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네? 제가요?”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원래 이 제안은 클로에에게 하는 게 맞았다. 그런데 어쩌다 나에게 이런 제안이 왔지?
“아까 나간 클로에 양에게 하지 않으시고요?”
“물론 그 영애도 아름다워요. 소공작 부인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그 영애에게 부탁했겠죠. 하지만 지금 부인이 앞에 계신데, 그럴 필요가 뭐가 있겠어요.”
플라다는 마지막 말을 은근하게 속삭였다. 나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반쯤 벌린 채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호호호, 소리 높여 웃으며 다시 옷들을 정리했다.
내가 오지 않았다면 클로에에게 부탁했을 것이다. 그게 원작의 흐름이었다. 원작에서 에린은 이곳에 오지 않는다. 그래서 클로에에게 전속 제안이 간 것이다.
“믿어 보세요. 제가 부인을 사교계의 가장 화려한 꽃으로 만들어 드릴게요.”
플라다는 지금 글자로 봤던 익숙한 대사들을 내게 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손해 볼 일은 아니다.
이번 연회는 못 간다 해도, 아마 쭉 그럴 순 없을 것이다. 게다가 에린에게는 그만큼 옷이 없었고, 살 돈도 부족했다. 따라서 이 제안은 무조건 받아들여야 했다. 이번에는 내 쪽에서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잘…… 부탁드려요, 마담 플라다.”
“맡겨만 주세요.”
“그런데 혹시…… 이것도 명함 때문에?”
내 물음에 플라다는 고개를 저었다.
“물론 명함을 가져온 분이라는 건 제게 아주 중요한 분이라는 뜻이지만, 전속 제안은 그것과 상관없어요. 말했죠? 제가 전부터 부인을 쭉 보고 있었다고.”
“아…… 그래요.”
짐을 챙기는 플라다를 바라보다 문득 바라본 창밖은 꽤 어두워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집에 어떻게 가지? 내가 타고 나온 마차는 황태자의 마법에 의해 두 동강이 났다.
그런데 플라다는 내 짐을 들고 당연하게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잠깐, 최악의 경우 걸어가야 하는데, 저걸 들고 갈 순 없잖아.
“잠시만요, 플라다. 마차를 따로 불러야 해요.”
“응? 밖에 있는 마차가 부인이 타고 오신 거 아닌가요?”
“밖에…… 있는 마차요?”
나는 문을 열고 나가 보았다. 문밖에는 아까 황태자가 빌려줬던 작은 마차가 서 있었다.
마차를 보고 있자니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아까 에녹 옆에 앉아 있을 때 느꼈던 기분과 매우 흡사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탁, 하고 내쉬며 다시 들어왔다. 저 마차를 타야겠지. 지금은 돌아갈 방법이 없으니까.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플라다와 첼시가 마차 뒤쪽에 짐을 실었다. 아까 본 것보다 짐이 좀 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
“스승님, 깜짝 놀랐어요.”
에린이 간 후 안을 정리하던 첼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플라다는 뭔지 알 것 같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물어보았다.
“왜 놀랐는데?”
“소공작 부인께 전속 모델을 제안할 줄은 몰랐거든요. 그리고 그 많은 옷도 다 보내 주시고.”
“뭐, 어차피 주인 없이 쌓여 있던 아이들인데, 이 기회에 제 주인을 찾아가면 좋은 일이지.”
“그래도…….”
옷가지를 든 팔을 축 늘어뜨린 채 첼시는 아직도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갸웃거렸다.
“내가 이 일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영애와 부인들, 그리고 사랑받는 정부들을 봤는지 아니?”
“물론…… 저도 많이 봤고요.”
플라다는 마지막 옷을 걸어 놓고는 손을 탁탁 털어냈다.
“단순히 아름답기로만 따지면 그 정부인 베레지안 영애가 더 나을지도 몰라. 하지만 부인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말 기품이 넘쳐흘렀어. 내가 그린 이상적인 피사체야.”
“정말…… 그런 이유인가요?”
“물론 그것만은 아니지.”
플라다는 팔짱을 끼며 창가로 다가가 밖을 보았다. 정말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날씨였다.
“명함을 갖고 있는 사람이 소공작 부인이라니…… 앞으로 그분이 어떻게 나오실지 정말 궁금한걸.”
***
마차가 앞에 서고, 곧 제시와 집사가 마중 나왔다. 나는 그들에게 먼저 짐부터 들려 주고는 마부에게 말했다.
“데려다 줘서 고맙다. 자네 솜씨가 좋은 건지, 마차를 타고 오는 내내 흔들리지도 않더구나.”
“아, 이 마차에는 마법 장치가 부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보통 마차보다 빠르고 또 조용하지요.”
마법 장치라,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마차 같았는데 그런 게 달려 있었구나. 속으론 놀라웠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구나. 아무튼 황태자 전하께 꼭 감사하다고 전해 주렴.”
“예, 알겠습니다. 어휴, 어서 들어가십시오, 곧 비가 올 것 같습니다.”
마차가 출발한 후, 나는 정문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서자마자 나도 모르게 별채 쪽을 쳐다봤다.
역시나 별채 안쪽에는 환히 불이 켜져 있었다. 둘 다 저곳에 있겠지. 차라리 잘된 일이다. 머무는 곳이 분리되어 있어 자주 마주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정원 중앙을 가로질러 가는데 정말 비가 오기 시작했다. 후두둑, 비가 한두 방울씩 쏟아지더니 삽시간에 소나기가 되어 퍼붓기 시작했다.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거센 빗줄기에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채 쪽으로 뛰어갔다.
