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황후 탄신일 연회까지는 약 열흘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 남은 시간 동안 빌려 온 책들을 줄줄이 읽으며 이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전반적인 지식들을 닥치는 대로 외우기 시작했다.
역사, 문화, 각 귀족의 간략한 계보와 사교계 매너, 글자를 알아도 뜻을 이해할 수 없는 마법학까지. 그리고 혹시 몰라 요새 인기 있다는 로맨스 소설 작가의 최신작까지도 모두 섭렵했다.
이론만으로는 안 된다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모르던 때보다는 훨씬 덜 막막했다. 그러던 중, 맨 마지막에 있던 책을 꺼내 펼쳐 보았다.
“이게 뭐지?”
꽤 두툼하고 재미없어 보이는 책이었는데, 분명 내가 빌려 온 건 아니었다. 잘못 딸려 온 건가?
펼쳐 보니 황실과 귀족의 상속법에 관한 책인 것 같았다. 아무래도 귀족 사회이다 보니 작위와 재산의 상속에 관한 분쟁이 빈번해, 아예 그 항목을 따로 편찬한 것 같았다.
사실 벌써 밤이 깊은 지 오래였다. 나는 마법 램프의 등을 조금 더 밝게 키웠다. 저택에 단 두 개뿐이라는 이 마법 램프는 정말 유용했다.
“작위의 상속은 배우자, 자녀, 손자녀, 자녀의 배우자, 그 외의 친족 중에 순위를 정해 유언으로 남길 수 있다. 만일 유언 없이 사망한다면 위의 순서대로 작위를 승계한다. 작위가 여럿이라면 그중 높은 순으로 차례로 승계한다.”
머리 아프고 딱딱한 용어에 쏟아지는 하품을 이겨 내기 위해 일부러 문장을 소리 내서 읽었다.
거의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으면서도 얼핏 스쳐 가는 문장에 다시 눈을 크게 뜨고 읽어 봤다. 배우자, 자녀, 손자녀, 자녀의 배우자…….
클리포드 공작 부인은 이미 죽었고, 공작에게 남은 사람은 루퍼트와 루퍼트의 배우자인 나 에린 스필렛이 있었다.
그런데 공작은 아직 유언장을 작성하지 않은 상태였다. 루퍼트는 공작의 유일한 아들로 소공작이라 불렸지만, 사실상 작위는 에린과 같은 백작에 머물러 있었다.
설마 에린이 여기까지 생각했을까?
작중에서 에린이 루퍼트와 결혼하기로 한 결정적인 이유는 돈 때문이었다. 하지만 돈 때문이라면 굳이 루퍼트가 아니어도 된다.
그녀 자신이 백작이었기 때문에, 돈 많은 상인 남자를 선택해도 될 일이었다.
소설 속에서는 에린이 루퍼트를 짝사랑했기 때문에 굳이 그를 선택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다 차치하고 생각해 보면, 에린의 성격으로 볼 때 루퍼트를 선택한 이유 중에 공작위가 추가된다 해도 크게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작위는 돈처럼 있는 것 중 일부를 나누는 게 아니고, 루퍼트의 것을 뺏어야만 한다.
“아냐, 지나친 생각이지.”
아무리 클리포드 공작과 루퍼트 사이가 소원하다고는 하나, 멀쩡한 아들이 있는데 며느리인 에린에게 물려준다는 유언을 할 리는 없을 것이다.
원작에서는 에린이 죽기 전에 공작이 먼저 갑자기 죽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루퍼트가 공작의 작위를 승계한다. 그리고 곧 일 년의 기한을 채우지 못하고 이혼당하는 에린 대신에 클로에가 그 자리에 앉아 공작 부인이 된다.
그렇다면…… 공작의 죽음이 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 전에 한 번쯤 만나 볼 필요가 있으려나.
생각에 지나치게 몰두했더니 머리가 아파 왔다.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그만 침실로 가기 위해 램프를 들고 서재 밖으로 나왔다.
연회까지는 이제 겨우 이틀이 남아 있었다.
***
그리고 연회 당일 아침이 밝았다.
연회는 해가 질 무렵부터 시작해 다음 날 새벽까지 이어질 예정이었다.
나는 본채에 있는 내 침실 창가 테이블에 앉아 오전 티 타임을 즐기며, 아래에서 분주하게 오가는 하녀들을 바라보았다.
대체 또 뭘 나르고 있는지는 몰라도, 저 별채에 있는 클로에가 뭔가 많이 시키는 모양이었다.
곁에 있던 제니가 눈치를 보며 다가와 말했다.
“……정말 너무하네요. 원래 초대장은 마님 건데 가로챘으면 조용히나 있지, 저렇게 티를 내고…….”
“클로에 양은 아마 이런 연회가 처음일 테니까, 흥분할 만도 하지.”
“아하, 정말 그렇겠네요.”
제니는 내 여유 있는 모습을 보고 그제야 납득한 듯이 나와 함께 웃음을 지으며 창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초대장을 받은 사실은 아직 제니에게도 말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제니뿐 아니라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었구나.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갑자기 소리 나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황태자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는 내가 온다는 걸 이미 알고 내게 파트너 신청을 했다.
혹시 그가 보낸 걸까? 그럼 그 마담 플라다의 명함도?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니, 황태자이니까 또 알려면 알 수 있지 않을까, 란 생각이 들었다. 초대장 명단 정도는 쉽게 확보할 수 있을 테니까.
제니를 내보낸 후, 나는 다시 차분해진 마음으로 댄스 교본을 펼쳐 들었다. 다른 건 머릿속에 구겨 넣는다 쳐도, 춤은 어떡하지?
