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그녀는 들고 있던 명함으로 입을 가리며 즐거운 듯이 웃었다.
“제 생명의 은인, 정도라고 해 두죠.”
플라다의 생명의 은인은 궁금하지 않지만, 나에게 명함을 보낸 발신인은 궁금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래도 밝힐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제가 누군지 아시나요?”
“그럼요. 스필렛 백작, 아니, 클리포드 소공작 부인이시잖아요.”
정확히 맞췄다. 당연한 건가?
나는 에린의 이전 행적을 잘 알지 못했지만, 뭐 오며 가며 얼굴을 익혔을 수도 있겠지.
“예전부터 눈여겨봤어요. 하지만 영 찾아 주질 않으시더라고요.”
“저를 눈여겨보셨다고요?”
마담 플라다는 내 손목을 가볍게 잡아 커다란 거울 앞으로 데려갔다. 그러고는 내 머리카락 끝을 가볍게 터치했다.
“이 예쁜 머리 색깔, 반짝이는 눈, 오뚝한 코, 하얀 피부에 완벽한 비율의 몸매까지. 이런 피사체는 수도를 다 뒤져 봐도 드물죠.”
확실히 내가 봐도 에린은 예뻤다. 나는 소설 속 인물들은 다 예쁘고 잘생겼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대부분은 머리 색이나 눈동자 색만 좀 특이했지, 다들 평범했다.
따라서 조금 예쁘장한 정도가 아니라 정말 피사체로서 완벽한 조건을 갖춘 사람을 찾자면, 에린과 클로에 정도였다.
원작에서 마담 플라다는 클로에를 보자마자 찬사를 늘어놓는다. 그리고 돈도 받지 않고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뽐내 드레스를 입히고, 클로에는 그 드레스 덕분에 단번에 사교계 샛별이 된다.
그전까지 플라다는 클로에를 모른다는 설정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에린을 전부터 이미 눈여겨봤다고 했다. 그런데 왜 소설에서는 플라다와 에린 사이에 접점이 전혀 나오지 않았을까.
“부인께서 명함을 들고 와서 정말 기쁘네요.”
“……고마워요.”
내 몸은 아니었지만, 칭찬에 몸 둘 바를 몰라 시선을 아래로 뒀다. 플라다는 싱긋 웃은 후, 마네킹에 걸린 옷을 걷어 펼치며 나에게 대어 보았다.
“이건 완성본이 아니에요. 주인을 찾아야 완성할 수 있거든요. 꽤 오랫동안 안 나타났는데, 오늘 찾았네요.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웨딩드레스만 반납하고 가려 했는데, 일이 커져 버렸다. 하지만 옷을 직접 대보니, 에린에게 정말 잘 어울렸다.
내가 대답을 머뭇거리자 마담 플라다는 한쪽에 조용히 있던 조수를 불렀다.
“첼시, 가서 입는 것 좀 도와드리렴.”
“네, 스승님.”
나는 결국 첼시와 함께 거의 떠밀리다시피 커튼 안쪽 탈의실로 들어와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면서 문득, 어쩌면 원작에서의 클로에만큼은 아니더라도 마담 플라다에게 드레스를 한두 벌 정도는 협찬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드레스는 상당히 비싼 품목이었기 때문에 이런 은근한 기대가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허리는 많이 조이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팔을 좀 들어 보세요. 네, 그렇게.”
첼시가 뒤에서 드레스의 끈을 단단히 묶으며 매무새를 가다듬어 주었다.
“다 되었어요. 와, 정말 기대되네요.”
첼시가 호들갑을 떨며 커튼을 열어젖혔다. 그대로 막 나가려는데, 입구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어…….”
나는 그들을 보며 잠시 당황했다. 이미 갔을 거라 생각했는데, 왜 이 시간에 온 거지?
