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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11)화 (11/129)

11화

“딱히 실례라기보단…… 마차를 함께 탈 수 있겠냐고 물으시길래 죄송하지만 거절했어요. 여러 가지로 좀…….”

“잘하셨습니다.”

에메랄드빛 눈가가 싱그럽게 빛나며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정말 괜히 서브 남주가 아니다.

그가 웃는 것만으로 어둡고 삭막했던 골목에 한 줄기 빛이 비치는 것 같았다.

“아, 맞다. 잠시만요.”

나는 마차로 달려가 마담 플라다에 돌려줄 웨딩드레스 꾸러미를 짊어지고 나왔다. 그러자 에녹이 성큼 다가와 덥석 받아 들더니 말 등에 고정시켰다.

“자, 그럼 스필렛 백작, 말 위로 오르시지요.”

당연하다는 듯이 내민 손을 얼떨결에 잡아 버렸다. 전생에 말이라고는 생전 타본 적도 없었는데, 내가 탈 수 있을까.

그의 손을 잡고 발걸이에 발을 걸치자, 별로 힘도 들이지 않고 그가 나를 아래에서 위로 받쳐 올려 주었다.

올라탔는데,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중심을 잡았다. 아마도 에린의 몸이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전하는 어쩌시려고요.”

“레이디를 모셔야지요.”

“저, 하지만…….”

그는 그대로 말고삐를 쥐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함께 타자고 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렇게 가까이 붙어 버리면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를 그에게 들킬 것만 같았다. 이건, 말이 생각보다 높아서, 그래서 무서워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무려 황태자가 끌어 주는 말 위에 올라타고 있다. 에녹이 타인에게 친절한 편이긴 해도, 엄연히 이 나라에서 매우 존귀하고 높은 신분이었다.

그런 그를 이렇게 말고삐나 잡고 가게 해도 되는 걸까?

“전하.”

“예, 스필렛 백작. 말씀하세요.”

“저…… 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이미 상황은 벌어졌고, 나는 여전히 말 위에 있었다. 나는 미안해하거나 걱정하는 대신 감사 인사를 전했다.

에녹에게서 당연히 그에 답하는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뜬금없이 그는 내 안부를 물었다.

“공작가에서의 생활은 할 만하십니까.”

“음, 겨우 하루 지났는걸요.”

나는 애매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올려다보는 에메랄드빛 눈동자에서 시선을 조금 돌렸다. 그 눈을 보고 있으면 왠지 숨기고 싶은 것까지 모두 꿰뚫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오래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하룻밤 사이에도 많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뭔가 의미심장한 말에 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뭔가 아는 건가?

내가 잘못한 건 전혀 없지만, 클로에가 그 집에 있었고 결혼 첫날밤부터 내 남편이 그 여자랑 함께 있었다는 걸 굳이 알리고 싶진 않았다.

“지난밤 북부 지방이 몬스터 떼의 습격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는군요. 그 일로 아마 곧 개체 수를 조절하기 위해서 사냥 대회를 열 겁니다.”

“아, 몬스터…… 떼요.”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대답에 놀라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이 세계가 정말 다른 세상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몬스터 떼라니.

정말 소설 속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를 바로 앞에서 듣고 있자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백작, 스필렛 백작.”

“아, 네? 전하.”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세요. 안 그러면 다칩니다.”

“아…… 네.”

“피곤하신 것 같으니, 부탁은 그럼 다음에 드리는 거로…….”

에녹이 뭔가를 말했는데 내가 못 들은 모양이었다. 나는 재빨리 사과했다.

“부탁이요? 말씀해 보세요. 제가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갚을 기회를 주셔야죠.”

“황후 폐하의 탄신일을 기념하여 따로 선물을 마련하고 싶은데, 혹 백작의 고견을 들을 수 있을는지요.”

“어디로 가시는데요?”

“요새 수도의 레이디들 사이에서 인기라는 마담 플라다입니다.”

나는 에녹의 대답에 조금 놀라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곳의 이름이 유난히 많이 거론되는 건 과연 우연일까?

그럴 리가 없다. 혹시 원작의 무대가 지금 그곳이기 때문일까. 머지않아 펼쳐질 이야기 속에서는 그 마담 플라다에 두 주인공이 등장한 후에, 잠시지만 황태자도 뒤이어 등장하게 된다.

그 개연성이 ‘황후의 생일 선물’이었나. 하지만 에녹은 전혀 다른 곳에서 나와 만나 마담 플라다로 가고 있었다.

내가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에 에녹은 재촉하지 않고 묵묵히 기다렸다. 어차피 말 등에는 그곳에 돌려줘야 할 웨딩드레스가 실려 있었다. 이것 역시 내가 그곳으로 가게 만드는 개연성이다.

마담 플라다에 에린이 등장했던가?

기억을 되새기려 하도 머리를 써서 그런지 약간 어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일단은 원작과 상관없이 상황에 맞게 대답하기로 했다.

“제 식견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오나, 저도 그곳에 들를 일이 있으니 그렇게 할게요.”

어차피 서점에 가기는 글렀으므로, 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영광입니다, 스필렛 백작.”

한동안 가다 보니 어느새 뒷골목에서 벗어나 진짜 번화가로 왔다. 나는 그제야 당황했다. 사람들이 많았는데도, 황태자는 복면을 벗고 온통 시커먼 옷을 입은 채 웬 여자를 말에 태우고 가고 있었다.

딱 봐도 이상한 상황인 걸 모두가 눈치챌 것 같았다.

“전하, 사람들이…… 저 이만 내려야겠어요.”

에녹은 내 생각을 눈치챘는지 바로 수긍했다.

