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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10)화 (10/129)

10화

당연하게도 나는 이곳 지리를 잘 알지 못했다. 창문으로 마차 밖 풍경들을 보면서도 뭔가 잘못됐다는 걸 눈치 채지 못했다.

이상하다는 걸 감지한 건 차창 밖으로 보이는 술집에서 술병이 깨지고 한바탕 난리가 난 걸 목격한 후였다.

“피터 경, 여기가 어디지?”

“…….”

나는 창문 밖으로 슬쩍 고개를 내밀며 뒤에 탄 기사를 봤지만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고도 묵묵부답이었다.

“지금 당장 마차를 멈춰. 나는 서점으로 가라고 한 것 같은데 대체 어디로 가는 거야?”

“그것참 말 많네, 거의 다 도착했으니 얌전히 기다려.”

마차 안에서조차 느껴질 만큼 골목은 더럽고 악취가 났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대로 끌려가면 안 된다.

나는 일단 신발부터 살폈다. 다행히 익숙하지 않아서 높은 굽을 선택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마차는 전에 있던 세계의 자가용만큼 빠르지 않았다.

치맛자락이 좀 걸리적거릴 것 같지만 어제의 웨딩드레스에 비한다면야 간소한 편이었다. 나는 치마를 단단히 붙잡고 침을 삼켰다. 그리고 동시에 마차의 문을 열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어엇!”

기사의 외마디 외침이 들리고, 나는 땅에 발이 닿자마자 넘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지체할 겨를도 없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뒤늦게 마차도 멈추고, 기사가 날 잡으러 쫓아왔다.

“진짜 귀찮게 하네, 거기 안 서!”

숨이 턱까지 차도록 뛰었지만, 무술을 익힌 남자의 뜀박질을 당해낼 리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머리채를 잡힐 것 같았는데, 갑자기 내 앞을 가로막는 검은색 옷을 입은 사람들의 무리가 나타났다.

급하게 멈춤과 동시에 피터에게 뒷덜미가 잡혔다. 하지만 잡히자마자 무리 중 한 명이 그의 손목을 손날로 세게 쳐 내렸다.

“으악!”

별로 세게 친 것 같지도 않았는데 피터는 손목을 감싸 쥐며 땅으로 굴렀다. 손날을 내리친 사람은 나를 자신의 뒤편으로 보냈다. 그들은 복면까지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피터! 비명이 나던데, 무슨 일이야?”

동시에 양편 낡은 건물에서 또 다른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 사람들의 손에는 도끼며 몽둥이 같은 연장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몰라, 젠장! 저 새끼들은 누구지? 여자 하나 납치하기 더럽게 어렵네.”

“그래 봐야 다섯이네. 우리가 처리할 수 있어.”

어떡하지? 지금이라도 더 멀리 도망칠까?

구해 준 사람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나의 생존이 더 급했다. 하지만 주위를 보니 이미 뒤편에도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도망치기에도 늦어 버렸다.

그때, 검은 복면인 중 누군가가 검을 뽑으며 내게 속삭였다.

“백작, 눈을 감고 귀를 막아요.”

“누구…….”

그렇게 물으려던 나는 눈앞에 비치는 섬광에 놀라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귀를 막았어도 엄청난 폭음이 새어 들어와, 나는 그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무섭기도 했지만, 동시에 무기력한 나 자신이 한심했다. 소설 속 내용을 알면 뭐하지? 에린의 하루하루는 자세히 그려지지도 않았고, 따라서 나 자신의 앞날은 결말 외에 아는 게 거의 없었다.

빙의했다고 해서 갑자기 에린의 이 가는 팔다리에 근육이 붙는다든지, 마법 능력이 생긴다든지 하는 게 아니라서 저들을 무찌르지도 못했다.

그렇게 내가 홀로 땅굴을 파며 오들오들 떨고 있는 사이 어느새 폭음이 잦아들었다. 곧이어 내 어깨를 톡톡 치는 손길에 눈을 뜨고 주위를 살펴봤다.

“일어나세요, 이제 괜찮습니다.”

아까 복면인 중 하나가 손을 내밀고 있었다.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봤다.

“전…하?”

그가 복면을 내려 얼굴을 살짝 확인시켜 주고는 다시 가렸다. 황태자가 이런 복장으로 이런 장소에 왔다는 게 알려지면 곤란하긴 하지.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일어서면서, 피터를 비롯해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다섯 명이 어떻게 그 많은 사람을 단번에 제압한 거지? 아까의 그 폭음은 뭐고?

“백작을 안전한 곳으로 모시고 싶었는데, 미처 경황이 없었습니다. 혹시 다치신 곳은.”

나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목소리를 낮춰 소곤소곤 말을 건넸다.

“저는 괜찮아요, 그런데 전하께서는 어쩐 일로 이런 곳에 계신 거예요?”

“……직접 확인할 일이 있어 우연히 왔다가, 백작이 곤경에 처한 것을 봤습니다. 아, 조금 떨어지세요. 위험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가 아직 넣지 않은 검날 끝에서는 푸른색의 빛줄기가 파직파직 소리를 내며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다른 네 복면인의 검 끝은 그냥 평범했는데, 그의 검에만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게 이상했다.

뭐라 물어볼까 하다가, 나는 내가 읽었던 책 속에서 힌트를 발견했다.

이 칼릭스 제국은 대마법사가 세운 나라였다. 그래서 초대 황제부터 지금까지 리케포로스 황가에는 대대로 마법사의 피가 흘렀다.

특이하게도 한 대에서 한 명만이 유일하게 마법사로서 능력이 발현됐는데, 그 때문에 원래 이 나라에는 황권 다툼이라는 게 없었다.

