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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17)화 (17/129)

17화

“백작, 손목을 내밀어 보시겠습니까.”

황실 도서관 입구까지 에스코트해 준 에녹이 갑자기 멈춰 서서 내게 말했다.

나는 별 의심 없이 그에게 왼쪽 손목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가 주머니에서 가느다란 팔찌 하나를 꺼내 손에 채워 주었다.

“이게 뭔가요?”

“마법석이 달려 있는 팔찌입니다. 일종의 출입증이라 보시면 됩니다. 이 팔찌의 보석을 이렇게 장치에 갖다 대면 문이 열립니다.”

나는 황태자가 자신의 팔찌를 갖다 대는 것을 보며 신기함에 두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투명한 보석에서 붉은빛이 반짝거렸다. 그는 직접 해 보라는 듯 비켜서며 내 손목을 살짝 잡아 장치에 갖다 대 주었다.

그러자 팔찌에 있는 보석이 반짝, 빛을 내며 허리 절반쯤 오는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내 팔찌의 마법석은 푸른빛이 감돌았다.

“전하와 색이 다르네요.”

“예, 신분별로 색이 다르다고 보시면 됩니다.”

“아하…….”

저번에 제니에게 듣기로는 황실 도서관도 일단은 고위 귀족이어야만 출입할 수 있다고 했다. 에녹이 없었다면, 이런 팔찌가 있는지조차 나는 몰랐을 것이다.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팔목 쪽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팔찌는 일률적인 디자인은 아니었고, 각자 자기가 마음에 드는 형태로 제작하여 마법석만 끼우는 것 같았다.

내 시선이 향하는 쪽을 보던 에녹이 헛기침을 하며 멋쩍은 듯 말했다.

“일단 제가 알아서 만들었습니다만, 혹시 다른 형태를 원하신다면…….”

“아니에요, 마음에 쏙 들어요.”

내 생긋 웃는 얼굴에 안심하는 그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조금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앗, 또 무슨 생각을. 자제해야지.

안으로 들어서자 생각보다 훨씬 크고 웅장한 규모에 입이 떡 벌어졌다. 그리고 밖은 시끌벅적했지만, 의외로 안쪽은 도서관답게 조용했다. 약간의 작은 말소리나 발소리 정도는 들렸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정숙을 유지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황태자의 에스코트도 거기에서 끝이 났다. 그는 안을 둘러보라는 듯이 나를 앞세우며 한 걸음 뒤에서 작은 목소리로 나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알려 주었다.

“저 오른쪽에 있는 중년 여성은 마가렛 백작 부인입니다. 옛 클리포드 공작 부인과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는 소리 내어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왼쪽을 보세요. 고개는 돌리지 마시고요.”

그의 말대로 슬쩍 곁눈질로 왼편을 보니 젊은 여성과 중년의 남성이 책을 보는 척하며 꽤 밀착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라파엘르 후작 부인이 죽고 이번에 새로 부인을 들였다고 합니다. 듣기로는 후작 영애보다도 어리다고 들었는데……. 향수에 아주 조예가 깊다고 합니다.”

나는 흘끗 뒤에 있는 에녹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눈가를 휘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황태자가 이런 귀족가의 일들을 빠삭하게 안다는 것도 의외였지만, 그것을 나에게 가감 없이 알려 준다는 것 또한 의외였다.

어쨌든 크게 한 바퀴를 돌며, 그는 많은 것을 일러 주었다. 귀족들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도서관 전체의 대략적인 구역까지도 알려 주었다.

“나는 잠시 볼일이 있어 다녀와야겠습니다. 이따 모시러 올 테니 둘러보고 계십시오.”

“예, 전하. 친절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의외의 대답에 동그랗게 눈을 뜨고 바라보자 그가 입가에 미소를 짓더니 그대로 휙 돌아 뚜벅뚜벅 걸어갔다. 나는 일렁이는 마음을 꾹꾹 누른 채 그대로 일단 도서관을 돌아보기로 했다.

