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이른 아침, 루퍼트는 방 안으로 들어오다 흠칫 놀랐으나, 소리 내지 않으려 애썼다. 그는 발소리를 죽인 채 천천히 침대로 다가갔다.
자신의 침대 위에 에린이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내가 왜 그런 소리를 했지.’
방금 전 에린에게 자신의 방에서 쉬라고 말은 했지만, 진짜 자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루퍼트는 사실 누구도 자신의 방에 들인 적이 없었다. 클로에도 마찬가지였다. 보통은 자신이 클로에의 방으로 찾아갔다.
트라우마 때문이었다.
어릴 적, 누군가 방 안에 숨어 있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다른 사람을 자신의 방에 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루퍼트는 방 안에 감돌고 있는 이 여자의 숨소리가 낯설고 어색했다. 하지만 곤히 잠든 걸 보고 있자니 왠지 깨우고 싶지 않았다. 조금, 조금만 더 보고 싶었다.
불편하면서도 싫지 않은 기분이 루퍼트를 혼란스럽게 했다.
방금까지 클로에와 함께 있으며 느꼈던 안쓰러움과는 조금 다른 감정이었다. 클로에는 평소에도 몸이 약하고, 자주 픽픽 쓰러져서 그는 늘 그녀를 유리 조각 다루듯이 조심스레 대했다.
하지만 에린은 달랐다.
‘강한 줄만 알았는데.’
그래서 내버려 뒀다.
솔직히 말하면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이 맞았다.
루퍼트는 클로에를 버릴 수 없었지만, 동시에 에린도 신경 쓰였다. 이런 마음이 모순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제어가 되지 않았다.
요즘 들어 정신 차려 보면 어느새 이렇게 에린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보면 때때로 왠지 모르게 화가 났다. 이제야 에린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에린은 이제 자신을 보지 않는 것 같아서였다.
“으응…….”
커튼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그녀의 잠을 방해하는 듯, 자고 있는 에린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루퍼트는 조심스럽게 걸어가 커튼 사이 틈을 없애며, 뒤를 확인했다. 방이 깜깜해진 걸 확인하고는 아까 에린을 보던 그 자리에 다시 섰다.
어둑어둑하긴 했지만, 그럭저럭 눈에 익으니 보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루퍼트는 뛰어난 검사였고, 그래서 보통 사람보다 밤눈이 훨씬 밝았다.
그 뛰어난 시력으로 그는 지금 조금 벌어져 있는 에린의 입술을 보고 있었다.
그녀가 호흡할 때마다 붉은 입술이 움찔거렸고, 그 위로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는 로즈핑크빛 머리카락이 왠지 예뻐 보였다.
‘만지고 싶다.’
거기까지 생각한 루퍼트가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서서히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사라락, 손끝에 감기는 머리카락이 매우 부드러웠다.
그렇게 에린의 머리칼을 몇 번 쓰다듬던 루퍼트는 스스로의 행동에 충격받은 듯 손을 멈추고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
으음, 뭐가 있었나?
문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는데. 나는 아직 잠이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보다 다시 눈을 감았다.
거의 기절하듯이 자고 말았다. 그것도 루퍼트의 침대 위에서. 내가 그의 침대 위에서 자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죽은 집사의 시체가 치워지고 주변 정리가 끝나는 것까지 보고 났더니, 긴장이 풀리며 피로가 몰려왔다.
졸음이 쏟아지는데, 그대로 내 방에서 자기에는 무섭고 신경 쓰였다.
그러다 아까 루퍼트가 자기 방에 가 있으라는 말을 했다는 걸 상기시키고는 그의 방으로 향했다.
조금 찝찝하긴 했지만 상관없었다. 루퍼트는 어차피 클로에에게 가 있을 거고, 평소에도 이 방을 쓰는 걸 본 적이 없다.
사실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너무 피곤했다. 나는 눈을 몇 번 깜빡거리다 결국 다시 잠이 들고 말았다.
***
“그래서 백작은 무사하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전하.”
황태자 집무실. 에녹은 집무실 책상에 앉아 누군가에게 보고를 받고 있었다.
앞에 있는 상대는 에녹의 최측근이자 뛰어난 기사인 테리언 자작이었다.
테리언 자작은 원래 평민 출신이었는데, 오직 실력만으로 황태자에게 발탁되어 작위까지 하사받게 되었다.
그는 대외적으로는 황태자의 호위 기사 중 한 명으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가 속한 팀의 임무는 일반적인 호위 기사하고는 사뭇 달랐다.
매복, 은신, 잠입, 암살이 테리언과 그 수하들의 특기였고, 최근에는 클리포드 공작의 타운하우스의 감시와 루퍼트의 행적을 쫓는 일을 맡아 하고 있었다.
“다른 보고 사항은?”
“확실히 뭔가가 있습니다. 소공작은 요새 사교 클럽을 자주 찾아갑니다. 그곳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건 아니고, 곧장 귀빈실로 들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에녹은 별말 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테리언 자작의 보고는 계속되었다.
“그 여자는 엊그제 슬럼가를 드나들더군요. 귀족 영애가 그곳에 갈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정확히 어디로 가는지는 파악했나?”
“그 주변에 마법 트랩이 깔려 있어 가까이 가진 못했습니다.”
“마법 트랩이라…… 뭔가 숨기는 게 있군.”
