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산 중턱에는 산을 깎아서 만든 것 같은 넓은 평지가 있었다. 그곳에 마차가 미끄러지듯이 부드럽게 정차했다.
이미 도착한 마차에서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레이디들이 각자의 기사에게 에스코트를 받아 내려섰다.
나는 내리려다가 잠시 망설였다. 귀족 레이디가 스스로 문을 열고 내리는 건 체면을 크게 손상시키는 일이었다.
정말 불편하고 쓸데없는 규칙이라 생각했지만, 비웃음을 살 순 없으니 당장은 따르는 게 좋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누가 에스코트를 해 주지? 리아가 먼저 내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리아, 잡아 주렴.”
“잠시만요, 마님.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나는 리아의 손이든 마부의 손이든 아님 허공이든 아무거나 잡고 내려와도 상관없었지만, 황궁에서 오래 일했던 리아의 입장에선 그게 아니었나 보다.
약간의 기다림에 짜증이 나려는 차에, 나는 조금 찌푸린 표정의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산속에서 홀로 금발을 나부끼며 다가오는 남자는 나를 보더니 곧 이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근처에 있는 귀족 여자들이 ‘어머나.’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그 목소리에는 분명 의외라는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클리포드 소공작과 그 부인이 썩 사이가 좋지 못하다는 건 이제 화젯거리도 되지 못할 만큼 유명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확실히 루퍼트 역시 남주인공답게 출중한 미모를 자랑했지만, 나에게는 그저 보기 좋은 밉상 조각품이 걸어 다니는 것에 불과했다.
베레지안 남작의 장례식에서 바로 출발했다더니, 나보다 먼저 도착한 모양이다. 클로에는 보이지 않았다.
루퍼트는 나에게는 난생처음 손을 내밀었다. 그도 고위 귀족이니 내민 손이며 자세가 어색하진 않았지만, 그게 루퍼트라는 그 자체가 어색했다.
내가 가만히 보고만 있자 결국 참지 못하고 그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안 내릴 건가?”
할 수 없지. 보는 눈도 많고 해서, 그의 손을 턱 하니 잡고는 발을 내디뎠다. 슬쩍 루퍼트의 표정을 보니 어딘가를 보며 즐거운 듯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 거지? 하고 그의 시선을 따라가 봤더니, 놀랍게도 에녹이, 황태자가 산 위로 풀숲을 헤치며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걸어서 이 거리를 온 건가? 아니,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지?
에녹은 잠깐 나와 루퍼트를 보는가 싶더니, 고개를 휙 돌려 황실 기사단 쪽의 막사로 들어갔다.
“이쪽이야.”
마차에서만 내려 주려나 했는데, 루퍼트는 끝까지 나를 에스코트해서 나에게 배정된 막사 쪽으로 데리고 갔다.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러는 거지. 클로에는 또 어디에 있고.
궁금하긴 했지만, 진짜 그녀의 안부가 궁금한 건 아니라서 묻기를 관뒀다.
그런데 루퍼트는 데려다주고 가는 게 아니라 그대로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겉에 걸친 망토를 벗으려던 나는 깜짝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뭐, 뭐예요? 설마 우리가 같은 방인 건 아니겠죠?”
“맞다면?”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당장 그를 지나쳐 뒤쪽의 출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루퍼트가 팔을 강하게 잡아 세워 멈춰 서야만 했다.
“농담이야. 하지만 부부끼리 한방을 쓰는 게 그렇게까지 정색할 일인가?”
물론 루퍼트에게 나름 심경의 변화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왜 이렇게 혼자 친근해진 건지 모르겠다.
“왜 들어왔어요? 용건을 말하세요.”
“이걸 주려고.”
내 손 위로 그가 반짝이는 뭔가를 건네주었다.
“뭐죠, 이게?”
“보면 모르나? 브로치잖아.”
“그러니까 이걸 왜 주는 건데요?”
그것은 마치 흑요석처럼 새카맣고 영롱한 보석이 박혀 있는 브로치였다.
