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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19)화 (19/129)

19화

“루퍼트……!”

나름 버텨 봤지만 그 황소 같은 힘에 연약한 에린의 몸이 당해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정말 다행히도 에녹이 그런 나를 발견하고는 빠르게 다가왔다.

“그 손 놓게.”

루퍼트가 이를 까득, 깨무는 게 여기까지 느껴졌다. 팔을 잡고 있던 힘은 느슨해졌지만, 눈빛만 보니 정말 황태자고 뭐고 한 대 칠 기세였다.

루퍼트는 이름 높은 검사였다. 이 자리에서 정말 싸움이 벌어진다면, 아마 루퍼트가 에녹보다 앞설 것이다.

루퍼트가 망신을 당했으니, 그 자존심에 어느 정도 화를 낼 줄은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올 줄은 미처 몰랐다. 더군다나 클로에는 루퍼트를 바라보며 홀로 서 있었다. 그런 그녀를 버려 두고는 나 때문에 황태자와 신경전을 벌일 줄이야.

루퍼트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에녹을 봤지만, 에녹은 안심하라는 듯 나를 봤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를 불렀다.

“……전하.”

에녹이 내 팔을 잡기가 무섭게 루퍼트가 다시 낚아챘다.

“전하,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집안일입니다. 이 사람과 잠시 할 말이 있으니 비켜 주시겠습니까.”

“하지만 백작께서…….”

에녹이 이번에는 내 팔이 아닌 루퍼트의 팔 위쪽을 잡았다. 에녹은 단호하지만 여전히 그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대단한 포커페이스였다.

“싫어하고 계시지 않은가.”

그리고 놀랍게도 에녹의 힘에 밀려 루퍼트가 내 팔을 놓쳐 버렸다. 그 반동으로 휘청이는 나를 에녹이 잡아 자신의 뒤로 이끌었다. 마법을 쓴 것도 아닌 듯한데, 어떻게 된 거지?

에녹은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루퍼트를 향해 타이르듯 말을 건넸다.

“오늘은 내 파트너로 모셨네, 루퍼트. 자네는 자네 파트너를 신경 쓰는 것이 어떤가.”

에녹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클로에가 홀로 서 있었다. 그녀는 이제 이곳을 보고 있지 않았지만, 대신 다른 이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모여들고 있었다.

“……제 부인을 전하의 정부로 만들 셈입니까.”

돌아서는 에녹과 내 뒤에서 들려온 루퍼트의 음산한 목소리가 발길을 붙잡았다. 그의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굳혔다. 실은 나 역시도 내내 신경 쓰이는 부분이었다.

“나는 자네와 같지 않네, 루퍼트.”

하지만 내 손을 단단히 잡고 있는 그의 손이 왜인지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에녹이 그 무엇도 내게 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내 보폭에 맞춰 걸어가며 파티 홀 중앙에 이르게 했다. 그러고 보니 모두가 쌍쌍이 나와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파트너뿐 아니라 백작의 첫 춤 상대까지 차지하게 됐군요. 대대손손 이 영광을 기록해야겠습니다.”

“그럼 제국사에 길이길이 제 이름이 오르내리겠군요.”

에녹의 과장된 농담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곧 음악이 흘러나오자, 우리는 손을 마주 잡았다.

나와 에녹은 음악과 함께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꽤 가깝게 몸을 붙이고 있었지만, 느리고 우아한 곡조가 정열을 불러일으키기엔 한참이나 모자랐다.

그런데, 나를 보는 에녹의 시선은 그 어느 때보다 애절하다 못해 뜨거웠다. 당겼다 멀어졌다, 몇 번이고 가까워질 때마다 너무나 선명히 느껴졌다.

황태자 에녹은, 나 에린 스필렛을 사랑한다.

도저히 모른 체할 수 없는 그의 감정에 나는 당혹스러웠다. 그래서 그만 헛발을 디디고 말았다. 휘청거리는 나를 그가 팔로 우아하게 받아 내며 춤을 마무리했다. 누가 소설 속 아니랄까 봐, 정말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그리고 춤을 추는 내내 끈질기게 따라붙는 루퍼트의 시선 또한 나는 알고 있었다. 대체 왜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에녹의 나를 향한 감정이 느껴질 때마다, 사실 나 역시 흔들리고 있었다. 더군다나 루퍼트도 전과 달라졌다.

원작은 이미 뒤틀릴 대로 뒤틀렸다.

내가 에린으로서 살아남으려면 그것이 바람직하다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점점 더 뒤를 예측할 수 없으니 겁이 났다.

나는 음악이 끝나기가 무섭게 에녹에게서 조금 멀어졌다.

“스필렛 백작.”

그리고 그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몸을 돌려 반대편을 향해 걸어갔다. 홀이 너무 덥게 느껴졌다.

나는 지금 에린 스필렛의 몸에 들어와 살고 있었다. 에린은 비록 거래를 앞세우긴 했지만, 루퍼트를 사랑했고, 때문에 루퍼트와 결혼을 결심했다.

그럼 나는? 내 마음은 어디에 있는 거지?

에린의 몸에 빙의했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한 선택을 그대로 따라야만 하는 건가? 그게 정말 내 결혼식이었나? 나는 왜 내가 원하는 사람을 선택할 수 없는 거지?

빠른 걸음으로 무도회장 한쪽에 나 있는 테라스로 향했다. 그리고 내 뒤로 쫓아오는 걸음을 그냥 모른 척 내버려 두었다.

“백작, 왜 갑자기 달아나시는 겁니까.”

“전하께서는 왜 저를 자꾸 도와주시는 거죠?”

나는 휙 돌아서서 에녹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그는 한순간 당황한 표정을 짓다, 짧은 한숨과 함께 다시 차분해졌다.

