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9)화 (9/129)

9화

봉투 안에는 하얀 종이가 들어 있었고, 그 종이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응?”

나는 뭔가 착오가 있나 생각하며 편지 봉투를 팔락거리다 바닥으로 뭔가 툭 떨어지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어떤 명함 같아 보였다.

「마담 플라다」

“이게 뭐지?”

그것을 이리저리 유심히 살펴보다 소설의 다음 내용을 희미하게 떠올렸다.

에린과 루퍼트가 결혼한 다음 날, 클로에는 실신해서 황태자에게 실려 갔다가 루퍼트에게 다시 돌아온다.

이후의 전개는 둘이 함께 밤을 지새운 후에…… 지금 생각해 보니 어이없게도 남주인공의 돈지랄이었다.

“나한테는 최소한만 쓰라더니.”

그리고 그 돈지랄이 펼쳐지는 장소가 당시 사교계 최신 유행을 선도하던 곳.

바로 ‘마담 플라다’였다.

여주인공의 미모를 돋보이게 하고, 사교계의 변두리였던 그녀를 단박에 스타로 발돋움할 수 있게 만들어 준 곳이었으니 어렴풋이나마 기억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명함이 왜 내게 온 거지. 소공작 부인이 된 사람에게 홍보하기 위함인 걸까?

어차피 고민해 봐야 지금으로선 알 수 없었다. 나는 두 주인공과 마담 플라다에 대한 생각을 접고, 진심으로 고민을 시작했다.

그것은 이 세계를 에린으로서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지금도 사실 현실 부정을 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이미 자고 일어나도 변하는 것이 없다는 걸 깨닫고 말았다.

루퍼트와의 결혼으로 일단 급한 불은 껐다. 그리고 일 년 후 무사히 이혼을 하면 남은 빚도 갚을 수 있을 것이다.

원작에서 에린은 그사이에 죽었다. 클로에를 납치 사주하고, 남자 주인공을 위협하다가 이혼당한 후 그 결국 빚을 갚지 못해 팔려가서 죽은 것이다.

나는 둘 사이를 질투하지도 않고, 따라서 클로에를 납치하지도 않을 것이며, 루퍼트가 아무리 속 터지더라도 목숨을 위협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러니 괜찮을 것이다. 정말…… 괜찮겠지?

불길한 마음을 떨쳐 버리며 일부러 나는 그다음 펼쳐질 미래에 관해 생각했다.

에린이 살아남아 무사히 이혼하고 난 이후의 일들에 대해서 말이다.

“후우, 너무 아는 게 없어.”

물론 나는 소설을 봤으니, 앞일을 알고 있었고 그중 활용할 만한 것들도 몇 개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 지식만으로 진로를 정하기에는 이 세계에 대한 기초 상식 자체가 너무 부족했다. 나는 원래 회계학을 전공했지만, 지금 그 지식이 얼마나 통할지도 의문이었다.

이혼 후에 위자료를 받는다 해도 그건 빚을 갚을 수 있을 뿐, 앞으로의 삶을 보장해 주는 건 아니었다.

보통의 귀족 여인이라면 이럴 때 재혼을 택하겠지만, 다시 결혼하고 싶은 마음은 절대 없었다.

나는 서재를 둘러보다 한숨을 쉬었다. 서재라고는 하지만 마치 장식이나 다름없는 쓸모없는 책들만 몇 권 있을 뿐, 도움 되는 것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딸랑-

종을 울리자 가까이 있던 하녀가 제일 먼저 뛰어왔다. 이번에도 제니였다. 나는 그것이 우연이 아님을 아주 잘 알았다.

“마님, 부르셨어요?”

“그래, 혹시 근처에 책을 볼 수 있는 장소가 있을까?”

“책…이요? 어음, 그러니까. 원래 공작님의 서재에 책이 많았는데, 지금은 다 영지로 옮겨간 것 같아요.”

제니는 뜻밖의 질문을 받았는지 더듬더듬 생각을 쥐어 짜냈다. 듣고 보니 소공작의 서재에도 있을 것 같지만 일단 그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과정이 귀찮았다.