에녹이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 세계에 마법사가 오직 황실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아마 마법으로 이루어지는 수많은 동력 장치들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반인 중에서도 마법사가 종종 나왔다. 다만 그들이 마법사로서 제대로 능력을 발현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공부를 해야 했고, 또한 복잡한 수식을 외워야 했으며, 기나긴 주문을 외워야 한다는 패널티가 있었다.
반면에 전설의 대마법사 리케포로스 초대 황제의 피를 이어받은 역대 황제, 황태자들은 그런 수식언이나 주문이 필요 없었다.
물론 그들도 약간의 공부는 필요했지만, 기본적으로 그 능력치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또한 살펴봤더니, 그 여자가 머무는 별채의 뒤편 풀들이 새카맣게 타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에녹이 다리를 꼬고 의자 등받이에 기대앉았다. 손가락으로 턱을 쓰다듬다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런 현상은 보통 흑마법과 관련이 있지. 재미있게 됐군.”
테리언 자작은 흘긋 에녹을 보았다. 자신이 보기에는 심각한 일로 번질 것 같았는데, 정작 에녹은 느긋하기만 했다.
“혹시 이번 일이 브리먼 황자 전하와 연관이…….”
“어차피 제대로 된 증거가 없는 이상 황실 사람을 엮어 넣기는 힘들어. 루퍼트부터도 일단 공작의 자식이기도 하고. 조금 더 지켜봐. 그리고…….”
자신만만하던 에녹의 목소리가 수그러든 건 그때부터였다.
“백작은…… 그 집에서 뭘 하고 지내시지? 아침엔 몇 시에 일어나시나?”
“……네? 전하, 레이디의 사생활을 캐묻는 건…… 흠흠, 신사답지 못한 일입니다.”
“알아.”
에녹은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일어나선 책상을 빙 돌아 문을 향해 걸어갔다.
“안다고. 그냥 답답해서 그래.”
에녹이 나갈 때까지 테리언 자작은 고개를 숙인 채였다. 그리고 그가 사라지고 나서는 자신도 밖으로 나섰다. 그는 다시 자신의 위치로 돌아갈 것이다.
***
오후가 되어서야 나는 정신을 차렸다. 왜 그렇게 오래 잤던 건지 나로서도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푹 자고 났더니 개운했다.
일단 서재로 가서 앞으로의 일을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 보기로 했다.
나는 제니에게 차를 부탁하고는 책상 앞에 앉아 깃펜을 꺼내 들었다.
“원작에서 클로에가…….”
똑, 똑, 똑-
노크 소리에 나는 끄적거리며 쓰고 있던 종이를 얼른 서랍 안으로 감춰 버렸다.
“들어오세요.”
루퍼트와 리차드가 함께 내 서재에 들어왔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둘이 함께 온 거지?
루퍼트는 조금 못마땅한 표정이었고, 리차드는 결의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루퍼트는 들고 있던 빳빳한 종이 뭉치들을 내 책상 위에 툭 던져 놓았다.
“이게 뭐죠?”
“타운하우스의 수입과 지출 내역을 표기한 장부입니다.”
리차드가 대신 대답했다.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그것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걸 왜 여기에…….”
“하고 싶지 않다면 안 해도 돼. 굳이 머리 아픈 일 맡지 않아도 이곳에서 사는 데엔 지장 없으니까.”
명목상으로는 루퍼트가 관리했다고는 하나, 실질적으로는 아마 클로에가 관리했을 것이다.
그렇게 믿는 까닭은 하녀장 델마를 비롯한 사용인들의 태도가 정부를 대하는 것치고는 지나치게 깍듯했기 때문이었다.
자고로 금고의 열쇠를 쥐고 있는 자에게는 자연스럽게 권력이 따라붙는 셈이다. 그런데 클로에가 순순히 포기한 걸까? 이걸 왜 나에게 주는 거지?
아마 리차드의 개입이 있었겠지만, 그의 등장 하나만으로 이렇게 대우가 달라지나? 클로에가 과연 가만히 있을까.
“혹 정 어려우시다면…….”
“아니에요, 어렵다고 피하기만 해서는 되겠어요. 일단 한번 볼게요.”
내가 자신 있게 대답하자, 루퍼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날 보다 갑자기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왜 저러지?
리차드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마님. 어려운 점이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이 몸은 모레까지는 여기 있을 예정입니다.”
“……이틀 후요? 가시는 거예요?”
가 버리다니, 리차드의 존재가 얼마나 힘이 됐는데. 나는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오는 얼굴로 그를 봤다.
“하지만 도련님과 작은 마님께서도 곧 몬스터 사냥 대회에 가시지 않겠습니까.”
“하긴, 그렇군.”
몬스터 사냥 대회? 그건 아주 중요한 대회였다. 하지만 그게 이맘때쯤이라는 건 미처 몰랐다.
알았으면 나름대로 준비를 했을 텐데, 얼마 후라니 낭패였다.
내가 놀란 표정으로 굳어 있자 루퍼트는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북부 지방에서 매년 열리던 건데 뭘 그리 놀라는 거지? 참석은 물론 이번이 거의 처음이겠지만.”
“그야, 당신 말대로 참석이 처음이니까요.”
나는 당황한 걸 숨기기 위해 대충 얼버무렸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둘을 내쫓았다.
“장부를 봐야겠어요. 그만들 나가 주시겠어요?”
리차드는 순순히 나갔고, 루퍼트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한번 쳐다보곤 나갔다. 나는 그들이 나가자마자 아까 끄적거리던 종이를 책상 위로 꺼내 살펴보았다.
“몬스터 사냥 대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