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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16)화 (16/129)

16화

꿈에서의 나는 결혼식 당일로 돌아와 있었다.

정확히는 내가 빙의된 시점보다 조금 이른 시점이었다.

이제 막 웨딩드레스가 도착해 그것을 입으려는데, 누군가가 친절한 목소리로 유리잔을 들고 다가왔다.

“날이 좀 덥지요. 목이 마르실 것 같아서요. 시원한 차를 좀 준비해 봤어요.”

아닌 게 아니라 그날은 몹시 더웠다. 잔 겉에는 물방울이 맺혀 있어 매우 시원해 보였다. 나는 그것을 받자마자 꼴깍꼴깍 잘도 삼켰다. 다디단 액체로 목을 축이니 좀 살 것 같았다.

그렇게 웨딩드레스를 입고, 화장과 머리 손질을 하기 위해 잠시 앉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찬 걸 먹어서인지 배가 살살 아픈가 싶더니 그대로 툭, 의식이 꺼져 버렸다.

“아……!”

나는 그대로 잠에서 깨어나 벌떡 일어나 앉았다. 온몸이 땀에 푹 젖어 있었고 심장은 미친 듯이 쿵쿵 뛰어댔다.

“그 주스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에린은 그 음료를 먹고 그대로 죽어 버렸다. 그리고 바로 내가 그 몸에 빙의했다.

나는 몸서리를 치며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왔다.

마법 램프에 불을 켜고 티 테이블 앞의 의자에 앉아 창가를 바라보았다. 아직 밖은 어두웠고 천둥 번개와 함께 비가 내렸다.

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꿈속의 일들을 다시 되짚어 보았다. 괜히 이런 꿈을 꾼 건 아니었을 것이다. 이건 분명히 나의 기억이 아니었다. 바로 죽은 에린의 기억이었다.

죽은 에린이 뭔가를 나에게 알려 주고 싶은 것일까.

빗소리에 맞춰 테이블 위에 손가락을 톡톡 두드렸다. 누굴까, 누가 에린을 죽게 만들었을까.

당장 의심되는 건 역시 클로에였다.

그 이후로 루퍼트를 뺏겼을 뿐만 아니라, 당시 그녀와 눈을 마주쳤을 때의 표정은 마치 귀신을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물잔에 물을 따랐다. 그걸 그대로 마시려다 움찔하며 손을 멈췄다.

“바보같이.”

나지막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마저 물을 마셨다. 이미 이 집 안에서 먹고 마신 것들이 매우 많았다. 죽으려면 벌써 죽고도 남았을 것이다.

때문에 클로에가 범인이라고 확신할 수가 없었다. 만일 클로에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에린의 목숨을 노리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으로선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유리잔을 건네준 사람의 얼굴이 내 꿈속에선 잘 보이지 않았다. 만약 봤다고 해도 애초에 내가 이 세계에서 알고 있는 사람의 수가 극히 적었기 때문에, 알아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내가 빙의하면서 결혼식은 치러졌고, 에린 스필렛은 소공작 부인이 되었다. 에린의 개인적인 원한 관계 때문일까? 아니면 이 결혼을 달가워하지 않을 사람?

“황후의 탄신일…….”

그곳에 나가 보면 혹시 알 수 있지 않을까. 각각의 사람들 반응을 보면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소공작 부인에게 온 초대장은 클로에에게로 갔다. 낮에 괜찮다고 말하기까지 한 것을 다시 달란다고 줄 리가 없었다.

“후, 내일 고민하자.”

몸이 열기로 뜨끈했다. 아직도 날은 어두웠고, 머리도 지끈거리는 게 이 몸은 조금 더 쉬어야 할 것 같았다.

물 한 잔을 더 마신 후, 나는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다행히 이번엔 아무 꿈도 꾸지 않았다.

***

몸은 며칠을 앓고 나서야 겨우 회복되었다. 나는 제니가 건네주는 머그잔을 바라보며 물어보았다.

