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막대한 빚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에린은 결혼을 택했다. 그것도 협박과 거래를 통한 결혼이었다.
물론 그 계약 결혼에는 에린의 오래 묵은 사심도 담겨 있었다. 그 사심 때문에 그녀가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 것이기도 했다.
만일 루퍼트와 결혼하지 않고 그가 돈의 절반을 주지 않았더라면, 에린은 작위도 강제로 팔리고 아마 진작 몸까지 팔렸을 것이다.
다 읽은 후에 편지를 곱게 접어 다시 봉투에 넣어 두었다. 그리고 먹던 수프에 빵까지 찢어 넣어 더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 편지를 펼친 순간부터 입맛이 뚝 떨어졌다. 하지만 먹고 기운을 차려야 다음 일을 생각하고 행동할 것이 아닌가.
다행한 건 내가 이제 내로라하는 실세, 클리포드 소공작의 부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빚의 절반을 당장 갚지 못한다고 해서 잡혀가고 그럴 일은 없다.
그렇게 내가 먹는 것에 열중하는 동안, 나를 향한 루퍼트의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결국 그는 내 정수리와 마주 보며 대화를 시도했다.
“네 앞으로 얼마간의 금액을 배정해 두었다. 허튼 데 쓰지 않도록 해.”
마치 선심 쓰듯이 이야기하는 그의 태도에, 나는 수프 그릇에 박고 있던 눈을 치켜떴다.
“배정이라는 건, 재정권이 아니라는 말이네요.”
“겨우 일 년 남짓 있을 사람에게 재정권을 줄 순 없으니까. 널 뭘 믿고 주지? 얼마를 빼돌릴 줄 알고?”
뭐, 맞는 말이긴 했다. 이 시대 통념상 부인이 집안의 재정권을 갖는다 해도, 에린은 일 년 후면 더 이상 소공작 부인이 아닐 테니까. 하지만 호락호락하게 알았다고 하기에는 자존심이 달린 문제였다.
“루퍼트, 솔직히 말해 봐요.”
“뭘 말하라는 거지?”
“안 주는 게 아니라, 혹시 못 주는 거 아닌가요?”
“뭐라고?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그가 또 흥분하려 했다.
뭐, 이쯤에서 그만할까. 진짜 안주인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재정권을 받으려 했던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또 그와 직접 얼굴 붉히지 않고도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많았다.
“좋아요, 오늘은 이쯤에서 그만하죠. 그리고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계속 말해 보라는 듯 빤히 보는 시선에, 나는 말을 이어 갔다.
“내가 당신에게 그렇듯, 당신 역시 내가 하는 일에 신경 쓰지 않았으면 해요.”
“뭐…라고?”
“뭐, 말하지 않아도 나 따위에게 신경 안 쓸 거 알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
난 상큼한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에린을 싫어하는 루퍼트라면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말을 듣는 것 자체가 기분이 나쁘겠지. 알면서 일부러 한 말이었다.
남주인공 루퍼트는 매력이 있었다. 잘생겼고, 에린을 제외한 사람들에겐 매너 있었고, 뭐 나름 능력도 있었으니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가 그와 함께하고 싶어 했다.
에린 스필렛도 그의 열성적인 지지자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루퍼트와 함께하는 미래는 매음굴로 끌려가 죽는 미래이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았고, 따라서 언젠가는 이혼을 해야 했다. 물론 일 년이라는 기간은 지켜야겠지만.
일 년인 이유는 간단했다.
결혼한 지 일 년이 지난 후에야 법적으로 위자료를 받을 수 있었다.
에린은 루퍼트와 결혼하며 절반의 금액을 받았고, 일 년 후에 순순히 이혼해 주는 조건으로 나머지 절반을 위자료 명목으로 받는 것이 계약 조건이었다.
이런 거액을 그냥 무상으로 주고받으면, 황국에 그에 합당한 이유 보고해야 했고, 함께 엄청난 세금을 물어야 했다.
단지 그뿐이었다.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지? 우리 가문에 먹칠을 할 생각이라면…….”
“다 먹었으니 그만 일어날게요.”
나는 생긋 웃으며 편지 봉투를 챙겨 유유히 일어났다. 끝까지 따라붙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고는, 곧장 이 층으로 올라가서 침실 맞은편에 있는 서재로 향했다. 예전 루퍼트의 어머니, 공작 부인이 사용하던 서재였지만 지금은 없으니 내 전용 공간이 되었다.
의자에 털썩 몸을 기대앉으며 깊게 한숨을 쉬었다.
“너도 어지간했구나……. 에린 스필렛.”
나는 아무도 없는 틈을 타 그녀의, 나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결혼이 결정된 이후 저택과 토지 등을 팔았던 건 에린의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 모든 걸 팔면서 이 어린 여자아이는 어떤 각오와 생각을 했을까.
“바보 같으니라고.”
그럼 사랑에 빠지지 말았어야지. 클로에 같은 건 그냥 내버려 두지.
