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13)화 (13/129)

13화

“스필렛 백작, 조금 늦었습니다.”

에녹의 말에 나보다 먼저 반응한 건 루퍼트였다.

그는 일어나면서 나를 보고 물었다.

“전하와 이곳에서 만나기로 했나?”

“그게…….”

내가 대답하려는데 에녹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래. 아까 밖에서 우연히 만나, 나와 이곳에서 보기로 약조를 했지. 내가 한 가지 부탁을 드렸다네.”

루퍼트의 미간에 미세하게 주름이 졌다. 그는 흡사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내게 말했다.

“납치를 당했다는 건, 그럼.”

“사실이에요.”

“내가 구해 드렸네, 루퍼트.”

“……전하께서 말입니까?”

루퍼트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와 에녹을 번갈아 보다, 결국 한숨 쉬듯 중얼거렸다.

“이 사람이 전하께 또 폐를 끼쳤군요.”

“……자네 말은 틀렸어.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하는 건 당연해. 그리고 범인은 자네 집안의 호위 기사였네.”

“그건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걸 아는 사람이…… 흠, 클리포드 가문의 기강이 전보다 많이 흐트러진 것 같군.”

에녹은 무심한 어조로 중얼거리며 루퍼트를 지나쳐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루퍼트는 자존심이 상한 듯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나를 본 에녹의 눈가가 부드럽게 휘었다. 그의 에메랄드빛 눈동자 색이 흡사 내 드레스 색과 같아 보였다.

“아름답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드레스죠? 마담 플라다의 명성은 전부터 들었지만, 이렇게 직접 보니 정말 대단하네요.”

그 명성은 소설 속에서 본 것이었지만, 어쨌든 직접 눈으로 보니 감탄이 나오는 건 사실이었다.

다른 드레스들과 비교해 보진 않아서 모르겠지만, 디테일부터가 보통 솜씨가 아니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클로에가 내 드레스를 훑어보며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런데…… 내게 무슨 할 말이 있나요?”

“그냥 조금…… 부러워서요.”

나는 내가 입은 드레스 치맛자락을 가리키며 클로에에게 말했다.

“입어 보고 싶나요?”

클로에는 말없이 바라보는 것으로 긍정했고, 나는 싱긋 웃으며 거절했다.

“하지만 어쩌죠, 마담 플라다께서는 이 드레스의 주인을 나로 여기시는 것 같은데…… 아닌가요?”

내가 플라다를 향해 묻자, 플라다는 클로에를 찬찬히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내 말에 동의해 주었다.

“이 드레스는 더할 나위 없이 부인께 잘 어울리는 것 같네요. 영애께는…… 다른 드레스를 추천해 드릴게요.”

플라다는 정말 자신의 안목으로 판단하여 말한 것이겠지만, 듣는 클로에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순간 표정을 굳힌 클로에는 이내 애써 다시 웃어 보였다.

“알겠습니다. 부인께 더 잘 어울린다니 어쩔 수 없죠.”

클로에는 마치 루퍼트가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렸지만, 그는 정말 못 들은 건지, 못 들은 척하는 건지 딴청을 피웠다. 그러면서 흘끔흘끔 나를 쳐다봤다.

루퍼트가 딱히 도와줄 것 같지 않자, 결국 클로에는 플라다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제게 어울리는 드레스를 추천해 주시겠어요?”

“음, 가만있어 보자…….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플라다가 잠시 사라지고, 넷과 첼시가 남은 자리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에녹이 제일 먼저 별다른 기색 없이 소파 위에 편히 기대앉았다. 그가 앉는 것을 보고는 나도 그 옆에 따라 앉았다.

“더 볼일이 없으면 당신은 그만 가지 그래?”

앉아 있는 둘을 보던 루퍼트는 갑자기 뜬금없이 나를 먼저 보내려 했다.

“그럴 순 없네, 루퍼트. 내가 부인께 부탁을 드린 일이 있다고 분명 말했을 텐데.”

당연히 갈 생각이 없었지만, 이번에도 에녹이 대신 말해 주길래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뜻밖의 인물이 나서 주었다.

“루퍼트, 저는 부인이 남아서 제가 입은 드레스를 좀 봐 주셨으면 해요. 당신은 그런 것을 전혀 볼 줄 모르잖아요.”

“클로에.”

하지만 루퍼트는 여전히 불편해 보였다. 그러는 사이 다행히 플라다가 이 층에서 내려와 어색한 공기를 완화시켰다.

“어휴, 내 정신 좀 봐, 첼시. 귀한 손님들이 여럿 오셨는데 차라도 좀 내오지 그랬어.”

첼시가 자리를 뜨려 하자 플라다가 급하게 다시 그녀를 말렸다.

“아니, 아니야. 차는 내가 준비할게. 여기 이 드레스를 입을 수 있게 도와드리렴.”

플라다가 첼시에게 드레스를 건네주고, 첼시가 클로에를 탈의실로 안내했다. 한쪽에서 직접 찻잔을 준비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의아함에 물어보았다.

“그런데 사람을 더 고용하진 않으셨나 봐요?”

“아아, 보안이 중요하니까요. 어차피 많은 손님을 받는 건 아니기 때문에 둘로도 충분해요.”

플라다는 뒤를 돌아보며 대답하더니, 병뚜껑을 열다 갑자기 난색을 표했다.

“찻잎이 다 떨어졌네, 잠시만요!”

“저, 괜찮…….”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플라다는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감당할 수 없는 어색함을 느꼈다. 지금 내 양쪽에 이 소설 속 남주와 서브 남주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정말 이 상황, 괜찮은 걸까?

