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나는 루퍼트를 따라 리차드와 함께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에는 긴 복도를 따라 이어지는 여러 방이 있었다.
“이 방은 다 뭐예요?”
“사용인들의 숙소가 있습니다. 여기서 한 층 더 내려가면 지하 감옥이 있습니다만, 요새도 쓰십니까?”
리차드가 루퍼트에게 물었고, 루퍼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만큼 바쁘게 돌아가는 집이 아니지 않은가. 내게 그럴 권한도 또한 없고.”
권한이 없다는 건 또 무슨 소리지. 나는 이리저리 눈치를 보면서도 굳이 묻지 않았다. 루퍼트와 함께 도착한 곳은 무기고였다.
일반적인 사병의 무기고는 바깥에 있었는데, 여기는 조금 더 진귀한 무기들을 모아 놓은 창고인 것 같았다.
루퍼트는 소매 속에서 팔찌를 꺼내 문고리에 갖다 댔다. 그의 팔찌가 반짝 빛을 내더니 잠겨 있던 문이 열렸다.
저것도 도서관에서 본 것과 같은 것이었나 보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내 소매 속에 있는 팔찌를 더 깊숙이 밀어 넣어 고정시켰다. 꼭 비밀은 아니었지만, 황태자가 줬다는 걸 알면 또 루퍼트가 발작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리차드, 자네는 그만 올라가는 게 어떤가?”
루퍼트는 문을 열기 전에 리차드에게 경고성이 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보고 나오십시오.”
나는 리차드가 함께 있길 바랐지만, 그는 고개를 한번 까딱하더니 돌아서서 가 버렸다.
아무래도 이 공간은 공작의 식구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인 것 같았다.
어두운 방 안에 램프를 밝히고 보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무기의 가치에 대해 볼 줄은 몰랐지만, 척 봐도 값비싸 보이는 것들이 주렁주렁 널려있었다.
화려한 무늬가 검신에 새겨진 검이며, 금색으로 도금된 방패들도 많았고, 정말 중세 시대에나 있을 것 같은 철갑옷도 구석에 세워져 있었다.
멍하니 그것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루퍼트가 손짓하며 나를 불렀다.
“이쪽으로 와.”
불러서 갔더니 그는 이것저것 꺼내 보여 주기 시작했다.
“이 검은 경량 마법이 걸려 있어, 어린아이들도 한 손으로 들고 휘두를 수 있지.”
나는 그가 건네준 검을 잡고 이리저리 휘둘러 보았다. 확실히 가볍긴 가벼웠지만, 기본적인 검술도 모르는데 있어 봐야 소용없어 보였다.
다음은 활이었다.
“이건 보통의 활보다 훨씬 먼 거리까지 날아가지. 그리고 맞춘 그대로 얼어 버려서 적이 도망치지 못해.”
오, 이건 꽤 유용해 보였다. 하지만 난 궁술도 할 줄 몰랐다. 이래서야, 마법석이 박힌 무기라 해도 내가 쓸 만한 건 없는 건가. 미리 뭐라도 좀 배워 둘 걸 그랬나 보다.
내가 홀로 자책하며 우울해하다 작고 반짝이는 반지 하나를 발견했다. 육각형 모양의 별과 그 안에 보석이 박혀 있는 특이한 문양의 반지였다.
“이건 뭐죠?”
루퍼트는 떨떠름하게 나를 쳐다봤지만, 그래도 설명을 해 주었다.
“여기 버튼을 누르면 순간적으로 주위에 방어막이 생긴다. 마법을 비롯하여 어떤 공격도 무효로 만들 수 있지만 지속 시간은 짧아.”
“아, 이거 괜찮겠네요!”
내가 반색하며 받아 들려는데, 루퍼트가 나를 말렸다.
“안 돼, 이건.”
“왜죠?”
“이건…… 정해진 주인이 따로 있다.”
루퍼트가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정해진 주인이라면…… 설마 클로에를 말하는 건가.
“됐어요, 그럼.”
이거 원, 치사해서 안 하고 말지. 나는 뭐 다른 게 없나 살펴보다 작은 단검을 집어 들었다.
“그건 맹독을 뿜어내는 검이다. 찌르는 순간 커다란 오우거도 한 방에 잠들게 할 수 있지. 하지만 당신이 쓰기에는…….”
“괜찮네요, 이걸로 하죠.”
루퍼트는 내가 들고 있는 단검과 손에 든 반지를 번갈아 가며 보더니 다시 말했다.
“정 원한다면 당신에게 빌려줄게. 대신 조건이 있어.”
“뭐죠? 조건이라는 게?”
“앞으로 타운하우스의 장부 관리를 당신이 맡도록 해. 재능이 있더군.”
“…….”
나는 그의 저의를 의심하며 눈빛을 살펴보았다. 내가 하고자 했을 땐 못하게 했으면서, 이제 와서 이러는 게 단지 재능 때문이라고?
“왜 갑자기 그런 제안을 하죠? 단순한 장부 관리를 뜻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요.”
언뜻 보기에도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장부는 정리하면서 보니 더 가관이었다. 셈이 하나도 맞지 않았던 것이다.
“저번엔 재정권을 달라고 했던 것 같은데.”
“이제…… 필요 없어요.”
내가 재정권을 갖게 되면 아마 그 부분에 대한 변명까지도 직접 생각해야 할 것이다. 과거의 정부가 그랬답니다! 라는 변명 따위가 통할 리가 없다.
그 정부의 소행도 곧 나의 소행이 되겠지. 그 정도로 저 반지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고.
“생각해 보니, 내가 왜 그런 수고를 해야 하나요. 일 년만 있으면 이 집과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이 될 텐데요.”
