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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25)화 (25/129)

25화

제니가 봉투를 책상 위에 놓고는 벨트를 들어 보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어디다 쓰시려는 거예요?”

“그냥, 드레스를 입고 이 단검을 메고 다니기에는 영 안 어울려서.”

그래서 드레스 안쪽 허벅다리에 단검을 고정시키기 위해, 사이즈를 재서 벨트를 맞춰 왔다. 나는 그 자리에서 당장 그것을 착용해 보았다.

마담 플라다에 맡겼더니 역시 실력이 좋아서 그런지, 고정도 잘 되면서 움직임에도 크게 불편함이 없었다. 나는 다리에 단검을 고정시키고 다시 치맛자락을 내렸다.

제니는 그 모든 과정을 빤히 지켜보며 또다시 질문했다.

“단검을 쓰실 일이 있을까요? 주변에 지켜 주실 기사님이 천지일 텐데.”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또 알아? 내가 이 단검으로 몬스터라도 잡고 다닐지.”

“마님도 참. 이제 곧 도착할 것 같네요. 제가 마중 나가 볼게요.”

제니는 내 말을 농담으로 들은 듯 작게 웃고는 꾸벅 인사한 후에 나가 버렸다.

뭐, 나도 내가 진짜 단검을 휘두르고 다니면서 몬스터를 잡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진 않았다. 하지만 사람 일은 알 수 없는 법.

뭐든 무기가 될 만한 게 하나 있다면 심적으로 든든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지니고 있을 뿐 나 역시 진지하게 생각하진 않고 있었다.

루퍼트가 없다지만, 어쨌든 준비는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사냥에 관한 것은 크게 준비할 것도 없었고, 대부분은 나 에린을 위한 귀부인 전용 준비물이었다.

파라솔과 양산, 손수건과 여러 벌의 드레스. 그 외 잡다한 생필품들을 챙겼다.

그리고 나는 이맘때쯤 마담 플라다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에 드레스 룸이 제법 화려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추천으로 하녀 한 사람을 더 뽑았다.

아무래도 이것저것 시킬 일이 늘어나다 보니 제니 한 사람만으로는 벅차 보였다. 집안 내부의 하녀들이 많이 있었지만, 누가 어느 편에 속해 있는지 알 수 없어 모두 제외했다.

“안녕하세요, 작은 마님. 리아라고 합니다.”

나는 제니와 함께 올라온 여자를 잠시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니보다는 조금 나이가 많아 보였는데, 잠깐 봤지만 동작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반가워요. 이전엔 어디에서 일했었죠?”

“황궁에서 근무하다 그만두고 잠시 쉬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마담 플라다께서 좋은 일자리가 있다고 하여 추천을 받고 오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녀의 설명을 듣고 이해가 갔다. 황궁에서 일을 했다면, 기본적인 예의범절이나 몸가짐에 대한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집안에선 제니가 나를 많이 도와주고 있어요. 만일 내 밑에서 일한다면 외부의 일들을 처리하게 될 거예요.”

“네, 뭐든 맡겨만 주세요.”

나는 계약서를 내밀었고, 그녀가 지장을 찍었다. 일전에 제니에게도 따로 계약서를 쓰게 했다.

이 둘은 집안에서 고용된 것과 별개로 내가 따로 고용한 것으로 했다. 물론 이것은 루퍼트에게 비밀이다.

“좋아, 나는 쓸모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지. 일단 오늘은 나가서 제니의 설명을 듣고 쉬고 있으렴.”

고용이 결정된 순간, 나는 제니에게 하듯 말투를 하대로 바꿨다. 사실 익숙하진 않았지만, 이 세계에선 이게 올바른 처신이었다.

나는 그들이 나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리아의 쓸모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마담 플라다가 생각보다 좋은 인재를 보내 주었다.

하지만 그녀를 내 사람으로 만드는 건 나의 몫이다. 단순히 허드렛일이나 시키려고 데려온 것이었다면, 집안의 하녀들로 충분했을 것이다.

그들이 완전히 나간 뒤, 나는 그제야 제니가 가져온 하얀 봉투를 집어 들었다. 이번에도 ‘스필렛 백작께’라는 글씨가 유려한 필체로 적혀 있었다.

멀리서 누군가가 날 도와주고 있다.

누굴까, 알게 되면 보답이라도 하고 싶은데.

그런데, 봉투 안에 있는 건 종이가 아닌 것 같았다.

팔락팔락 흔들어 보다, 안에서 느껴지는 딱딱한 감촉을 느끼고는 얼른 열어 보았다.

“이건…… 펜던트?”

육각형 모양의 작은 펜던트는 중앙에 투명한 보석이 박혀 있었다. 단순히 액세서리라고 하기에는 좀 투박했다. 손바닥 위에 꺼내 놓고 자세하게 살펴봤지만 뭔가 특이점을 찾진 못했다.

다만 자세히 보니, 보석을 감싸고 있는 육각형의 금속에 자잘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읽을 수 있는 문자는 아니었다.

“대체 뭐지, 이게.”

당장 용도는 알 수 없었지만, 이걸 보낸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 하얀 봉투에 담겨 온 것 중에 내게 유용하지 않은 것은 없었다.

나는 그것을 손에 쥐고 드레스 룸으로 갔다. 서랍에서 적당한 목걸이를 꺼내 펜던트를 분리하여 넣어 놓고, 오늘 받은 펜던트를 대신 끼워 바로 목에 걸어 보았다.

