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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26)화 (26/129)

26화

그렇다고 해서 속마음을 훤히 내보일 순 없었다. 나는 홀로 팔짱을 끼며 도도하게 턱을 살짝 치켜든 채, 그에게 살짝 눈을 흘겼다.

“얼렁뚱땅 넘어가실 생각이라면 마차를 다시 세우겠습니다, 전하. 이 허허벌판에서 북부 사냥터까지 걸어가려면 모르긴 몰라도 꽤…….”

“흠흠, 백작. 말하겠습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너무 매몰차시군요. 나는 백작이 나를 꽤 걱정한 것 같아 기분 좋은 마음에…….”

물론 그가 심각한 분위기를 만들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에녹의 정갈한 정복 위로 묻어 있는 피를 보고 있자니 다시금 신경이 예민해졌다.

그래서인지 말이 예쁘게 나오지 않았다.

“제 걱정을 받고 기분이 좋으시다니 유감이네요. 이제 걱정하지 않겠습니다.”

내 퉁명스러운 말투에 에녹은 웃음을 가라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자객들의 습격이 있었습니다.”

“자객이요? 누가 황태자를 상대로……. 정말 괜찮으신 거죠?”

에녹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그가 진짜 무사한지 확인하고자, 그의 어깨며 가슴 부근을 나도 모르게 더듬거렸다.

그러자 에녹이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나더니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나는 그제야 아차 싶어 손을 거뒀다.

하지만 그는 헛기침을 조금 하더니, 금방 얼굴색을 바꾸고는 내 손을 잡아채며 능글맞게 말했다.

“백작이 원하신다면야 나는 언제든 준비되어 있습니다만.”

나는 도리어 내 얼굴이 빨개지는 걸 느끼며 탁, 하고 손을 뿌리쳤다.

“농담하시는 걸 보니 멀쩡하다는 건 아주 잘 알겠습니다. 어서 정황을 말씀해 주세요.”

“음, 말 그대로입니다. 자객의 습격이 있었고, 나를 호위하던 기사들은 모두 죽었지만 어떻게 가까스로 살아남았습니다.”

그렇게 치열하던 현장이었나? 나는 전에 에녹이 싸우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는 마법으로 적들을 한 방에 제압했을 뿐만 아니라, 마차까지 부서뜨렸다.

“대체 누가 이 나라에서 황태자 전하를 습격하는 거죠? 누군지 아시나요?”

“짐작은 갑니다만…….”

내가 그의 대답을 기다리며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에녹은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아 옅게 웃어 보였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라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백작께서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갑자기 깍듯한 말투로 선을 그으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아까의 장난기 섞인 태도와 달리 에녹은 웃는 얼굴에도 단호했다.

나는 결국 한발 물러났다.

“알겠습니다. 아무쪼록…… 조심하세요.”

“그래도 백작의 걱정을 받는 게 즐거운 것도 사실입니다.”

“즐거울 일도 많으시네요.”

다시 에메랄드빛 눈에 그려진 잔잔한 호선에, 나는 몸의 긴장을 풀고 밖을 봤다.

“백작께서는 사냥 대회가 처음이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맞아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공교롭게 되었습니다. 이번 사냥 대회는 전과 달리 조금 위험할 것 같습니다.”

그가 진지하게 눈을 빛냈고, 나는 그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 예전에 했던 말을 상기해 냈다.

“전에 말씀하셨던, 북부 지방에 몬스터 떼가 출현한다던 그것 때문인가요?”

“맞습니다. 몬스터는 원래부터 북부 지방에 많이 분포해 있긴 합니다만, 예년과 달리 올해는 그 수가 훨씬 많은 것으로 보고받았습니다. 특히 위험한 종들로 말이죠.”

나는 북부 지방에 몬스터가 많은 이유를 알고 있었다. 지금 그에게 말해 줄까 하다가 일단은 참았다.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면, 지금은 대답해 줄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백작께서는…….”