“이게 뭐니?”

“약초물이에요. 기운이 없는 사람에게 이걸 먹이면 기운을 차린다고 해요.”

“……고맙구나.”

나는 한 입 머금자마자 그걸 그대로 뱉어낼 뻔했다. 한약 같기도 한데, 또 밍숭맹숭해서 허브 차 같기도 했다. 아무튼 이런 건 확실히 독약은 아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공작님이 마님께서 깨어나시는 대로 알려 달라고 하셨어요.”

“……그래? 내가 아픈 걸 그 사람이 알고 있니?”

“그럼요, 이 약초물도 소공작님이 지시하신 건데요.”

나는 반쯤 먹다 남은 머그잔을 제니에게 다시 건네주었다.

“마님?”

“아니, 맛이 없어서 더는 못 먹겠어. 일단 목욕부터 해야겠구나.”

“그래도 몸에 좋은 건데…….”

“그럼 네가 먹으렴.”

제니는 내 말에 눈을 말똥말똥 뜨더니 정말로 컵에 든 물을 호로록 마셔 버렸다. 그걸 보니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정말 이 잔에는 독이 없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내 웃음에 제니는 멋쩍게 웃으며 욕실로 먼저 달려갔다. 나는 바닥에 발을 딛고 내려오다 휘청거리는 몸에 다시 침대 기둥을 잡았다.

확실히 귀족은 귀족이었는지, 이 연약한 아가씨는 감기 좀 앓았다고 몸을 못 가눴다. 정말 답답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비틀거리며 걷다 보니 좀 정신이 돌아왔다. 입 안에 도는 쓴맛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그대로 욕실로 가서 찝찝한 몸을 닦고 나와 차려진 수프까지 알차게 긁어 먹었다. 건강해야지, 그래야 오래 살지.

그렇게 다 먹고 배를 두드리는데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싶어 나가 보니 뜻밖에도 루퍼트였다.

“무슨 일이에요?”

“일어났나 보군.”

그는 내 말에는 대답도 없이, 마치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역시 허락 없이 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나는 그를 위아래로 흘겨보며 손을 허리춤에 올려놓았다.

“무슨 일이냐니까요?”

내가 따져 묻자 루퍼트는 조금 당황한 기색으로 내가 앉았던 티 테이블 의자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고는 테이블 위에 편지 봉투 두 개를 툭 얹어 놓았다.

“……이걸 전해 주러.”

“아, 그래요?”

그는 그것을 전해 주고도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좀 마른 것 같군.”

“며칠을 누워만 있었으니까요.”

“먹기는 제대로 먹는 건가?”

“보시다시피.”

나는 한쪽에 밀어 놓은 그릇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우편물을 만지작거렸다. 이걸 뜯어 봐야 하는 데 왜 안 나가는 거지?

“뭐…… 또 할 말 있어요?”

그는 방금과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슬그머니 일어났다. 그 동작이 너무 굼뜨고 느려 보기가 좀 답답했다.

“아니, 그만 나갈 거야.”

“그럼 가는 길에 이것 좀 주방에 전해 주세요.”

나는 그에게 빈 그릇이 담긴 트레이를 손에 들려 주었다. 루퍼트는 그대로 굳은 채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 대고 있었다.

“뭐 해요? 나간다면서요?”

나는 문까지 손수 열어 그를 배웅해 주었다. 휴, 이제 방해꾼도 사라졌겠다, 한번 뜯어 볼까.

이번에도 내게 온 우편물은 두 개였다. 하나는 화려한 봉투, 하나는 하얀 봉투.

저번과 다른 건 둘 다 ‘스필렛 백작’ 앞으로 왔다는 점이었다.

나는 봉투를 이리저리 펄럭거리며 살펴보다 화려한 봉투부터 먼저 열어 보았다.

「언제든 괜찮으시다면 황실 도서관에서 뵙기를 청합니다. - 에녹.」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간신히 끌어 내렸다. 아냐, 안 돼,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니야.

