잘해 주면, 어쩐지 날 덜 미워할 것 같아서요.”
“하지만 이미 그녀에게는 그것과 같은 모양의 목걸이가 있더군. 괜한 짓을 했어.”
“……그런가요. 그래도 제 것 역시 없는 것보단 나을 거예요.”
그 말을 들은 루퍼트는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을 거두며, 아주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는 듯 먼 곳에 시선을 뒀다.
“루퍼트?”
그의 낌새가 이상함을 눈치챈 클로에가 루퍼트를 불렀다. 루퍼트는 자신의 턱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마치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아니…… 그녀는 널 미워하지 않아.”
“루퍼트? 무슨 말이에요, 어떻게 날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애초에 내 안전을 빌미로 나를 협박했던 그녀라고요.”
“그건 그런데, 아무튼 지금은 별로 미워하는 것 같지 않아. 클로에, 너도 이제 너무 신경 쓰지 마.”
“루퍼트…….”
루퍼트는 이불을 클로에의 몸 위로 잘 덮어 주고는 슬슬 일어났다.
“저녁 무렵에 다시 올게, 좀 더 쉬고 있어.”
다정한 말로 인사했지만, 클로에는 나가는 뒷모습에서 자신만이 알 수 있는 미묘한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클로에가 이렇게 아파서 누워 있을 때면, 꽤 오랜 시간 동안 토닥여 주고는 늘 굿나잇 키스를 해주곤 했다.
한참 동안 그가 나간 자리를 보던 클로에가 한쪽 팔을 들어 올렸다. 신분을 나타내는 마법석 팔찌가 그녀의 손목에도 감겨 있었다.
앤드론 백작의 양녀로 입양된 후, 그녀는 그것을 새로 맞췄다. 원래 마법석은 영롱하고 투명한 보석이었지만 클로에의 것은 그 속이 미묘하게 탁한 색을 띠고 있었다.
“이번엔 얼마나 버티려나. 그나저나 목걸이를 갖고 있다고…….”
미세하게 입꼬리가 올라가는가 싶더니 팔이 툭 떨어졌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죽은 듯이 잠들었다.
***
거울 앞에 앉은 나는 평소와 달리 수수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리아는 하나로 질끈 묶은 내 머리카락 사이로 잔머리가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도록 모양을 잡아 주었다.
꾸민 듯, 안 꾸민 듯한 느낌이 오늘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였다.
곧 사냥 대회의 전야제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전야제에서는 귀족들이 마치 평민처럼 입고, 모든 에티켓을 벗어던진 채 자유롭게 즐기며 놀았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어울려 놀기 때문에, 그전 세계의 ‘야자타임’과 비슷한 느낌이기도 했다.
모닥불을 피워 놓고, 아무렇게나 앉아 평민들이 먹는 맥주를 마시며, 한쪽에서는 바비큐 파티를 하고, 다른 쪽에서는 신나는 음악에 맞춰 쌍쌍이 춤을 추기도 했다.
남자들끼리는 맨손 격투를 하기도 했고, 그 와중에 눈이 맞아 몰래 막사로 들어가는 남녀도 종종 있었다.
사냥 대회의 전야제가 이렇게 자유로운 분위기를 띠는 건 옛날의 풍습이 그대로 이어져 온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많은 사람이 함께 다니고, 무기도 발달했으며, 각자의 실력도 높아 사망자가 많지 않지만, 예전에는 소수의 인원만이 몬스터 퇴치 임무를 맡아 이곳에 파견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사냥 전날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다음날 있을 일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렸다.
그 풍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귀족들의 놀이 문화로 발전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귀족들은 정말 어떻게든 열심히 재밌게 노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마님, 살짝 눈을 감아 보세요.”
리아가 커다란 붓에 파우더를 묻혀 얼굴 전체를 쓸어 주었다. 그리고 입술에는 색이 옅은 립글로스를 발라 반짝이게 했다.
“이 정도면 괜찮으실까요?”
나는 리아가 건넨 손거울을 들고 이곳저곳 살펴보았다.
에린은 이목구비가 화려해서 진한 화장을 해도 잘 어울렸지만, 아직 나이가 어려 이렇게 풋풋한 화장도 잘 어울렸다. 높게 묶어 뒤에서 흔들리는 머리가 발랄함을 더해 주었다.
“응, 고마워, 리아. 수고했어.”
막사 밖으로 나가 보니 벌써부터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모두가 평소와 달리 편하고 자유로운 복장이었다. 여기저기 피워 둔 모닥불과 술기운에 발갛게 익은 볼을 보니 다들 즐거워 보였다.
한쪽에서는 악사들이 아코디언과 색소폰을 연주했고, 캐스터네츠 소리에 맞춰 사람들은 캉캉춤을 췄다.
나는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라파엘르 후작 부인을 발견했다.
다행이다 생각하며 그쪽으로 걸어가려는데, 누군가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워우, 레이디. 즐거운 시간 보내고 있어요?”
누구지? 술이 거나하게 취한 남자가 술병을 든 채로 다가와 말을 건넸다. 분명히 귀족이긴 할 텐데, 아직 많은 사교 행사를 다니진 않아서인지 누군지는 몰랐다.
“즐거운 시간 되시길.”
대충 예의를 갖춰 인사하고 지나가려는데, 그는 포기하지 않고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오늘은 사냥 전야제예요. 나와 친해진다면 내 점수를 그대에게 드릴게요, 어때요?”
