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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14)화 (14/129)

14화

“어차피 이 사람은 연회 같은 것을 좋아하지도 않을 뿐더러…….”

루퍼트는 급히 변명 같은 말들을 늘어놓았다. 평소에 늘 철면피를 깔고 당당하던 그가 웬일인지 흘끔흘끔 내 눈치를 봤다.

어떻게 할까.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사실 나는 아직까지 연회에 가기는 부담스러웠다.

이 세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다. 사교계 예법도 수박 겉핥기식으로만 알 뿐이었고, 누가 누구인지도 아직 익히지 못했다.

만일 에린이 알고 지내던 어떤 귀족이 내게 인사한다 해도, 못 알아볼 확률이 훨씬 컸다. 원작에서는 주요 인물들의 외모 묘사는 해 줬어도 스쳐 지나가는 조연들의 외모 묘사까지는 세밀하게 해 주지 않았다.

해 줬다 해도 아마 기억 못 하겠지만 말이다.

“그럼 할 수 없지요, 저는 못 가겠네요.”

“아이참, 아쉬워라, 부인. 모처럼 이렇게 잘 어울리는 드레스를 입으셨는데 연회에 한번 참석해 주셔야죠.”

“아…… 미안해요, 마담. 나 때문에 이번엔 드레스를 선보일 수 없겠네요.”

“그런 의미가 아니었어요, 부인. 미안해하지 마세요.”

에녹은 그런 나를 가만히 보며 뭔가 고민하듯이 한쪽 턱을 만지작거렸다. 클로에는 손을 모으고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며 가만히 있었다. 그렇지, 지금은 할 말이 없겠지.

그런데, 갑자기 루퍼트가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잠깐 얘기 좀 하지.”

“……알았으니 이건 좀 놔요.”

내가 불쾌한 표정으로 루퍼트를 올려다보자, 그는 바로 뿌리치듯 손목을 놨다. 어찌나 악력이 센지 잠깐 잡았을 뿐인데도 얼얼했다.

나는 뒤돌아 에녹에게 잠시 양해를 구했다.

“전하,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

그는 별다른 말이 없었지만, 딱히 허락을 구한 건 아니었기 때문에 루퍼트를 따라 이 층으로 올라갔다.

루퍼트는 이곳이 익숙해 보였다. 하긴, 공작 집안의 외동아들이었으니, 어머니 때부터 따라왔을 수도 있었겠다.

그는 이 층에 있는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

찰칵-

그리고 내가 따라 들어서자마자 문을 잠가 버렸다. 작은 창문이 있어 빛이 조금 들어오긴 했지만, 방 안은 어두운 편이었다. 괜한 긴장감에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왜…… 문을 잠그는 거예요?”

“그냥.”

“말해 봐요, 할 말이 뭔지.”

초대장에 관한 이야기를 하겠지.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진 일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양보 아닌 양보를 할 생각이니 결론적으론 그에게 나쁠 것이 없었다.

그는 나를 여기까지 데려와 놓고도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뭔가를 고민하고 망설이며 방 안을 서성거렸다.

“할 말이 없으면 나는 그만 내려갈게요.”

“잠깐만.”

내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그를 보자, 결국 루퍼트가 입을 열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조금 뜻밖이었다.

“이번 일은…… 미안하게 됐어.”

“……갑자기 왜 사과를 해요?”

“어쨌든 지금 내 부인은 너니까.”

나는 잠시 침묵했다. 물론 지금 그의 사과는 진심일 것이다. 하지만 단지 사과로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었다. 원작의 에린이라면 루퍼트를 좋아하니까 그의 미안하단 말이 의미 있을 수도 있겠지만, 나에겐 아니었다.

“그럼 루퍼트, 미안하다면…… 클로에 양에게 줬던 초대장을 내게 다시 줄 수 있나요?”

“……그건.”

대답하지 못하는 그에게서 나는 따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나는 더 할 말이 없는 것 같군요. 이만 내려가죠.”

“에린 스필렛.”

나는 그만 돌아 나가려 했으나 그가 갑자기 나를 돌려세우더니 벽으로 밀어붙였다. 나는 벽에 기댄 채 그의 팔 안에 갇히고야 말았다.