“그리고 시내에 책을 파는 곳들을 봤어요.”

“그렇구나, 그것 외에는 없니? 도서관이라든지.”

“아, 그렇지. 황실 도서관에도 책이 아주 많다고 들었어요.”

“황실 도서관…… 거기는 황실 분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 아니니?”

“아니요, 고위 귀족분들도 출입증이 있으면 들어갈 수 있다고 들었어요.”

비록 얕은 지식이었지만 나에게는 그런 제니의 지식조차도 꽤 쏠쏠했다.

“그럼 외출 준비를 해야겠구나.”

나는 어제의 그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다시 한숨을 쉬었다. 딱히 고를 것도 없어 보였다. 그중에서 그나마 고르고 골라 대충 몸에 걸쳤다.

그래 봐야 이 집에서 내가 하녀가 아니라는 정도만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웨딩드레스는 「마담 플라다」로 다시 돌려드려야 한다고 전해 들었어요.”

이번에도 마담 플라다인가. 그리고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웨딩드레스는 대여였던 모양이다. 에린의 처지에 이런 걸 살 수 있을 리가.

그럼 루퍼트는 이조차도 비용을 대 주지 않았다는 건가? 나는 치솟는 분노를 꾹꾹 눌러 참았다. 그래, 내가 무얼 바랄까.

“돌아오는 길에 내가 돌려줘야겠구나. 잘 포장해서 마차에 실어 두렴.”

“네, 그럴게요, 마님.”

제니는 싹싹하게 인사하며 아름다운 웨딩드레스가 상할까 싶어 조심조심 꺼내 들었다. 나는 그사이 서재로 가서 쓰레기통에 넣어 버린 명함을 다시 꺼내 들었다.

“다시 돌려달라고 우편을 보냈던 건가.”

그 호칭을 ‘스필렛 백작’이라고 한 건 의외였지만, 어쨌든 챙겨 두었다.

아마도 추측해 보건대, 상류층을 상대하는 곳이라면 출입 관리를 철저히 할 것이고, 내가 소공작 부인이라 해도 차림이 궁색하다면 입구에서 거절당할 수 있었다.

그때 이 명함이 아마 도움이 될 것이다.

해 질 무렵에 들른다면 아마도 그 둘과 마주치진 않겠지. 오늘은 돌려만 주고 오는 거다.

마차에 오르자 조금 껄렁해 보이는 피터라는 기사 하나가 호위랍시고 따라붙었다. 거절할까 하다가 이 세계의 치안이 어떤지 몰라 그냥 놔두었다.

“마님, 도착했습니다.”

나는 마차에서 내려놓고도 차마 그 입구에 발을 들이지 못했다.

황실 도서관은 황궁과 이어진 곳이었지만, 입구가 달랐다. 그래서 나는 혹시 무도회장에 잘못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답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숙녀들과 멋들어지게 빼입은 신사들이 입구에서부터 하하호호 웃으며 들어서고 있었다.

도서관이라면 무릇 정숙을 기본으로 하는 곳이 아니었나?

의아함에 그들을 보다 문득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시대에 글을 쓰고 읽을 수 있다는 건 특권층의 상징이었다. 귀족이라 해도 절반 이상은 글을 몰랐다.

그런데 도서관에 왔다는 건 어쨌든 읽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들은 자신의 지적 능력을 뽐내는 동시에 건전하고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사교 장소로서 황실 도서관을 이용하는 것이다.

운이 좋으면 그 와중에 황족들과 안면을 익힐 수도 있으니, 저곳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에린은 어떨까. 루퍼트와 결혼을 했으니 저곳에 들어갈 신분은 될 것 같지만. 그것보다도 내 차림에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

그리고 단순히 신분만 앞세우며 들어가기에는 적당치 않아 보였다. ‘사교’ 장소라는 건 나를 이끌어 주고 소개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

일단 나는 시내의 서점으로 발길을 돌리기로 했다. 그곳에서 필요한 책을 구매한 후에 근처에 있는 마담 플라다에 가면 될 것 같았다.