나를 보며 말하던 그의 시선이 어느 한 곳으로 고정되는 것을 느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털끝 하나 다치지 않으실 겁니다.”

에녹의 말에 두근거리려던 찰나, 나는 그가 보고 있는 게 목걸이라는 걸 깨닫고 그것을 꺼내 보여 주었다.

“특이한 목걸이죠? 선물 받은 거라 착용하긴 했는데…….”

“그렇군요. 아주 귀한 것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요? 이게 귀한 건가요?”

그는 내 목에 달린 육각형 모양의 펜던트를 손에 들고는 슬쩍 입술을 갖다 대었다.

순간 갑자기 다가온 그에게 놀랐지만, 그가 곧 짧은 주문을 외운다는 걸 알고는 애써 침착하게 앉아 있었다. 그 특유의 잔잔하고 묵직한 체향이 느껴져 목 아래가 간질거렸다.

“보세요.”

흘긋 눈동자를 아래로 내려서 보니 육각형 가운데 박힌 보석에서 빛이 났다. 그러고는 그 빛이 은은하게 퍼져 내 몸을 감싸고 돌았다.

“방어 마법이 걸려 있는 마법석입니다.”

“아, 그렇구나.”

생각해 보니 루퍼트가 설명해 줬던 반지가 이와 같은 모양이었다. 그것도 방어 마법이 걸려 있다고 했다.

“그런데 방금은 뭘 하신 거예요?”

“마력을 불어넣어 지속 시간을 늘려 놨습니다. 약 오 분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겁니다.”

“원래는 얼마나 버틸 수 있는데요?”

“흐음, 써 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약 일 분 정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일 분이라니, 딱 한 번의 공격을 막고 간신히 몸을 빼는 정도의 시간이려나. 그것도 몸이 재빨랐을 때의 이야기였다.

그래도 오 분이면 다섯 배나 늘린 셈이다.

“고맙습니다, 전하. 덕분에 이 펜던트의 용도도 알게 됐네요.”

“하지만 나는 백작이 그걸 쓸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쓸 일이 있을까요? 사실 여인들은 그렇게 깊은 숲속까지 들어가지는 않는 거로 아는데요.”

사실이었다. 여기사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레이디는 해가 밝은 시간에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얕은 숲속에서 그들이 사냥하는 것을 구경하거나, 기껏해야 작은 래빗 정도를 잡을 뿐이었다.

위험한 몬스터는 주로 밤에 출현했고, 높은 호승심을 뽐내려는 기사들은 그때부터 숲속으로 들어가 본격적인 사냥을 시작했다.

나는 그의 염려는 뒤로 하고 팔찌에도, 목걸이에도 달려 있는 마법석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사실 내가 지금 계획하고 있는 일도 이 마법석과 관계가 깊었다.

마법석은 이 세계에서 황금보다도, 다이아몬드보다도 그 가치가 높은 귀한 보석이었다.

마법석에 마법을 새기고 마력을 불어넣으면, 이렇게 영구적으로 마법의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많은 마법석에 다양한 마법을 새겨 넣어 각종 마법 장치들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언제나 그 수요에 비해 공급량이 적어 매우 비쌌다. 그 생각을 하다 보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가다 보니, 어느새 바깥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마차는 강변을 지나 산속으로 한참을 들어갔다.

“그래도 가자마자 옷부터 갈아입으셔야겠어요. 사람들이 놀라겠는걸요.”

“그렇군요. 사실 나한테는 익숙한 일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익숙한 일이라는 말에 나는 뭐라 답을 해야 할지 말문이 막혀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런…….”

그러자 에녹이 옅게 웃으며 마치 비밀이라는 듯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백작의 염려가 즐거운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인상 쓰실 건 없습니다. 사실 난 잘 다치지 않거든요.”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에녹이 앉은 자리에서 내 손을 잡고 장갑 위로 입을 맞췄다.

“마차를 태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이만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벌써요? 조금 더 가야 할 것 같은데.”