책을 든 채로 그림에 나와 있는 자세를 취해 보며 이리저리 빙글빙글 돌아 봤다. 그런데 다행히 에린의 몸이 기억하고 있었는지, 여러 번 연습하지 않고도 익숙한 듯 스텝을 밟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안심하며 책을 내려놓았다.
“흠, 이제 나도 정말 슬슬 준비해 봐야겠네.”
꼭 그럴 필요는 없었지만, 루퍼트에게는 말하지 않고 가서 그곳에서 그와 마주칠 속셈이었다. 그가 놀랄 표정을 상상하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루퍼트와 클로에를 실은 마차가 출발하고 나서야 나는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지나가는 사용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을 보니 내 모습이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마담 플라다는 전에 봤던 드레스에 실크를 덧대 우아함을 더욱 부각시켰다. 드레스만 봤을 뿐인데도 왠지 그녀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클로에의 드레스는 밝고 화려해서 말 그대로 사랑받는 정부의 드레스처럼 보였다면, 내 것은 고상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강조하여 결국 내가 안주인이라는 걸 말하고자 하는 것 같았다.
뭐, 그저 내 지나친 생각일 수도 있었지만 말이다.
드레스 자락을 손에 말아 쥐고 사뿐사뿐 정원을 가로질렀다. 그곳에는 황실 문양이 새겨진 마차가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내가 탔던 것과 조금 달라 보였다.
그곳에서 누군가 문을 열고 나왔다. 나는 두근대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그를 향해 무릎 인사를 했다.
“제국의 황태자를 뵙습니다.”
“백작, 생각보다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준비성이 좋으시다는 건 봐서 알고 있었으니까요.”
에녹이 선선하게 웃으며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나는 거기에 손을 얹으며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렸다.
사실 정말 놀라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저 감동이 조금 더 앞섰지만 티 내지 않기 위해 여유로움을 가장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를 놓치셨네요.”
마차에 오르기 전, 계단 위로 발을 디디며 그를 내려다봤다. 오후의 붉은 햇살이 그의 검은 머리카락 위로 물감처럼 내려앉았다.
그리고 나를 올려다보는 그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너무도 순진무구하게 일렁거렸다.
“오늘의 전하는 참 잘생기고 멋지십니다. 제 파트너로서 합격이에요.”
내 말을 듣고 있던 그가 ‘아’ 하는 입 모양을 만들다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늘 자신만만하던 그가 쑥스러워하는 건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기 위해 빤히 쳐다보며 그를 기다렸다.
심호흡을 하며 내게로 다시 고개 돌리는 순간 하나하나까지 전부 눈에 담았다.
“일부러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저 늘 아름다우셔서 미처 생각지 못했을 뿐입니다. 물론 오늘은 더욱더…….”
붉은 노을 때문일 것이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내 뺨이 붉어 보이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나는 에녹의 말에 화답하지 못한 채 마차에 얼른 올라탔다. 그리고 이어서 그가 내 맞은편이 아닌 옆자리에 앉아 차체를 두드렸다.
이번엔 마법 장치가 걸린 마차가 아니었는지, 조금 덜컹거렸지만 그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 심장 소리가 그에게 들렸을 테니 말이다.
***
“에녹 드웰 리케포로스 황태자 전하와 에린 스필렛 백작께서 입장하십니다.”
우리의 입장을 알리는 외침에, 웅성거리던 파티장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그리고 모두가 고개를 돌려 나와 에녹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얼마 전 비슷한 것을 겪었음에도 조금 아찔해졌다.
“백작, 당당히 고개 들어요.”
그때 나에게만 들리는 목소리가 내 정신을 깨워 주었다. 어차피 예상했던 일이고, 또 노린 일이기도 했다. 나는 침착을 유지하며 애써 미소 띤 가면을 장착했다.
사람들은 에녹과 나를 한 번 보고, 또 저쪽에 있는 루퍼트를 봤다. 멀리 있어 그의 표정이 자세히 보이지 않는다는 게 안타까웠다.
부인 대신 정부를 끼고 입장한 소공작과 황태자의 손을 잡고 온 소공작 부인. 이 콩가루 집안을 보며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다행히 귀족들은 재밌다는 듯 보면서도 루퍼트 쪽을 보며 혀를 차는 분위기였다.
클리포드 공작가는 원래부터가 황태자를 지지했고, 클리포드 소공작 부인이 황태자와 친교를 쌓는 건 흠잡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루퍼트는 부인을 내버려 둔 채 정부의 손을 잡고 입장했다.
아무리 정부를 두는 게 흔한 일이라 해도, 이런 공식 석상에서는 부인을 대우해 주는 게 관례였다.
그래도 내가 안 나타났다면 그런대로 괜찮았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이 사실을 누군가가 공작의 귀에 전해 주기를 바랐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약간의 소란과 침묵이 지나갔지만, 황제와 황후가 입장함으로써 파티는 무르익었다.
혹 황제나 황후가 황태자의 파트너를 문제 삼을까 걱정했는데, 황후의 시선이 잠시 내게 머물렀을 뿐 별다른 제지는 없었다.
하지만 그가 나의 파트너라 해서 나와 계속 함께 있을 수는 없었고, 에녹은 나름대로 바빴기 때문에 댄스 타임 전까지 나는 혼자 있어야 했다.
나는 사람들과 한참 어울리다, 조금 쉬기 위해 한적한 복도 쪽 기둥에 기대 있었다.
그런데 루퍼트는 어디에 있지?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누군가 내 팔을 세게 붙잡고 끌고 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