그는 곁에서 큰 도움이 됐지만, 확실히 지금부터는 혼자인 게 나았다. 적절한 때에 사라져 준 것도 혹시 그의 배려였을까.

어쨌든 에녹이 돌아오기 전에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나는 발소리를 죽이고 최대한 잰걸음으로 도서관 안을 누비며 원하는 책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으음…….”

나는 책상 위에 쌓인 책들을 보며 고민에 휩싸였다. 필요한 책들은 이렇게나 많은데, 아무리 봐도 오늘 내로 전부 읽을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그렇다고 황실 도서관으로 매일 출근 도장을 찍기에는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책을 빌리는 건 황족들만 가능합니다.”

에녹은 마치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다는 듯이 내 뒤로 다가와 말했다. 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다 그와 눈이 마주쳤고, 그는 마치 귀여운 소동물을 보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사람 놀라게 하기는.

그나저나 이 사람은 어떻게 이렇게 필요한 시점에 딱딱 나타나는 거지? 이 정도면 수상할 지경이었지만, 책을 빌리려는 나를 도와줄 유일한 사람을 의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지요.”

“전하께서 바라는 바가 있으신가요.”

“별것 아닙니다.”

황태자는 그렇게 대답하며, 도서관 소속의 시종들을 시켜 쌓여 있는 책들을 내 마차로 옮기게끔 명령했다.

“황후 폐하의 탄신일 연회에서 내 춤 신청을 받아 주시면 됩니다.”

정말 그의 말대로 별것 아닌 요청이었다.

입장할 때의 파트너야 당연히 루퍼트가 될 테지만, 안에 들어가서 춤을 추는 상대는 한 사람일 수도 있고 여럿일 수도 있었다.

잠시만, 왜 당연히 내 파트너가 루퍼트라고 생각하는 거지? 루퍼트가 클로에를 내버려 둘 리 없다.

정부가 벼슬처럼 여겨지는 세계에서 꼭 부부가 함께 입장하리라는 법도 없다. 생각해 보니 정말 당장 함께 입장할 파트너부터가 문제네?

“그건 곤란하겠는데요, 전하.”

내가 겨우 춤 신청 정도를 거절할 줄은 몰랐는지, 에녹은 당황하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가 왜 나와 춤을 추려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그런 반응은 왠지 나를 즐겁게 했다.

나는 눈을 내리깔며 잠시 그를 애태우다, 도도하게 입을 열었다.

“파트너 신청이라면 또 모를 테지만요.”

그가 애탈 거라 생각했던 건, 그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내 입술에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대답에 에녹이 웃는 것을 보고는, 속으로 잘못 짚은 게 아니구나, 생각하며 안도했다.

“그렇군요, 내가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진 못했습니다. 스필렛 백작, 연회에 함께할 파트너로서 이 몸은 어떠신지요.”

나는 황태자 에녹이 그렇듯 에린 또한 외모가 출중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외모를 십분 활용하여 눈가를 사르르 접어 보였다.

그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에녹이 내게 반해 휘둘리는 건 상관없었다. 단지 내가 반대의 상황에 놓이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영광입니다, 전하.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전하를 흠모하는 많은 여성분이 실망할 텐데요. 괜찮으시겠어요?”

“나와 부인 사이에 돌 염문설을 먼저 걱정하시는 게 아니고요.”

싱그러운 에메랄드빛 눈매가 보기 좋은 선을 그리며 곱게 휘어졌다. 나는 그와 눈을 마주한 채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애써 봤지만, 오히려 그 눈웃음에 정신이 흐트러져 그만 먼저 눈을 피하고 말았다.

“지금 제 처지에 염문설이 무슨 문제가 되겠어요.”

루퍼트와 그의 정부 클로에의 사이는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이 정도라면 틀림없이 공작의 귀에도 들어갔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로에가 무사한 건, 나와의 결혼이 방패가 되기 때문이었다.