“알겠습니다.”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는 게 조금 더 무서웠던 것 같다.

내가 훌쩍 뛰어내리자, 다치지 않도록 에녹이 적당히 받아 주었다. 처음 마차를 태워 줬을 때 느꼈던 그의 잔잔하고 묵직한 체취가 잠시 코끝에 스쳤다.

“마담 플라다는 이곳에서 두 블록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저 마차를 타고 먼저 가세요.”

그가 가리키는 길가에 작은 마차 한 대가 있었다. 황태자가 타고 왔다 생각하기에는 너무 작고 초라했다.

나는 의문 섞인 눈빛을 보내다 문득 깨달았다. 복장이며 얼굴까지 가리고 있었으니 마차도 바꿔 타고 오는 게 당연했다.

“전하는 어떻게 오시려고요?”

“먼저 가 계시면 후에 따라가겠습니다.”

아마도 그는 아직 이곳에 처리할 일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더 채근하지 않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거기까지 혼자 말을 타고 갈 수도, 걸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마차에 올라 뒤를 돌아보니, 에녹은 어느새 바람처럼 달려가 사라져 버렸다.

“황태자도 나름 바쁘구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창밖으로 번화가의 상점들을 구경했다. 이곳의 복식이 화려하기 때문인지, 언뜻 보기에는 전에 살던 곳보다 이곳이 더 휘황찬란해 보였다.

“천 골드로 뭘 얼마나 살 수 있는 거지.”

일단은 돈을 좀 써야 할 것 같다. 알맹이는 귀부인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신분상 귀부인의 구색이라도 갖춰 놔야지.

작은 마차는 보기와는 달리 매우 빨랐다. 그뿐만 아니라 그렇게 빠른 속도에도 별로 흔들리지 않고 안락했다.

“도착했습니다, 부인.”

마부가 문을 열어 주었고, 나는 천천히 내려와 마담 플라다 앞에 섰다.

과연 예상대로 이 주변에서 가장 화려하게 장식된 건물이었다. 문 앞에는 덩치 큰 장정 둘이 서서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답지 않게 주눅이 들었다.

마치 땡전 한 푼 없이 명품 매장에 들어서는 것 같은, 딱 그런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보자 함께 오지 않은 황태자의 뜻을 알 것 같았다.

부부가 아닌 듯한 남녀 한 쌍이 눈길을 주고받으며 걸어 나갔다. 그들이 부부가 아닌 것 같다고 추측했던 이유는, 두 사람의 나이 때문이었다. 중년의 여성과 미청년이 과도하게 붙어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손에 꾸러미를 든 채 문 앞으로 걸어갔다. 언뜻 보면 하녀와 별다를 게 없어 보일 것이다.

아무 거리낌 없이 통과한 그들과 달리, 예상대로 문을 지키는 자들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들은 딱딱하고 무서운 표정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웨딩드레스를 반납하러 왔습니다.”

나는 꾸러미와 함께 챙겨 왔던 명함을 그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들은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갑자기 당황하기 시작했다.

“잠시만,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왜 그러는 거지?

장정 하나가 내가 들고 있던 꾸러미를 얼른 받아 들어 사라졌고, 다른 하나는 갑자기 정중한 태도로 나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입구에서부터 안내해 준 남자는 나를 소파에 앉히고 잠시 양해를 구하며 사라졌다.

명함을 보여 주니 태도가 바뀌었다는 건, 명함에 남자들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건가.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들어가 보면 이유를 알 수 있겠지.

1층 로비 역시 입구만큼이나 화려하고 반짝거렸다. 대리석으로 된 바닥과 벽, 크리스털 샹들리에, 마담 플라다가 직접 제작한 것 같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드레스가 마네킹에 걸려 있었다.

화사한 파스텔 톤의 하늘하늘한 연두색 드레스는 한동안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에린에게 잘 어울리겠네.”

그 드레스를 보며 나도 모르게 홀로 중얼거렸다.

“그 아이가 마음에 드시나 봐요.”

그러자, 이 층에서 누군가 친절한 목소리로 말하며 내려왔다. 나는 그녀에게로 몸을 돌렸다.

화려한 금발 머리를 늘어뜨린 채, 팔과 목에 주렁주렁 액세서리를 달고 나타난 그녀는 바로 마담 플라다였다.

“아, 네. 정말 아름답네요.”

나는 순수하게 감상평을 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입어 보시겠어요?”

나는 의아한 시선을 그녀에게 보냈다. 정말 내가 입어도 되는 건가?

그녀는 손님을 아무나 받지 않는 거로 알고 있는데.

마담 플라다는 내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으며 명함을 보여 줬다.

“이 명함을 들고 오신 손님, 맞으시죠?”

“……맞아요, 그 명함이 특별한 건가요?”

“그걸 들고 오신 분은 무조건 귀빈으로 맞이할 것이며, 제 최고의 맞춤복을 원하시는 만큼 해 드리기로 약조를 드렸거든요.”

“누구랑 약속을 했다는 거죠?”

플라다는 알 수 없는 미소만 지을 뿐, 그에 답하지는 않았다. 나는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소설 속에서 마담 플라다는 자존심이 강하고, 자신의 옷을 아무에게나 입히지 않기로 유명했다.

마담 플라다의 재능은 타고난 것이었다. 어떤 무도회든, 파티에서든 그녀의 옷을 입고 나타나면 그 자리의 주인공이 되곤 했다.

하지만 아무리 돈이 많아도, 아무리 지위가 높아도 옷이 어울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드레스를 팔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나를 무조건 귀빈으로 맞이하겠다고 했다. 그런 명함을 나에게 보내 준 사람은 누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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