그는 자신의 가슴을 팡팡 치며 혼자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나는 라파엘르 부인 일행에 거의 다 왔는데, 남자가 떨어지지 않아 곤란했다.
확실히 격식 따지지 않는 자리이다 보니 이렇게 도를 넘는 사람들이 있을 수는 있다. 그게 맞는 사람들끼리라면 어떻게 놀든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만 이러지 않는다면야.
“그렇게 쑥스러워하실 것 없습니다, 레이디.”
내가 대답을 회피하자 그는 내 손목을 덥석 잡으려 했다. 어딜! 나는 재빨리 손을 뒤로 빼내면서 생긋 웃었다.
그는 자존심이 퍽 상했는지 눈을 부라리며 혀가 꼬인 채 큰 소리로 말했다.
“흥, 남편이 정부에게 빠져서 외면당하는 걸 내가 다 들었는데, 그렇게 콧대 높게 굴다가는 손가락만 쪽쪽 빨고 가시게 될 겁니다.”
이 이야기가 여기서 왜 나오는 거지? 순간 치솟는 수치심과 더불어 화가 났다. 그래도 좋게좋게 거절하려 했는데, 나는 그만 참을 수가 없어서 날카롭게 말을 받아치고 말았다.
“그러는 그쪽은 거울을 잘 안 보고 사시나 보죠? 제가 얼굴을 좀 따지는 편이라, 안타깝게도 제 취향은 아니시네요. 기사님과 함께 춤을 추고 점수를 받느니 그냥 예쁜 제 손가락이나 빠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나는 다섯 손가락을 쫙 펴고 그의 눈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여기저기서 ‘풋’ 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며 씩씩거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몇 걸음 물러나 주섬주섬 장갑을 벗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설마 지금 나한테 결투 신청을 하려는 건가? 응?
더 이상의 소란은 피하고 싶었다. 그대로 뒤돌아서서 자리를 피하려는데, 남자가 더욱 흥분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봐! 어딜 도망가!”
한 열 걸음 정도 거리가 벌어졌을 때, 남자가 나를 향해 장갑을 던졌다. 그런데 장갑은 그 사이를 지나가던 다른 이가 맞아 버렸다.
나는 그를 알아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전…….”
에녹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쉿, 하고 소리 내더니, 짐짓 모르는 척 남자 쪽을 돌아보았다.
“지나가다 장갑을 맞을 줄은 몰랐는데. 내게 대결을 신청하는 건가?”
남자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아무리 술에 취했더라도, 일국의 황태자를 몰라보진 않는 모양이다.
“히익! 그게, 그게 아니라.”
재밌는 상황이었다. 나는 입꼬리가 씰룩대는 걸 손으로 가리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자네는 누구인가?”
남자는 허둥지둥 거의 넘어지다시피 한쪽 무릎을 쿵, 하고 바닥에 찧으며 앉았다. 저런, 아프겠는걸.
“저, 저는, 브린델 백작의 차남 론 브린델이라고 합니다.”
“그래, 론 경. 일어나게, 결투를 신청했으니 어쩌겠나. 응해야지. 아, 내가 황태자라는 건 고려치 말게.”
“아니, 저, 저는, 전하께 하려던 게 아니라, 저…… 여자에게…….”
나를 가리키던 남자는 그제야 이성이 돌아왔는지 손가락 끝을 슬쩍 굽히며 말을 줄였다.
에녹은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다 어깨를 으쓱했다.
“설마 저기 계신 레이디께 결투를 청했을 리는 없지 않은가. 그럼 나일 수밖에. 내가 자네에게 뭘 그리 밉보였는지는 몰라도, 겸허히 이 결투를 받아들이겠네.”
“저…….”
“자, 어서 덤비게. 내가 오늘 자네에게 맞아 죽더라도 책임을 묻진 않을 걸세.”
사람들은 신나는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듯 우르르 몰려와 주위에 원을 그렸다.
“자자! 론! 전하께서도 오늘은 봐주신다지 않는가! 어서 싸우라고!”
에녹은 어설픈 격투기 자세를 취한 채, 상대를 도발하듯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러자 방금까지 벌벌 떨던 론은 거기에 말려들어 슬슬 다리를 털고 일어났다.
“정말 아무 책임도 묻지 않으시는 겁니다?”
“그렇다니까.”
정말로 결투가 벌어질 것 같았다. 어떡하지? 이거 이대로 놔둬도 되나? 하지만 이미 말리기엔 늦어 버렸다. 사람들은 누가 이길지 내기를 하고, 돈까지 걸고 있었다.
“와아! 론, 난 너한테 걸었다고! 제대로 싸워!”
“꺄아, 전하, 파이팅!”
여자들은 주로 에녹에게 걸었다. 승리와 상관없이 그저 그의 외모 때문인 것 같았다.
덩치는 론이 더 커 보였지만, 그래도 에녹인데, 그 에녹인데. 아차, 여기서 마법은 못 쓰는 건가?
걱정 반 응원 반인 마음으로 주위를 돌아보는데, 나는 반대편에 있는 루퍼트와 딱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팔짱을 낀 채 서 있는 클로에도 있었다.
그는 나에게 뭔가 할 말이 있는 표정이었지만, 나는 순간적으로 기분이 나빠 시선을 돌려 버렸다.
따지고 보면 지금 이 상황이 만들어진 근본적인 원인은 저 남자 때문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