조금 불안했지만, 스스로를 다독이며 진정시켰다. 나는 지금 이곳에 앉아 있을 자격이 충분했다. 누가 해 준 것인지 모를 후원으로 명함을 받은 귀빈이었고, 황태자가 같이 있어 주기를 청했으며, 여기 있는 소공작의 부인이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했더니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 내내 조용하던 에녹이 입을 열었다.

“백작, 생각해 봤는데…….”

“네, 전하. 말씀하세요.”

“브로치가 좋을 것 같은데, 백작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아, 황후 폐하의 선물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글쎄요, 브로치도 좋고, 아니면 펜던트도 좋을 것 같고요.”

“펜던트라. 그것도 괜찮겠군요.”

에녹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있다, 문득 뒤통수가 따가워 고개를 돌려 보니 루퍼트가 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요?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요?”

아까 클로에는 드레스 때문에 나를 쳐다봤다 쳐도, 루퍼트가 설마…….

“아니, 아무것도.”

그는 자신의 뺨을 손으로 문지르며 휙 고개를 돌려 버렸다. 정말 왜 저러는 거람.

내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탈의실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치마 드시고 조심해서 나가세요.”

커튼이 열리고 클로에가 탈의실 안쪽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마침 플라다도 찻잎과 티 포트를 들고 내려와 클로에를 봤다.

나는 황금빛의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클로에를 보며 솔직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여주인공은 여주인공이었다. 탄력 있는 갈색 웨이브 머리가 깊이 파인 등 라인 위에서 흔들거렸고, 황금빛 드레스와 잘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었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오렌지색 눈동자와 금빛 드레스가 너무나 잘 어울렸다.

과연 마담 프라다의 안목은 무시할 수가 없었다.

에린은 화려한 미인이었다. 따라서 우아한 맛이 있는 지금의 내 드레스가 어울렸고, 반대로 클로에는 청순한 미인이어서 눈에 띄는 화려한 드레스를 골라 준 것 같았다.

“어떤가요?”

“정말…… 대단해요.”

클로에도 스스로 만족했는지 연신 거울을 보고 있었다. 그러자 루퍼트가 일어나 다가가더니 클로에의 귓가에 무어라고 속삭였다.

플라다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다가가 클로에를 칭찬하고 있었다.

나는 무심한 시선으로 그들을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에녹이 말을 걸었다.

“사파이어와 루비 중에 고민하고 있습니다. 혹 백작은 어떤 걸 더 선호하시는지요?”

“어…… 저는 다이아몬드요?”

그저 가볍게 던진 말에 진지하게 고민하는 에녹을 보며, 나는 재빨리 수습하기 위해 말을 이어 나갔다.

“흠흠, 농담이고요, 사파이어나 루비도 좋지만 혹 황후 폐하의 연세에는 원색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으니…… 진주는 어떠신가요?”

“진주라.”

에녹이 입가에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늘 그렇듯 정적이면서도 움직이는 동작 하나하나가 그림 같았다. 그래서인지 그에게서 눈을 떼고 싶지가 않았다. 조금만 더…….

그리고 그렇게 느낀 나 자신에게 흠칫 놀라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스필렛 백작?”

“아…… 그게, 그러니까.”

이러면 안 되는데, 틀림없이 이상해 보일 텐데. 하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조금씩 뒷걸음질을 쳤다.

“잊은 게 있어서…….”

그때, 내 등 뒤를 사뿐하게 지나가는 금빛 물결을 봤다. 클로에가 다가와 황태자 에녹 앞에서 사뿐히 무릎을 굽혔다.

“황태자 전하, 베레지안 남작 영애 다시 인사드립니다. 실례지만 여기 계시니 한 가지 여쭙고 싶습니다. 제가 황궁 연회가 처음인지라, 혹 황후 폐하 탄신일 연회에 제 차림이 누가 되진 않을는지요?”

나는 멀뚱히 서서 그녀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굳이 에녹에게 그걸 묻는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다 보니 왠지 알 것 같았다. 수줍게 내리깐 속눈썹과 발그레한 뺨, 촉촉하게 반짝거리는 입술이라든가, 양손 검지를 마주 닿게 해 비비적거리는 것들.

그 모든 몸짓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클로에는 에녹의 호감을 사려 하고 있었다.

“……드레스는 충분히 아름답군요. 별문제 없습니다.”

“정말이신가요? 감사합니다, 전하.”

클로에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면서도 그 특유의 상큼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참 사랑스러워 보이는데, 왜 이렇게 내 속은 불편한 거지.

에녹은 플라다가 가져온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하지만, 베레지안 남작 영애라…… 직접 초대장을 받진 않았을 것 같은데.”

에녹은 루퍼트 쪽을 차갑게 응시했다.

그가 그런 말을 하는 건 당연했다.

황궁 연회는 보통 일정 작위 이상의 귀족만이 초대장을 받았다. 대게는 백작 가문까지였고, 아주 큰 연회일 때는 자작 가문까지도 초대장이 돌아가곤 했다.

물론 초대장을 받은 이가 자신이 가지 못할 때에는 받지 못한 사람에게 선심 쓰듯 양도하거나, 매매할 때도 있었다.

클로에에게 초대장을 준 사람은, 지금으로선 루퍼트가 가장 유력했다. 본인 것을 주진 않았을 테고, 설마 내 것을 줬다는 건가?

나는 눈을 부릅뜨고 루퍼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가 눈에 띄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