마법을 쓸 줄 아는 황제의 자손을 자연스럽게 황태자로 임명했고, 그가 당연히 황제가 됐다.

그런데 지금 황권 다툼이 일어난다는 건, 이번 대에서 이상하게 마법 능력이 있는 자손이 둘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한 명은 태어날 때부터 인정받았던 황태자 에녹이었고, 다른 하나는 뒤늦게 성장하면서 능력이 발현된 아까의 제2황자, 에녹의 이복형 브리먼이었다.

아무튼 지금 황태자 에녹이 마법을 써서 모두를 기절시킨 것 같았다. 스파크가 튀는 건…… 뭐, 전격 마법인가?

그런데 이렇게 대낮 골목길에서 단번에 벼락을 내려쳐도 되는 건가? 조금 으슥한 뒷골목이긴 했지만 말이다.

자세하게 살펴보니 여기는 번화가의 뒷골목, 빈민가였다. 사람들의 옷이 낡고 해져 있었고, 더러운 골목길 구석구석에 죽은 쥐가 보였다.

또한 술에 취한 이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창문 밖을 내다보며 고래고래 욕설을 했다.

내 시선의 의미를 알았는지, 에녹이 곤란한 듯 중얼거렸다.

“……급하게 쓰는 바람에, 곤란하게 됐군요.”

그리고 그의 중얼거림이 끝나기가 무섭게 순찰을 돌던 기사와 경비병들이 달려왔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는데, 이미 주위의 복면인들은 사라지고 복면을 벗은 에녹만 서 있었다.

당장이라도 소란을 일으킨 자를 잡으려는 듯 달려오던 그들은 에녹을 발견하고는 긴가민가하면서 속도를 늦췄다.

그때 땅에서 꾸물꾸물 기어가는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기절하지 않았던 건지, 내 호위 기사로 위장했던 피터가 땅을 기어서 도망가고 있었다.

“……저기.”

내가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에녹이 발로 그의 목 뒤를 콱 밟아 세웠다. 저런, 아프겠는걸.

정작 에녹은 피터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다가오는 기사에게 말했다.

“네 직책이 어떻게 되지?”

“제국의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저는 삼십 번가의 경비를 담당하고 있는 경비 대장 맥시멈이라고 합니다.”

다행히 기사는 황태자를 알아보았고, 그는 말과 동시에 한쪽 무릎을 꿇고 허리를 굽히며 예를 취했다. 병사들도 그들의 상관이 무릎을 꿇자 따라 꿇었다.

“네 구역에서 귀족가 여인의 납치 사건이 발생했다. 한두 번이 아니었지, 아마?”

……그랬나. 나는 알지 못하는 내용이니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듣고만 있다 질문을 던졌다.

“왜 납치를 하는 거죠?”

내 물음에 에녹이 피터에게서 발을 떼자 경비병들이 그를 일으켜 무릎을 꿇렸다.

“바른대로 말하라, 어째서 백작을 납치하려 한 거지?”

“그, 그냥…… 소공작을 협박해서 돈이나 몇 푼 뜯어내려고…….”

나는 피터의 대답에 어이가 없어 실소가 나왔다. 그럴 생각이었다면 내가 아닌 클로에를 잡았어야지.

하지만 내 입으로 그 말을 하기에는 어딘가 자존심이 상해,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에녹은 아예 그자의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가 손가락 하나를 까딱 움직이자, 기사가 좀 더 가까이 다가와 머리를 조아렸다.

“이 자를 치안대로 연행하라.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하게 각별히 신경 쓰도록.”

“예, 전하.”

피터가 질질 끌려가는 걸 바라보던 나는 조심스럽게 에녹에게 말을 했다.

“……돈 때문이라는 말을 믿지 않으시나 봐요.”

나는 비교적 평온한 표정이던 그의 얼굴이 잠시나마 굳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넘겨짚었다면 죄송합니다, 전하.”

그가 곧 고개를 저으며 잡으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아닙니다, 백작이 그렇게 생각한 까닭이 있을 테지요. 그런데, 죄송한 말씀이지만…….”

에녹이 뒤를 돌아본 후, 난처한 듯한 표정으로 다시 나를 봤다. 나도 그를 따라 뒤를 돌아보니 마차가 정확히 두 동강이 나 있었다.

“마, 마차가…….”

나는 놀라 입을 뻐끔거리며 마차를 가리키다 고개를 휙 돌려 에녹을 봤다.

“상황이 다급해 미처 힘 조절을 못 했습니다. 마차는 변상해 드릴 테니…….”

“전하는… 정말 강하시네요.”

정말 순수한 감탄이었다. 소설 속에서 보던 걸 눈앞에서 보니 놀랍고 신기했다. 내가 웃으며 하는 말에 에녹은 잠시 멍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이내 에녹은 내게 내밀었던 손을 거두더니, 작게 헛기침을 두 번 하며 시선을 피했다.

“전하?”

그러더니 대답도 없이 혼자 마차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다 보니 그의 귓바퀴가 조금 불그스름해지는 걸 볼 수 있었다.

“말은 무사합니다. 이걸 타고 가면 되겠군요.”

그는 마차에서 말을 떼어 내며 말했다. 마부도 이들과 한패였는지 길거리에 널브러져 있었다. 가끔 꿈틀거리는 게 죽은 건 아닌 듯했다.

“그냥 이렇게 가도 되나요?”

“경비대장이 현장을 봤으니 알아서 처리할 겁니다. 그런데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아까 황실 도서관에 들렀다가 서점으로 가는 길이었어요. 아, 거기서 브리먼 황자님을 뵀는데…….”

말고삐를 쥐고 다가오던 그가 멈칫하며 나를 봤다.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그래서, 브리먼 황자가 백작께 무슨 실례라도 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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