이제는 그 일 년조차 채우게 될지 미지수였지만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내 말이 정말 이치에 합당하다고 여겼다. 루퍼트도 저번에 재정권을 달라 했을 때 이와 같은 답을 내놓았으니까.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그는 형형한 눈을 빛내며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내 머릿속에 경고음이 울렸다. 마차 안에서의 일들이 생각난 것이다.
나는 그의 걸음에 맞춰 한 발짝씩 뒤로 물러났다.
“일 년. 반드시 그렇게 될 거라고 누가 장담하지?”
“무슨…… 말이에요?”
“알 수 없다는 뜻이야. 우리의 결혼 생활이 일 년이 될지, 아니면 그 이상이 될지.”
그건 계약 조건과 다르지 않냐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차마 뱉지 못했다. 그의 손이 내 뺨을 감싸고 어루만졌기 때문이다.
“싫다면 어쩔 수 없는 거지. 강요하진 않겠다.”
그는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그대로 먼저 나가 버렸다.
뭐지, 저건……?
하지만 그의 행동이나 말투보다도 나는 그 전에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다.
일 년이 될지, 아니면 그 이상이 될지. 나는 팔 위로 돋는 소름을 잠재우며, 그의 발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 밖으로 나갔다.
나는 단검을 품 안 깊숙이 넣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이 결혼 생활을 빨리 끝내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
리차드는 내게 공작령에서 뵐 것을 다시 한번 청하며, 얼마 후 떠나 버렸다.
내가 영지에 방문할 일이 있기는 할까. 뭐, 이혼이 바로 성사되는 게 아니라면 한 번쯤은 가게 될 수도 있겠지.
생각해 보면 그랬다.
클로에는 베레지안 남작의 영애였고, 남작은 여전히 사냥 대회에 참가할 만한 지위가 못 됐다.
간혹 어떤 귀족은 정부를 데려가기도 했지만, 그것도 정부 스스로가 작위를 갖고 있거나 최소 누구누구의 부인쯤은 되어야 했다.
사냥 대회도 당연히 귀족들의 사교 행사이니, 어느 정도 그 급을 나눠 초청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날도 공교로웠다.
사냥 대회를 나흘 앞둔 어느 날, 클로에의 아버지인 베레지안 남작이 수도에서 급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루퍼트는 클로에를 마차에 태워 먼저 보내고는 뒤따라갔다.
사실 소공작쯤 되는 사람이 다른 정치 세력의, 그것도 남작급의 장례식에 참석한다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정부의 부친 장례식에 보통 다른 귀족들도 참가를 하는 건가? 거기까지는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어 모를 일이었지만, 어쨌거나 루퍼트는 부랴부랴 그녀의 뒤를 쫓아간 게 사실이다.
베레지안 남작의 죽음 이후에 들린 소식은 클로에가 앤드론 백작의 양녀가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앤드론 백작은 중립을 자처했지만, 사실 알고 보면 제2황자를 지지하는 세력 중 하나였다. 그걸 알고 있는 건, 역시 내가 소설을 읽어서였다.
그나마 클로에가 중립 세력에 속하면서, 공작의 마음이 누그러진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그게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었지만.
루퍼트는 그곳에서 바로 사냥터로 갈 것이라고 타운하우스에 통보해 왔다. 그러니까 나보고 알아서 오란 얘기지.
사냥터에서는 공식적으로 서로의 파트너를 지정하진 않았다. 하지만 은연중에 누가 누구와 연결되어 있는지는 다들 알고 있었다.
루퍼트와 클로에가 함께 나타나면 그 둘을 엮어서 볼 것이다. 그가 사냥에서 얻은 점수를 클로에에게 모두 양도한다면, 아니, 그럴 가능성이 클 것이다.
그럼 그 자리에 있는 그의 부인인 나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마는 거지. 이건 좀 곤란한데.
이쯤 해서 내가 에녹을 떠올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나는 그의 편지들이 들어 있는 한쪽 구석의 서랍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니 요즘에는 편지가 통 오지 않고 있었다.
마음이 변한 걸까. 아니, 그냥 바쁜 거겠지.
답장도 한번 하지 않은 주제에 기다리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설사 그 마음이 변했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원작에서 에녹은 분명 에린이 아닌 클로에를 사랑하는 서브 남주였으니까.
하지만 에녹까지도 정말 클로에에게 마음을 준다면, 나는 참을 수 있을까. 떠올리는 것만으로 질투가 났다. 더군다나 그것은 전혀 가능성 없는 일이 아니었다.
혼자 생각하며 질투하고 있는 내 모습이 순간 누군가와 겹쳐 보였다.
“이래서야…… 에린과 다를 바가 없네.”
나는 답답한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곧 비가 내릴 듯 하늘이 흐렸다. 소설 속에서는 맑고 화창한 날들이라는 표현을 많이 봤는데, 실제로 여기 살아 보니 비 오는 날이 훨씬 많다.
손목에 걸린 팔찌가 잘게 흔들렸다. 나는 에린의 몸을 빌려 다시 태어났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하루하루 살아가기 급급할 뿐, 아직 이 세계에서 뭘 하며 살아갈지조차 정하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만일 에녹에게 마음을 허락해 버리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황태자비가 되고 싶은 건가?
고개를 저었다. 그만 생각하자. 어차피 지금의 나로서는 어찌할 수도 없는 일인걸.
한참 상념에 빠져 있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마님, 제니예요.”
“들어와.”
제니는 하얀 봉투 하나와 내가 미리 주문해 놓은 가죽으로 된 가터벨트를 가지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