“그게 그리 궁금하셨다면, 내게 물어보면 될 일입니다.”

느리게 다가오는 에녹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짙어졌다. 그가 나를 눈에 담으며 가까이 다가서 얼굴을 마주했다.

“당신이 이렇게 울 것 같은 얼굴로 도망가 버리면, 나는 아마 미쳐 버릴 겁니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내 눈가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처음부터 그랬다. 나는 에린의 선택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녀의 녹록지 않은 삶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에린의 삶을 대신하기 위해 누군가를 향해 기우는 마음을 억누를 자신 또한 없었다.

“대답해 주세요. 루퍼트에게 했던 말의 의미까지, 전부 다.”

울먹이며 말하는 나를 가만히 지켜보며, 에녹이 젖어 있는 내 눈꺼풀 위로 입을 맞췄다.

“알겠습니다, 말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울지 말아요.”

파티장 안에서 음악이 다시금 울려 펴지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선율이 흘러나와 흥분한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는 약간의 뜸을 들이다 내 옆에 서서 손을 내밀었다.

“잠시 산책 좀 하시겠습니까.”

“대답해 주시기 전에는 할 수 없습니다.”

잠시 흔들렸지만,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에녹은 손을 거두며 난처한 듯 웃음 지었다.

“당신은 늘 루퍼트 소공작을 바라봤지요. 어릴 때부터 쭉 그랬습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과거 에린은 그랬으니 부정할 수 없었다. 빙의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을 순 없으니 나는 대답 대신 침묵하길 택했다.

“당신과는 가끔 마주쳤는데도, 늘 루퍼트를 보고 있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나와 그는 자주 가까이 있었으니 쉽게 알 수 있었지요. 그건 한편으로 부러운 일이기도 했어요. 그렇게 변함없이 바라봐 주는 상대가 있다는 것, 나에게는 없는 일이니까요.”

그 말은 에녹이 에린의 존재를 먼저 알아챘다는 건가. 클로에와 엮이는 원작은 그럼 어떻게 된 거지.

그런데 우습게도, 지금 나는 그런 생각보다도 과거의 에린을 질투하고 있었다. 결국 내가 아니란 소리잖아.

“하지만 루퍼트가 부러웠던 것과는 별개로, 그때까지만 해도 당신을 한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라봐 주지 않는 상대를 한없이 보고 있는 당신이나, 그걸 신경 쓰는 나 자신이나 모두 다 이해할 수가 없었죠.”

그의 말을 들으며 두근거리면서도, 나는 냉정을 되찾으려 애썼다. 분위기에 취한 나머지 실수할 뻔했다. 그래도 그의 이야기는 궁금했기에 나는 계속해서 귀를 기울였다.

“당신이 루퍼트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상하게 짜증이 나더군요. 그래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무엇을 위해 결혼하든, 마음이 있든 없든, 그것은 둘의 선택이니까요. 하지만 누군가 장난질을 친 걸 보고 말았죠.”

“장난……이요?”

순간 떠오른 건, 에린이 드레스를 입으며 마셨던 음료수였다. 하지만 그건 에린을 죽음으로 몰아간 이유였다. 에녹이 말하는 건 다른 이야기인 듯했다.

나는 에녹이 등장한 시점에 일어난 일들을 상기했다.

“아, 혹시 구두 굽이 부러진 걸 말하는 건가요.”

“설마 신부가 결혼식에서 구두를 벗어 들고 다닐 줄은 몰랐습니다. 그때부터 당신이 달라 보이더군요. 이런 말 우습지만, 빛나 보였습니다. 그래서 가까운 곳에서 당신의 선택을 지켜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에녹은 몰랐겠지만, 그 말은 나에게 직구로 날아들었다. 사랑한다는 고백보다 더 강렬한 말이었다. 에린이 아닌 진짜 ‘나’를 알아봐 준 것 같아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의 말은 지금의 나에게 더없는 의미가 됐다. 하지만 안타까운 건 그 선택은 사실 내가 한 선택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전하, 저는 지금 소공작 부인이 되었습니다. 그런 저를 정부로 아니 둔다 하셨고요.”

“그렇습니다. 당신은 혼자이면 혼자였지, 정부 같은 하찮은 자리에 둘 수 있는 사람은 아니지요.”

“때문에 저는 오늘의 말을 가슴으로 들었을 뿐, 귀로는 듣지 못했습니다.”

황태자가 나를 좋아하고, 내가 그를 좋아한다 해도 지금은 그러했다. 그래서 에둘러 결국 거절의 말을 건네야 했다.

나는 아직 에린의 엄청난 빚과 루퍼트와의 계약에 묶여 있었다.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고 황태자의 마음을 받아들일 순 없었다.

에녹이 황실의 막대한 재산을 풀어 에린의 빚을 갚아 준다? 그야말로 함께 추락하는 길이 될 것이다.

지금 황실에는 제2황자가 틈틈이 황태자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그가 지금 황태자비도 없는 상황에서 에린을 정부처럼 곁에 두는 것은 그들에게 아주 좋은 먹이를 던져 주는 셈이었다.

달콤함에 젖어 있기에는 그도 나도 냉정한 현실에 놓여 있었다. 먹먹한 마음에 한숨을 쉬자, 에녹은 나보다 훨씬 더 담담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백작, 결국 듣게 될 것입니다. 조금 길을 돌아가겠지만 말입니다.”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도, 사실 격한 감정 때문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빤히 바라보자 그가 특유의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는 원하는 것은 어떻게든 손에 넣는 사람입니다.”

그는 작지만 확신에 찬 어조로 내게 말하며, 형형한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빛내 보였다. 나는 그에 동요했지만, 끝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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