“그 브로치에는 몬스터가 다가오지 않게 하는 효과가 있지.”
말을 하며 루퍼트는 잘게 헛기침을 했다. 언뜻 보니 쑥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뭐야, 그러니까, 지금 반지 대신에 이걸 준다는 건가?
필요 없다고 되돌려 주려다가, 그래도 뭐 하나라도 있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 받기로 했다.
“알았어요.”
그런데 그는 브로치를 주고 나서도 나가지 않고 뚱한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목에 걸린 펜던트가 있었다. 나는 괜히 찔리는 것도 없는 데 그에게 쏘아붙였다.
“왜 그러고 있어요?”
“그건 못 보던 목걸이인데, 반지와 비슷한 모양이군.”
무슨 상관인가 싶어 짜증이 났지만, 나는 그와의 말싸움으로 나의 기분을 망치지 않기 위해 최대한 꾹꾹 눌러 참아 말했다.
“원래 있던 거예요. 마차를 오래 타고 와서 피곤하네요. 쉬고 싶은데…… 정말 할 말이 없으면 나가 주시겠어요?”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대수롭지 않은 듯 넘어갔다.
“하긴, 클로에도 멀미가 심하다며 쉰다더니…… 이럴 때 보면 당신도 연약한 여자이긴 한가 보군.”
루퍼트는 묻지도 않은 말을 중얼거리며 그렇게 홀로 나가 버렸다.
아니, 클로에가 멀미하는 거랑 내가 연약한 여자인 거랑 무슨 상관인 건데? 물론 에린도 좀 연약한 건 맞지만, 그거랑 멀미랑 여자랑 대체 무슨 상관인 건데!
차마 소리 지르진 못하고 속으로 외치며, 나는 뒤따라온 리아와 함께 짐을 풀었다.
나는 그새 루퍼트가 준 브로치를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모양이었다. 그걸 리아가 발견하고 주워 왔다.
“이 브로치는 못 보던 건데, 이쪽 짐과 함께 놔둘까요?”
“음…… 아니, 이리 줘.”
내가 원래부터 그렇게 안전제일주의인 건 아니었지만, 나는 사실 내일 낮에도 몬스터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무서웠다. 몬스터가 여기서는 흔한 존재라지만, 여기 온 지 얼마 안 되는 나에게는 외계 생명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서 루퍼트가 줬다는 건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 브로치를 지니고 있기로 했다.
***
루퍼트는 에린의 막사에서 나와 중앙의 커다란 막사 안으로 향했다. 그곳은 이번 사냥 대회에 참가하는 용사들이 모여, 자신의 무기를 점검하고 구역을 정하는 등의 일을 하는 장소였다.
그가 들어가자 시끌벅적했던 막사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그러다 곧 루퍼트와 안면이 있는 귀족 하나가 손을 들어 인사했다.
“소공작 각하! 이번에도 당연히 일등을 거머쥐시겠군요. 그것참, 저희에게도 기회 한번 주시지 않고요.”
“맞습니다, 저는 이번에 일등을 해서 제 레이디에게 청혼을 할 생각이었는데, 정말 너무하십니다!”
우는 소리를 하며 너스레를 떠는 귀족들 사이로 루퍼트는 예의상의 웃음만 지으며 한쪽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곧 황실 기사단장이 나와 구역과 주의 사항을 간단히 설명할 것이다. 이 몬스터 사냥 대회는 사교 행사로 자리 잡긴 했지만, 원래는 몬스터를 일정 수 이하로 감소시키는 게 주목적이었다.
따라서 여기서 논하는 전략들이 상당히 중요했다. 그렇게 각자 떠들며 웅성거리는 사이 누군가가 휘장을 걷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 휘장 근처에 있던 기사들부터 차례로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제국의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루퍼트는 들어온 이를 확인하고는 표정을 굳히며 눈썹을 까딱거리다, 슬그머니 그들과 함께 무릎을 꿇었다.