나는 거울로 그것을 보며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얼핏 보기에 그다지 예쁘다고 할 순 없는 모양이었지만, 에린의 목에 거니 나름대로 괜찮아 보였다.

이건 액세서리가 얼굴 덕을 본다고 해야 하나. 정말 언제 봐도 예쁜 얼굴이다. 나는 잠시 넋을 놓고 거울 앞에 서서 스스로의 모습을 한참 동안 감상했다.

응?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봤던 반지랑 모양이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

사냥 대회가 시작되는 당일 이른 아침, 나는 황태자가 준 황실 마차를 준비시켰다. 북부 지방은 여기서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일반 마차로 간다면 하루를 꼬박 가야 했는데, 황실 마차로는 반나절이면 된다고 했다.

마법까지 있는 세계에서 마차로 가야 한다니, 순간이동까지는 아니더라도 날아다니는 마차라던가 그런 건 없는 건가?

속으로 투덜거리며, 마차 위에 짐을 싣는 것을 보았다. 그다지 많이 챙기지 않았음에도 양이 상당해서 수레를 따로 마련해야 했다.

“마님, 이제 준비가 다 끝났어요.”

하인들이 짐을 모두 싣자, 리아가 내 앞으로 와서 두 손을 모으고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다시 봐도 역시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는 태도가 남달랐다.

제니도 물론 내게 복종하긴 했지만, 따로 법도를 익힌 건 아니어서 때론 편하게 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이번 사냥 대회 때 리아를 데려가기로 했다.

“리아, 넌 사냥 대회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고 했지?”

“네, 황궁에서 일할 때 두 번쯤 파견을 나가 봤어요.”

싱긋 웃으며 대답하는 리아를 보며 나는 그녀가 한 귀족 가문의 영애로도 손색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어설프게 아는 나보다도 완벽해 보이는 태도였다.

나는 흡족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클로에와 루퍼트가 떠오르자 조금 마음이 착잡해졌다.

나에게는 사냥 대회 외에도 다른 목적이 있었지만, 그래도 까딱하다가는 정말 비웃음을 살 만큼 초라해지는 상황이 올 가능성이 있었다.

각오를…… 해야겠지.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나는 마차 위에 올랐다.

가는 내내 창밖을 보며 앞으로의 일들을 차분히 생각했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 낯설면서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한쪽에는 커다란 강이 흘렀다. 마차는 그 강변을 따라 달렸다.

내 지난 생의 세계와 달리 이곳은 풍요로운 자연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조금은 불편한 점도 있었지만, 그래도 마법이 어느 정도 그 불편함을 상쇄시켜 주었다.

그런데 잘 달리던 마차가 갑자기 멈춰 섰다.

무슨 일인가 살펴보니, 창밖으로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몸에 힘이 들어가고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에녹, 그가 있었다.

리아가 바로 문을 열고 내려서더니,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전에도 한번 봤던 장면이었다.

나도 내리려고 엉덩이를 들썩이는데, 그가 먼저 손짓하며 나를 만류했다.

“백작,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의 표정과 말투에서 나는 당황을 읽었다.

특별히 나를 기다린 건 아니었나? 그런데 왜 이런 허허벌판에 서 있는 거지?

에녹을 위아래로 살펴보던 나는 그의 옷에 묻어 있는 피를 보고 흠칫 굳었다.

“전하, 다치셨나요?”

그가 다쳤다고 생각하자 나는 갑자기 마음이 다급해졌다. 어떻게 해야 하지? 여기서 병원까지는 얼마나 걸리지?

손수건이라도 꺼내 급하게 묻어 있는 피를 닦으려는데, 그가 가볍게 내 손목을 잡아 제지했다.

“백작, 진정하세요. 내 피가 아닙니다.”

“아…….”

나는 그제야 얼굴을 내밀어 그의 뒤편을 바라보았다.

언뜻 보이는 장면은 처참했다. 마차의 한쪽 바퀴가 부서져 나뒹굴고 있었고, 그 주위에 사람들이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뭔가 전투가 벌어진 모양이었다.

살아 있는 사람은 에녹 하나뿐이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합니다. 백작이 이리로 올 줄 알았다면 깨끗이 치워 놓을 걸 그랬나 봅니다.”

“아니에요. 그럼 전하는 무사하신 건가요?”

그가 내 안색을 살피는 듯 빤히 내 얼굴을 보며 느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백작. 마차를 함께 타고 갈 수 있을는지요.”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얼른 옆으로 비켜나 앉았다. 생각해 보면 그가 맞은편에 앉는 게 더 자연스러운 상황인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에녹 역시 그런 내 옆에 앉았고, 리아는 일어나 가볍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뒤쪽에 앉겠습니다. 두 분 편히 말씀 나누십시오.”

그리고 내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리아는 마차의 문을 닫고 뒤에 달려 있는 짐마차에 가서 앉았다.

조금 미안한 감정도 들었지만, 이 세계의 신분 구조상 황태자를 모신 마차에 하녀가 함께 타면 안 될 것 같기도 했다.

에녹이 딱히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말이다.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어쨌든 나는 당장 궁금한 것을 물었다. 에녹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농담 섞인 어조로 말했다.

“이것 참, 어쩐지 백작을 볼 때마다 마차가 하나씩 부서져 있으니 나를 마차 파괴범으로 오해하시는 게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지금 농담할 때냐고 대꾸하려다 그가 웃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무사하니 다행이다.

나는 내가 그를 진심으로 걱정했다는 사실에 속으로 흠칫 놀라면서도, 또한 나를 대하는 태도가 변함없다는 것에 안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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