나는 울렁거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나머지 봉투를 살펴봤다. 저번과 마찬가지로 아무 장식도 없는 새하얀 봉투였다. 같은 발신인인 걸까.

그것을 열어 본 난 놀란 눈을 비비며 봉투 안을 다시 한번 확인해 봤다.

“……세상에.”

안에는 편지가 아닌 카드가 들어 있었다.

그 카드는 다름 아닌 황후 탄신일 기념 연회의 초대장이었다. ‘클리포드 소공작 부인’이 아닌 ‘스필렛 백작’에게 온 것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나는 혹시나 싶어 일 층으로 내려갔다.

“루퍼트……!”

내 목소리에 집사가 뛰어나와 대신 대답했다.

“소공작님은 지금 별채에 계십니다.”

“아, 그래요?”

곧장 별채로 갈까, 하다가 걸음을 멈췄다. 루퍼트는 그렇다 치고, 클로에를 지금 당장 마주치고 싶진 않았다.

어젯밤의 꿈이 생생한데다, 클로에는 여전히 유력한 용의자였다. 그녀를 보며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을 자신이 없었다.

“마님?”

“아니에요. 외출할 생각이니 마차를 준비해 주세요.”

“황실 마차를 준비할까요?”

“황실…… 마차요?”

나는 무슨 말이냐는 듯 집사에게 다시 되물었다.

“얼마 전 황태자 전하께서 마차를 부숴 놓으셨다고, 마님 앞으로 새로 마차를 보내 주셨습니다.”

“……아.”

정말로 마차를 변상해 준 거구나. 그렇다고 황실 마차를 그대로 보냈다니…… 그분도 참.

우선 황실 도서관에 가긴 가 봐야 할 것 같았다. 연회에 참석하려면 일단은 많은 정보가 필요했다.

황실 도서관도 사교계의 장이었으니, 황태자의 소개로 그 문을 연다면 몹시 수월하고도 유리할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그의 초대에 굳이 응하는 건, 단지 그 때문인 거다. 나는 다시 한번 감정을 다잡으며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

플라다가 보내 준 선물들이 이렇게 빨리 유용하게 쓰일 줄은 미처 몰랐다.

나는 저번에 황실 도서관 앞에서 봤던 장면을 떠올리며, 그녀가 준 것들로 제법 그럴듯하게 차려 입고 나올 수 있었다.

“나 괜찮니?”

“……그럼요, 너무 아름다우세요!”

이번에는 마차에 제니를 태우고 나왔다. 마침 제니가 갈 곳도 있다고 하고, 그녀가 내 차림도 점검해 줘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손거울을 내 얼굴 높이까지 들어 보이며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줬다.

“보세요, 제 말이 맞죠.”

“……으음.”

물론 에린 자체가 워낙 예쁜 편이긴 했지만, 며칠 앓아서 그런가 조금 초췌해진 것 같기도 하고, 그 나름대로 또 청초한 매력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이래저래 고민하기가 무색하게 금방 황실 도서관 앞에 도착하고 말았다. 황실 마차라 그런가, 이것도 마법 장치가 걸려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폴짝 먼저 뛰어내린 제니가 갑자기 그 자리에서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제니?”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밖으로 고개를 내밀다, 너무 눈이 부셔 그만 눈을 찌푸리고 말았다.

정오의 햇볕 아래에서 그보다 찬란하게 빛나는 누군가가 그곳에 나를 마중 나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하.”

내가 내리기도 전에 그는 역시나 손을 내밀어 주었다. 물끄러미 그 손을 보다 잡고 내려왔다.

“제국의 황태자를 뵙습니다.”

내 무릎 인사에 그는 정중하게 함께 고개를 숙였다. 그의 우아한 몸짓만으로도 이 길거리가 하나의 무도회장이 된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나는 오늘 그의 에스코트를 받는 레이디였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조금 우쭐해지는 기분은 어쩔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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