“괜찮네. 다들 날 신경 쓰지 말고 좋은 성과를 내는 데 집중들 하게.”
“……전하께서도 이번 대회에 참가하시는 겁니까?”
젊은 검사 하나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에녹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걱정 말게, 제 몫은 할 테니. 민폐 끼치진 않을 걸세.”
“하하하, 전하도 무슨 그런 말씀을.”
젊은 검사는 멋쩍게 웃으면서도 조금은 비웃는 듯한 시선으로 그를 봤다.
그도 그럴 것이, 황태자는 지난 몇 년간 이 대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지휘 본부에 남아 막사를 지키거나, 레이디들과 함께 가는 저레벨 몬스터 출몰 지역만 겨우 돌아보는 수준이었다.
물론 그가 뛰어난 마법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몬스터 사냥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강인한 체력과 맷집을 요구했다.
하지만 에녹은 여기 막사 안의 덩치 큰 근육질 사내들에 비하면 호리호리한 체격을 갖고 있었다.
‘뒤처진 황태자를 누군가는 챙겨야 할 텐데, 그게 민폐가 아니면 뭐야? 아니지, 이럴 게 아니라 이 기회에 잘 보이면…….’
젊은 검사는 편견에 사로잡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루퍼트는 달랐다. 이를 까득 문 채 날이 잘 선 검을 검집에 꽂아 넣었다. 그리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에녹을 향해 애써 표정 관리를 했다.
“루퍼트, 자네도 여기 있었군.”
“예, 전하.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루퍼트가 비켜 준 자리에 에녹은 털썩 걸터앉아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처음엔 눈치 보며 조용하던 검사들도 에녹이 털털하게 굴자 곧 긴장이 풀려 다시 떠들어 댔다.
그렇게 왁자지껄한 사이로 에녹은 아무렇지 않게 루퍼트에게 말을 걸었다.
“자네는 내가 걱정되지도 않는가 보군. 나는 자네가 지켜줄 거라 믿고 이 대회에 참가할 생각인데 말이야.”
조금은 능청스럽게 웃는 얼굴에 루퍼트는 굳은 낯으로 그를 보며 답했다.
“전하께서 마음먹고 참가하신다면, 저따위가 비할 바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루퍼트는 지금보다 조금 어린 시절, 황태자의 진면목을 본 적이 있었다.
그와 함께 마물 무리에게 쫓기던 때였다. 그때 루퍼트는 너무 많은 숫자에 질려 그만 포기하고 도망을 선택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니 에녹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우글거리는 마물 떼를 바라보고 있었다.
루퍼트가 그를 불렀으나, 에녹은 가라며 손만 흔들어 보일 뿐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루퍼트는 에녹이 그리 강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시 구하러 가야 하나 생각하고 있던 찰나, 그는 보고 말았다.
에녹이 그 수많은 마물을 상대로 퍼부어 대던 엄청난 마법을, 하늘에서 물과 불과 번개가 동시에 내리치던 소름 끼치는 광경을 아직도 잊지 못했다.
루퍼트는 많은 마법사를 봤지만, 그렇게 눈 깜짝할 새에 어떤 주문도 없이 마법을 퍼붓는 장면은 처음 보았다.
그리고 그날, 루퍼트는 클리포드 공작에게 심한 꾸지람을 들었다. 황태자를 놓고 혼자 도망치려 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에녹이 만일 그때와 같이 마법을 쓴다면, 이 수많은 참가자는 제대로 된 몬스터 한 마리 보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가야만 할 것이다.
루퍼트의 시선을 느낀 에녹이 빙긋 웃으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걱정 말게, 나는 그저 좀 살피러 갈 뿐일세. 자네만 처신을 똑바로 한다면 나는 자네의 자리를 뺏지 않을 걸세.”
루퍼트는 가볍게 고개를 숙인 채였다. 하지만 검집을 쥔 손에는 뼈가 불거질 만큼 힘을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