“왜 이렇게 변했지?”

하지만 불쾌할 틈도 없이 그가 내뱉은 질문에 그만 얼어 버렸다. 들킨 건가? 내가 에린이 아니라는 걸?

“예전엔 이렇지 않았잖아.”

“……내가 어떻게 변했는데요?”

모른 척 슬쩍 떠보았다.

그러자 루퍼트는 가두고 있던 팔 하나를 거두더니 내 눈 아래를 손으로 쓱 쓰다듬었다.

“이 눈빛, 나를 보는 눈빛이 달라. 왜 변한 거지?”

언뜻 들으면 사랑을 갈구하는 것처럼 들렸겠지만, 나는 루퍼트의 표정을 보고 알 수 있었다.

그건 사랑이라는 달콤한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소유욕과 단순한 호기심에서 나온 질문이었다.

나는 치솟는 짜증에 그의 손을 탁, 쳐내 버렸다.

“내 눈빛이 변했다면 그건 당신 탓이겠죠, 루퍼트.”

“우리가 이 거래를 할 때만 해도 당신은 다 알면서도 수용한다고 했어. 하지만 그때만 해도 이렇지 않았지.”

“내 마음을 뻔히 다 알면서 이 거래를 수용했다는 게 대단하네요. 그래요, 한때는 그랬죠. 하지만 마음은 변하는 거예요. 눈앞에서 정부를 들이고 나를 무시하는 걸 직접 보고 나니, 쉽게 마음이 정리되던걸요.”

나는 에린이 아니었지만,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듯 술술 말이 흘러나왔다. 이것과 상황이 완전히 같지는 않았지만, 나도 그랬으니까.

전 남친의 결혼식을 보고 나니 오히려 남아 있던 미련까지 모두 사라지고, 한 줌의 마음도 남지 않게 됐다.

“오히려 당신에겐 좋은 일 아닌가요? 이제 귀찮게 굴지 않을 테니 말이에요. 그렇다고 해서 계약상 변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에린 스필렛.”

“제 이름 그만 부르고 비켜 주세요, 루퍼트.”

나는 그를 가볍게 밀어내고는 문으로 걸어갔다. 걸쇠를 풀고 문을 나서려는데, 뒤쪽에서 루퍼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하다는 말은 진심이야.”

나는 작게 한숨을 쉬고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게 어쨌다는 건지 모르겠네요.”

그러고는 미련 없이 돌아서 방을 빠져나왔다. 천천히 걸어가다 보니 왠지 루퍼트의 심리를 알 것 같았다. 내 곁에 두긴 싫지만, 나를 좋아하는 감정은 변치 않았으면 하는 이기적인 마음이겠지.

입가에 비소가 머금어졌다. 그러려니 해도 될 법하지만…… 문득 아까 거울 속에서 나를 노려보던 클로에의 모습이 함께 떠올랐다.

뭔가 내 안에서 작은 악마가 꿈틀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은 채 차분히 일 층으로 걸어 내려갔다.

하지만 일 층에는 클로에만 남아 있을 뿐, 황태자는 보이지 않았다.

“전하는 어디 가셨어요?”

“마담 플라다께 뭔가 지시하시고는 먼저 일어나셨어요. 바쁜 일이 있으신가 보던데요.”

“아…….”

그렇게 보내 버리다니, 결국 그와의 약속은 제대로 지키지 못한 셈이 되었다. 다음에 만나면 꼭 사과를 전해야겠다.

“……두 분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궁금하네요.”

클로에가 조심스럽게 일어나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나는 자꾸만 약을 올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건 루퍼트에게 직접 물어보세요. 제가 해 줄 말은 없는 것 같네요.”

딱히 그녀를 질투하는 건 아니었다. 두 명 다 소설 속의 주인공이니, 잘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둘이 번갈아 가며 나를 건드리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그녀가 표정 관리에 성공했는지, 청순한 두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사과했다.

“미안해요, 부인. 괜한 것을 물었네요.”

그때, 루퍼트가 이 층에서 쿵쿵, 발소리를 내며 내려왔다.