먼저 마담 플라다에 가도 될 것 같지만, 그랬다가 루퍼트와 클로에 커플을 마주치면 서로 난감할 것 같아 최대한 시간을 끌 생각이었다.

다시 돌아서려 하는데 도서관으로 들어가려던 어떤 남자가 나를 보더니 길을 틀어 이쪽으로 왔다.

“스필렛 백작, 아니, 이제 클리포드 소공작 부인이겠군요. 황실 도서관엔 어쩐 일이십니까.”

나는 최대한 기민하게 남자를 살피며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에녹과 같은 검은 머리와 녹색 눈동자, 하지만 그와 달리 각지고 밋밋한 얼굴에 턱수염이 있었다. 나는 바로 무릎을 굽혀 인사 올렸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는 제2황자, 브리먼 리케포로스였다. 소설 속에서는 황태자의 이복형이며 정적으로 나오는 사람이다. 그의 외가를 타고 내려가다 보면 베레지안 남작, 즉 여주인공의 가문까지 닿게 된다. 에녹보다 먼저 태어났지만, 그는 황후가 아닌 정부의 자식이었다.

나이가 많은 황제는 일단 자식이 없어 브리먼을 데려와 황자로 삼았지만, 황후가 뒤늦게 에녹을 낳자 그를 황태자로 임명했다. 처음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 황실은 단 한 가지의 기준으로 황태자를 정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는 이 소설 속에서 클리포드 공작 영식과 베레지안 남작 영애가 맺어지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들어가시지 않고요.”

서글서글하게 웃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끈적한 눈으로 나를 훑어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 조금 소름이 돋아 입매가 굳어졌다.

“잊은 것이 있어 시내 쪽을 먼저 돌아보려 합니다.”

“그러시군요. 그렇다면 혹시 마차를 함께 타고 갈 수 있을는지요.”

나는 그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조금 당황했다.

이곳은 보는 눈이 많았다. 그가 내 마차에 탄다면 분명 소문이 돌 것이다.

물론 이 세계는 의외로 이성 간의 교류에 매우 개방적이었다. 정략결혼이 빈번하던 시대인지라 결혼은 결혼이고 연애는 연애였다. 부부끼리 각자의 정부를 끼고 앉아 아침을 먹는 집이 있을 정도였다.

그 사례는 사실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었다. 루퍼트만 봐도 정부를 아예 집으로 데리고 들어오고 있지 않은가.

에린과 결혼까지 했으니 오히려 더 대놓고 연애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공작이 반대하는 게 만남 그 자체인지, 그저 결혼만인지 나로서도 지금은 알 수 없었지만.

그 가치관이 나와 맞는지, 맞지 않는지를 떠나 일단 이 브리먼 황자와의 스캔들은 딱히 내게 득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소설 속에서 이 브리먼 황자는 여색을 밝히고 성격이 사납다고 묘사되어 있었다. 편견일지 몰라도 그런 사람과 엮이는 건 원치 않았다.

나는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 에둘러 거절했다.

“전하를 모시기에는 너무 초라한 마차입니다, 황실의 마차를 이용하심이 어떻겠습니까.”

“그것참 아쉽군요, 모처럼 부인과 친해질 기회라 생각했는데.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이건 또 뭐야, 백주 대낮에 브리먼 황자가 소공작 부인을 협박하는 건가. 내가 정색을 하고 바라보자, 황자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헛기침을 하며 물러났다.

“농담입니다, 부인. 그리 화를 내실 것까지야. 그럼 조심히 가십시오.”

살짝 고개를 숙였다 든 황자의 시선이 내 뒤편을 향하고 있었다. 휙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호위기사 피터가 있었다. 둘이 눈이 마주친 것 같은데, 아니겠지?

피터는 느긋하게 걸어가 마차의 문을 열었다. 그는 에스코트할 생각이 없어 보였고, 황자가 손을 내밀었지만 나는 그냥 혼자 훌쩍 올라탔다.

곁눈질로 본 브리먼 황자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조금은 후회했다. 그냥 손 정도는 살짝 잡을 걸 그랬나.

아무튼 마차는 수도의 번화가 쪽으로 다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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