루퍼트와 클로에가 나란히 팔짱을 낀 채 걸어 들어와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그들 역시 당황한 건 마찬가지인 듯,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 정적을 깬 건 바로 마담 플라다였다.
“어머나, 세상에! 어서, 어서 와서 거울 좀 보세요.”
그녀가 나를 이끌어 다시 거울 앞에 세웠다. 은은한 녹색이 촌스럽게 보일까 걱정했는데,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역시 패션의 완성은 얼굴과 몸매다. 장밋빛 머리카락과 연둣빛 드레스는 너무나 잘 어울려 마치 나 자신이 장미꽃이 된 것만 같았다.
마담 플라다는 나를 흐뭇하게 보고 있다, 뒤늦게서야 루퍼트를 발견하고는 반갑게 인사했다.
“아, 클리포드 소공작님도 오셨네요!”
플라다는 그에게 다가가 나에게로 잡아끌었다. 루퍼트는 멍하니 나를 보며 그대로 끌려왔고, 클로에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소공작님이 보시기엔 어떠세요, 너무 아름답지 않나요?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부인을 얻으시다니, 소공작님은 정말 행운을 타고나셨네요!”
플라다는 뒤에 그의 연인 클로에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전혀 개의치 않고 나를 추켜세웠다. 나는 일부러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이면서도 계속해서 거울을 봤다. 역시 예쁘니까 거울 볼 맛이 난다.
그러다 나는 거울에 비친 클로에의 모습을 우연히 발견하고는, 입가에 웃음을 거둬들였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생각한 건지, 그녀는 평소와 달리 얼굴에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나저나 플라다가 저렇게 나와 버리면 클로에와의 전속 계약은 어찌 되는 걸까. 원작이랑 달라지는 건가?
루퍼트는 내 옆까지 와서도 입만 벙긋거리며 뭐라 말을 하지 못했다. 슬슬 짜증이 난 내가 그에게 뭐라 말하려던 차에, 그가 입을 열었다.
“……잘 어울리는군.”
나는 들어 놓고도 뭔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 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팠다. 그런 나를 보던 루퍼트는 고개를 휙 돌려 시선을 피한 채로 내게 물었다.
“여긴 왜 온 거지?”
“웨딩드레스를 반납하러 왔어요.”
“반납을 했으면 돌아가야지, 여기서 왜 이러고 있어.”
그 말에 갑자기 화가 울컥 솟구쳤다. 자기는 정부를 끼고 드나드는 주제에 나는 여기 오면 안 된다는 건가?
“루퍼트, 너무 그러지 말아요. 그녀도 여자인걸요.”
내내 지켜보다 다가온 클로에가 다시 루퍼트에게 팔짱을 꼈다.
“밖에서 보니 또 다르네요. 반가워요, 부인.”
클로에는 생긋 웃으며 인사했지만, 나는 이미 바로 이전에 거울로 그녀가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 걸 보고 말았다.
그래, 넌 정말 루퍼트를 사랑하는구나. 그걸 깨닫고 나니 왠지 오기가 발동했다.
“루퍼트.”
나는 평소보다 부드럽게 그를 불렀다. 루퍼트가 조금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처연한 표정으로 발밑을 보며, 최대한 눈물을 긁어모았다.
“나…… 사실, 여기 오기 전에 납치당할 뻔했어요. 알고 있나요?”
“뭐라고? 감히 누가, 어째서!”
눈을 크게 뜬 루퍼트가 클로에를 옆에 단 채 나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피터라고 하는 호위 기사가 범인이었어요…… 흑.”
“피터? 새로 온 기사인가?”
루퍼트의 얼굴이 점점 사납게 굳어 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루퍼트가 당장 에린을 진심으로 걱정한다든지 그런 것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엄연히 소공작 부인이었고, 나를 납치하는 건 그에 대한 도전이었다.
나는 그 부분을 파고들며 더욱더 연기에 몰두했다. 생각해 보니 억울하고 분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 눈물이 참 잘도 흘렀다.