“우리가 함께 가면 오해를 받을 겁니다. 물론 나는 그 오해도 환영입니다만.”

다시 에녹이 농담처럼 웃으며 말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바로 마차의 차체를 두드려서 세워 주었다.

막상 훌쩍 뛰어내리는 에녹을 보니 아쉬운 감정이 들었지만 역시 꾹꾹 눌러 삼켰다.

“다시 뵙겠습니다, 백작.”

문이 닫히고, 리아가 이쪽으로 옮겨 탄 이후 마차가 다시 출발했다.

결국 에녹은 내릴 때까지 사냥 점수에 관한 말을 하지 않았다. 조금 서운한 감정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선을 그은 건 내 쪽이니까.

나는 뒤편의 창문으로 흘긋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멀어질 때까지 마차를 바라보는 황태자의 모습에 조금 안심하고 말았다, 바보처럼.

***

“전하.”

에린이 탄 마차가 사라지자, 곧이어 테리언 자작과 그의 수하들이 검은 복면을 뒤집어쓴 채 튀어나왔다.

“놈들의 화살 끝에 마물의 피가 묻어 있었습니다.”

“그렇군, 어쩐지 회복이 더디더라니.”

에녹은 길 한쪽 수풀 사이로 적당히 몸을 숨긴 채, 윗옷 단추를 툭툭 풀어 벗어 던졌다.

황태자인 에녹은 대마법사의 피를 이어받았다. 그 때문에 웬만한 상처는 금방 나았고, 적은 양의 독은 스스로 해독시켰다.

하지만 마물의 피는 그의 회복 능력을 약화시켜 보통 사람과 비슷하게 만들었다.

그가 잠시 주춤하는 사이, 그의 호위 기사들이 마물의 피가 묻은 화살에 전멸해 버린 것이다.

“미안, 또 다 죽여 버렸네. 그렇게 매복도 안 하고 바로 달려들 줄은 몰랐거든.”

“괜찮습니다. 어디 한두 번이십니까.”

피 묻은 상의를 벗으니 왼쪽 옆구리 쪽으로 난 긴 상흔이 눈에 띄었다. 겉에 묻은 피는 에녹의 것이 아니었지만, 안쪽에 묻어나온 핏자국은 에녹의 것이었다.

에녹의 옷을 받아 든 테리언 자작은 그 상처를 얼핏 보고는, 갑자기 가까이 다가와 자세히 보려 했다.

“왜 이래?”

“잠시만요, 전하. 상처가 아물고 있습니다.”

“마물의 피라고 하지 않았나?”

“그건 틀림이 없는데…….”

테리언 자작은 자신도 모르게 상처에 손을 대 보려 했고, 에녹은 그의 손을 쳐내며 그를 경멸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아, 죄송합니다. 확실히 평소보다는 회복 속도가 더딥니다만, 아물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마물의 피 없었더라면 여태 상처가 남아 있을 리도 없고, 그 피가 묻어있는 게 맞다면 전하께서 이렇게 멀쩡하실 리도 없죠.”

“어쩐지 멀쩡해서 아쉽다는 투로 들리는군.”

에녹은 투덜거리면서도 그가 붕대를 감는 것을 얌전히 지켜보았다.

“아니라고 하진 않겠습니다. 사냥 대회에 나가신다면, 제 경쟁 상대이시니까요. 저도 제 레이디에게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테리언 자작은 무뚝뚝한 얼굴로 그리 말하고는 에녹에게 새 상의를 건네주었다.

에녹은 마치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이 잠시 멍한 얼굴로 그를 봤다.

“그런데 이번에는 참가하실 겁니까? 늘 이래저래 구경만 하지 않으셨습니까.”

에녹은 그 질문에는 대답 없이, 상의의 단추를 다 잠그자마자 고갯짓했다.

“서둘러라.”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러자 에녹이 눈동자를 빛내며 대답했다.

“놀라게 해 주고 싶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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