“클로에, 이번 연회에서는 그 드레스를 입을 거야?”

“네, 루퍼트. 마담이 추천해 줬으니 이게 최선인 것 같아요.”

클로에가 일어나자 플라다가 다가와 그녀의 치수를 재기 시작했다.

“뒤쪽 허리에는 리본을 달고, 앞에는 비즈로 장식할 거예요.”

드레스 여기저기에 핀을 꽂고 표시한 후에, 플라다는 그녀를 다시 탈의실로 안내했다.

클로에는 뭔가 다시 기분이 좋아진 것처럼 보였다. 그게 초대장과 연관된 게 아닌가, 라는 추측을 하다 보니 반대로 내 기분은 급격히 나빠졌다.

“집으로 갈 거지?”

“난 더 볼일이 있으니 둘이 먼저 가세요.”

나는 루퍼트의 시선을 외면하며 말했다. 클로에는 옷을 갈아입고 나오며 들었는지, 그에게 붙어 팔짱을 꼈다.

“어머, 부인. 날이 곧 흐려질 것 같은데…… 어떻게 오시려고요.”

클로에와 눈이 마주치자, 루퍼트의 눈빛이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렸다. 얼씨구, 좋아 죽네.

“괜찮으니 먼저 가세요.”

“정 그러시다면…… 조심히 오세요.”

그렇게 찰싹 붙어 사라지는 둘을 보며 나는 잠시 이마를 짚었다. 플라다가 내게 조용히 다가와 마찬가지로 시침 핀을 뽑았다.

“……엇, 저는 괜찮아요.”

“혹시 모르니까요. 그리고 저도 이 드레스를 슬슬 완성하고 싶어요.”

“아…… 그런데, 드레스값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예쁘기는 너무 예뻤지만, 아마 그만큼 가격도 비쌀 것이다.

“괜찮아요, 부인. 그냥 만들어 드릴게요.”

“네?”

“명함을 가져온 분이니까요.”

“아까도 말했지만…… 단지 그 이유로 지금 제게 드레스를 만들어 준다고요?”

플라다는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직도 그분이 누군지는 말씀 못해 주시는 거죠?”

“그분이 직접 밝히기 전까지는요.”

“…….”

내가 말없이 바라보자, 플라다는 눈매를 접어 웃어 보였다. 그녀가 밝히고 싶지 않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이제 다 됐어요. 아, 그렇지. 잠시만요.”

나를 탈의실로 데리고 갈 줄 알았는데, 그녀는 갑자기 이 층으로 올라갔다. 대신 첼시가 나를 탈의실로 이끌어 드레스 벗는 것을 도와 주었다.

그러던 중, 커튼 안으로 손이 하나 쑥 들어왔다.

“부인, 이걸로 갈아입으세요. 제가 만든 일상용 드레스예요. 아마 잘 맞을 거예요.”

“네? 제가 입고 온 옷은요?”

“너무 낡아서 버렸어요.”

마담 플라다는 웃으면서 남의 옷을 버렸다는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리고 나 역시 내 옷을 버렸다는데도, 크게 기분 나쁘지 않았다.

플라다 같은 사람이 보기에는 확실히 내 옷이 걸레짝으로 보였겠지.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플라다는 소파 위에 걸쳐진 여러 옷을 보여 주며 말했다.

“이것들도 싹 다 가져가세요. 제가 연습 삼아 만든 옷들인데, 부인께서 입어 주면 기쁠 거예요.”

“……아, 저기.”

“아, 연습 삼아 만들었다고 해도 모두 완성도 높은 작품들이에요.”

“그게 문제가 아니라요, 이것들을 그냥 주신다고요?”

플라다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 옷들을 차곡차곡 커다란 종이 가방에 넣어 주었다.

“잠시만요, 그렇게 막 받을 수는 없어요.”

내가 다급하게 그녀를 말리자, 플라다는 허리를 펴며 내게 말했다.

“부탁드려요, 부인.”

갑자기 부탁이란 단어를 꺼내며 나에게 가까이 다가온 그녀는 내 양손을 모아 잡았다.

“제 옷의 전속 모델이 되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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