“마차에 탄 채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부인, 설마 그곳에서 몹쓸 일을 당하신 건…… 아아, 아니에요. 울지 마세요, 부인 잘못이 아니에요.”
그런데 갑자기 클로에가 이상한 방향으로 화제를 틀며 나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니라면 이렇게 여린 몸으로 어떻게 그 험악한 곳을 빠져나온 거죠? 괴한은 한둘이 아니었을 텐데.”
“그야…….”
황태자의 도움을 받았다고 말하려다, 잠깐 멈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는 복면을 쓰고 있었고, 그것은 그곳에 갔다는 걸 들키지 않고 싶다는 뜻이었다. 도움까지 받아 놓고 그의 일을 그르칠 순 없었다.
“부인, 힘들면 말 안 해도 돼요. 아아, 얼마나 무서웠을까…….”
덩달아 클로에의 오렌지빛 눈동자에도 눈물이 글썽이기 시작했다.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건 분명한 악의를 담고 있었다.
……정말, 안 되겠네.
나는 심호흡을 하며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정말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저는 아무 일 없이 무사히 빠져나왔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하지만, 그게 말이 되나요? 거기가 얼마나 험악하고 외진 곳인데……. 게다가 그 많은 사람을 뚫고.”
나는 대꾸하려다 뭔가를 깨닫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가 거기가 어디라고 말했던가? 그리고 피터의 짓이라고만 말했지, 여러 명이라고 말한 적도 없었다.
설마.
나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말을 아꼈다. 그녀를 빤히, 그리고 찬찬히 바라봤다.
청순하고 가녀린 외모, 동정심을 자극하는 촉촉한 눈빛, 나긋한 몸짓과 목소리. 천상 여주인공다운 그녀였다.
하지만 원작은 정말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을 묘사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만해, 클로에. 아무 일 없었다잖아. 공개적인 장소에서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곤란해.”
내가 입을 딱 다물고 있는데, 갑자기 루퍼트가 끼어들어 그녀를 나무랐다. 클로에는 조금 놀란 것처럼 그를 보면서도 평소의 그녀답게 순순히 수긍하는 듯했다.
“알았어요, 내가 신중하지 못했네요. 미안해요.”
나는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는 클로에의 정수리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클로에가 원작에서 묘사된 것과 꽤 다른 성격을 가졌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정말 의외였다.
여기서 내가 알아낸 사실을 짚고 넘어간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아무도 믿지 않겠지. 뭔가 확실한 증거를 잡을 때까지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만일 정말 클로에가 꾸민 짓이라면, 이건 정말 보통 일이 아니었다.
“자, 그런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도록 하죠. 이렇게 아름다운 레이디 앞에서는 그저 찬사만 늘어놔도 입이 모자란걸요.”
조용히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마담 플라다가 박수를 치며 무거운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두 분은 어떻게 오셨나요?”
플라다가 여전히 밝은 목소리로 루퍼트를 향해 물었다.
“아, 우리는 황후 폐하의 탄신일 축하 연회에 입을 드레스를 맞추러 왔어요.”
또 클로에가 대답했다. 이미 둘은 아는 사이였구나. 그녀의 목소리만 들어도 감정이 요동쳤지만, 최대한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다.
클로에가 나에게 악의를 가지고 있다. 그것도 아주 깊고 커다란 악의였다. 증거는 없지만, 나는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일 년이라는 시간을 죽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에린이 이혼당했던 건 혹시 클로에의 계략에 걸려든 게 아니었을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결국 도달한 결론은 하나였다. 지금은 원작이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결코 그렇게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문이 열리며 또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
그를 보자마자 마담 플라다가 무릎을 굽혔고, 루퍼트도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며 한쪽 다리를 접어 그에게 예를 표했다.
클로에도 나긋하고 우아한 목소리로 그에게 인사를 올렸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에녹은 거기에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넷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