결혼 전 연애는 허락할 수 없어도 정부로 두는 건 상관없다는 건가. 내 상식으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 세계의 상식이 그러하니 어쩔 수 있나.

“아무튼 그럼 됐습니다. 백작의 첫 스캔들 상대가 내가 된다면 그건 그것대로 영광이겠군요.”

나는 그의 말을 농담처럼 가볍게 흘려 넘기며 그를 따라 걸었다. 황실 도서관의 측문 쪽으로 나가 보니 휴게실이 있었다.

하지만 흔히 생각하는 도서관 휴게실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곳이야말로 많은 사람이 이곳에 방문하는 목적이었다.

커다란 유리 온실로 되어 있는 그곳의 안쪽에는 새들이 날아다녔고, 다채로운 꽃과 나무들이 가득했다. 곳곳에는 티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고, 시종들이 그 사이를 분주하게 오가며 다과와 음료 등을 나르고 있었다.

유리 온실의 바깥은 짧게나마 산책이 가능한 정원까지 이어져 있어, 이곳은 당장이라도 티 파티를 열 수 있을 법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백작, 손을.”

에녹이 내게만 들릴 법한 목소리로 말한 뒤 손을 내밀었고, 나는 손을 그 위에 얹고 사뿐히 걸어갔다. 수많은 눈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한 무리의 귀족들과 눈이 마주쳤고, 최대한 그림같이 미소 지으며 그곳으로 걸어갔다. 황태자는 그곳까지만 데려다준 후에 조금 뒤로 물러나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효과는 충분했다. 콧대 높은 귀족들은 부채를 팔랑거리면서도 내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이곳에서는 처음 뵙는 것 같네요, 클리포드 소공작 부인.”

“안녕하세요, 마가렛 백작 부인.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반가워요.”

그녀는 내가 자신을 알고 있다는 것에 매우 놀라워하면서도 기뻐했다. 마가렛 백작 부인은 클리포드 공작가와 연을 맺고 싶어했지만, 기회가 없어 늘 아쉬워했다.

그런 마가렛 백작 부인을 시작으로 해서 나는 수월하게 여러 귀족과 인사를 나누고 안면을 익힐 수 있었다.

“이렇게 젊고 아름다운 부인을 두고 소공작님은…… 참, 남작 영애 따위를 곁에 두시니 알 수가 없는 노릇이네요.”

라파엘르 후작 부인이 살짝 비꼬듯 말을 꺼냈지만, 나는 그 둘을 질투하지 않으니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향수에 조예가 깊다는 말을 기억하고 그것으로 대화의 주제를 틀어 버렸다.

라파엘르 후작 부인은 결국 자신의 향수에 관한 지식을 일장 연설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흡족하게 돌아갔다. 그녀 입장에서는 나와 아주 말이 잘 통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것은 큰 성과였다.

황궁 연회가 열렸을 때 아는 사람 하나 없이 홀로 서 있는 것보다는, 몇몇이라도 안면이 있으면 대화의 물꼬를 트기가 훨씬 쉬울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수다에만 집중한 게 아니라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까지도 유심히 관찰했다. 책을 보고 이론적으로 익히는 것도 중요했지만, 실제로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고 익혀야 했다.

어느 시대에서나 상류층은 그들만의 관습이 있었고, 그것을 에티켓이란 이름하에 시시콜콜 따지기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회 전에 짧은 시간이나마 맛보기로 겪을 수 있었다는 건 역시 꽤나 유용했다.

약간의 성과를 거두고 돌아가려는데, 내내 보이지 않던 황태자가 마차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게 굳이 기다렸냐는 말은 하지 않았다. 대답을 들어 버리면, 그의 마음을 더 이상 모른 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럼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겠습니다.”

손등에 그가 남긴 짧은 입맞춤을 끝으로 나는 마차에 올랐다. 황실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가 소리도 없이 다시 공작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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