현관 앞까지 달려와 한숨 돌린 순간, 나는 누군가와 세게 부딪혀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아, 으…….”
누군가 싶어 고개를 드니 루퍼트였다. 그는 넘어진 나를 보며 당황한 표정을 지을 뿐, 일으켜 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는 것 같았다. 됐다, 무슨 기대를.
그렇게 생각하며 땅을 짚고 일어나는 틈에 그가 뒤늦게 손을 내밀었다. 정말 행동 한번 빠르네. 나는 옷과 손을 탈탈 털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런데 루퍼트는 그러고도 가지 않고 서성거리며,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곁눈질했다.
“안 가 보세요?”
그냥 내가 먼저 가려는데 갑자기 그가 나를 붙잡았다.
“잠깐.”
그러더니 자신의 겉옷을 벗어 내게 걸쳐 주었다.
“그 꼴로 돌아다니지 말고 곧장 방으로 들어가.”
루퍼트는 그 말만 남기고는 그대로 별채로 건너갔다. 본채와 별채를 잇는 길에는 지붕이 있어 비를 맞을 염려가 없었다.
“왜 저래.”
나는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안으로 들어섰다. 하녀장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늙은 집사가 계단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짐은 안에 들여 놓았……습니다, 마님.”
말을 하던 집사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이상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 수고했네.”
나는 그런 집사를 더 이상한 눈으로 훑어봤다. 그러자 그가 뜨끔하며 시선을 거뒀다. 뭐야, 정말.
비를 맞아서 그런지 점점 몸에 한기가 스며들었다. 나는 몸을 으스스 떨며 서둘러 방으로 들어갔다. 가자마자 목욕부터 해야겠다.
그리고 나는 방에 들어서서 거울을 보고서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플라다가 내게 입으라고 준 드레스는 비교적 얇은 흰색 천으로 되어 있었다.
그게 비에 흠뻑 젖으니, 몸의 실루엣이 그대로 다 드러났다. 그럼 루퍼트가 겉옷을 준 것도 그걸 다 보고…… 나는 뒤늦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다 아까 집사의 눈빛을 떠올리고는 돌연 불쾌함에 몸서리쳤다.
안 되겠어, 그 집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제 이 집에서 내보내야지.
나는 드레스 룸에서 옷을 정리하고 있던 제니를 불러 목욕물부터 받아 두게 했다.
따끈한 물에 목욕하고 나오니 못 보던 잠옷이 걸려 있었다. 핑크색 실크로 된 잠옷은 언뜻 봐도 새 옷인 게, 에린의 것이 아니었다.
“제니, 이건 내 것이 아닌 것 같은데.”
“아까 그 짐 안에 있던걸요? 마님의 옷이 아닌가요?”
“그래?”
제니의 말에 나는 가운을 걸치고 드레스 룸으로 건너갔다. 그러고 보니 가운도 어제의 것과 달라 보였다. 색도 더 은은했고 부들부들한 감촉이 느껴지는 게 훨씬 고급 재질인 것 같았다.
그렇게 드레스 룸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전보다 훨씬 많은 옷이 걸려 있었다.
플라다가 연습 삼아 만들었다는 평상복은 물론이거니와, 당장 티 파티나 외출용으로도 손색이 없을 것 같은 드레스들도 몇 벌 있었다.
그것들은 파티용 드레스처럼 화려한 것들은 아니었지만, 모두 플라다의 손길을 거친 것이라 그런지 고급스럽고 우아했다.
“이게 전부 그 짐 안에 있었다고?”
“네네, 보세요. 여기 장신구들도 있어요.”
제니는 신이 난 듯 서랍장을 열어 보였다. 그곳에는 많지는 않지만 액세서리들과 새것이 분명한 속옷들까지 함께였다.
잠그것들을 살펴보다 다시 집어넣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시대의 전속 모델에게는 이런 것까지 챙겨 주는 걸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보통은 연회나 티 파티 때 입는 드레스들을 한 디자이너의 것만 선택한다는 뜻이었다. 마담 플라다가 가장 유명하긴 했지만, 그녀 말고도 이 세계에 디자이너들은 많았다.
그들은 이름값을 높이고 싶어 했고, 그래서 때때로 높은 귀족 여인들에게 선을 대어 전속 모델로 모시곤 했다.
어쨌든 이런 것까지 챙겨 줬다는 건 플라다가 내 사정을 알아서일까, 아니면 정말 그저 입고 착용해 달라는 의미에서 준 걸까.
어느 쪽이든 민망하면서도 고마웠다.
내일 감사 편지라도 전달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곧 침실로 갔다. 집사는 돈을 받은 대로 침대와 가구 등을 바꿔 놓았다.
내 취향에 썩 맞는다고 할 순 없었지만, 내가 취향을 알려 준 적도 없고, 오래 있을 곳도 아니니 그냥 살기로 했다.
온종일 돌아다녀서인지 온몸이 찌뿌둥하고 무거웠다.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다 곧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런데, 나는 오늘 한 가지 실수를 하고 말았다.
귀족 아가씨의 몸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연약했다. 그깟 비를 잠시 맞은 것 때문에 나는 밤새도록 끙끙 앓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무섭고도 섬뜩한 꿈을 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