생각에 빠져 있던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아 깃펜을 꺼내 들었다.
똑똑똑-
편지를 막 쓰려던 참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어제 본 늙은 집사가 헤헤거리며 들어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마님 앞으로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또?”
그럼 루퍼트가 직접 준 건 일부러 그가 골라서 내게 준 모양이었다. 아마 그걸로 에린의 자존심을 한풀 꺾을 생각이었나 본데, 어림도 없지.
집사는 봉투 두 개를 내밀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다른 용무가 있나?”
“예, 마님.”
내가 그 앞에서 봉투를 열어 보길 바랐던 것 같다. 하지만 모른 체 정색하며 다음 용무를 물었다. 아직 부딪힌 적은 없지만, 묘하게 그의 시선이 기분이 나빴다.
그는 문밖에서 무언가 잔뜩 들어 있는 꾸러미와 접혀 있는 카드 하나를 들고 왔다.
“소공작님께서 전해 주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당장 쓰실 수 있는 금화이고, 이것은 마님 앞으로 된 은행 증서입니다. 매달 천 골드씩 들어갈 것입니다.”
“천 골드라…….”
나는 아직 여기 온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고, 천 골드가 어느 정도 금액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티 내지 않고 오히려 마땅치 않은 듯한 뉘앙스로 중얼거렸다.
참고로 아까 보니 에린에게 남은 빚은 40억 골드 정도였다. 천 골드를 한 푼도 안 쓰고 모아도 무려 400개월이 걸린다. 역시 일 년은 유지해야 하나.
“물론 큰 금액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아가씨가 나름 인심을 써서…….”
“아가씨?”
“아, 그, 아닙니다.”
아가씨, 이곳에 영애는 없었다. 루퍼트는 공작가의 외동아들이었고 내가 알기로는 사생아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아가씨는, 설마?
“베레지안 영애를 말하는 건가? 여태까지 그녀가 재정권을 관리했다고?”
“그, 그게, 저…… 꼭 관리했다기 보다…….”
갑자기 머리에 열이 뻗치고 꼭지가 도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가까스로 숨을 골랐다. 공작 부인의 방까지 쓴 걸 보고 혹시나 했는데, 설마 그렇게까지 하고 있을 줄이야.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가 재정권을 주지 않으려 한 이유도 알 것 같았다. 더불어서 이 이야기를 그와 상의하려 한 게 얼마나 소용없고 바보 같은 짓이었는지까지도.
일단 너무 깊게 관여하지 말자. 당장은 더 시급한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아, 아니야. 알았네. 그 골드는 그대로 들고 가서 내 침실의 침대와 가구들을 모두 새로 바꿔 주게.”
내가 직접 저 무거운 꾸러미를 들고 다니면서 돈을 쓰고 다닐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예? 이 골드로 말입니까?”
“왜, 모자란가?”
“아니요, 넘치고도 충분합니다.”
“그렇겠지. 남은 돈은 자네가 갖게.”
집사장의 표정이 환해지는 걸 보니 저 꾸러미에 든 골드의 양이 확실히 적진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저 집사장에게 많은 돈을 주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걸 알려 주고 싶었다.
“저택 전체를 말끔하게 좀 청소해 놓게. 오다 보니 여기저기 지저분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더군.”
그러자 길게 찢어졌던 입꼬리가 슬금슬금 내려오기 시작했다.
“못 하겠다면 관두게, 다른 사람을 시킬 테니.”
“아닙니다, 제게 맡겨 주십시오.”
그래도 저 돈을 포기하기는 싫었는지 고집을 피웠다.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오래 쓸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당장은 저 늙은 노인이 이 집을 맡고 있으니 부려먹을 수밖에.
“이 편지를 클리포드 공작님께 보내 주게. 그리고 이따 외출할 예정이니 마차도 좀 준비해 주고.”
“예, 알겠습니다.”
그가 나가고 나는 또 한 번 실소를 터뜨렸다. 클로에가 이 집 재정권을 갖고 있다니, 루퍼트는 사랑에 미쳐도 단단히 미친 모양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일 년 후에 이혼할 입장에서 이 집안을 단속해야겠다거나, 안살림을 아예 맡아 해야겠다거나 하는 부푼 꿈 따위는 없었다.
오로지 나는 나 자신의 안위와 평안만 침범받지 않으면 됐다. 이건 일상생활을 평화롭게 유지하기 위한 과제였다. 결국 어느 정도는 간섭을 해야 하는 건가.
하지만 생각해 보면 모순이다. 나에게 본채는 비우지 못하게 하면서, 재정권은 클로에에게 있다? 이 집 사람들은 대충 클로에의 존재에 대해 묵인하고 인정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적당히 눈속임할 만한 존재가 있긴 있다는 건데, 그게 누굴까.
나는 고심 끝에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상대는 나의 시아버지. 클리포드 공작에게 쓰는 편지였다.
공작은 소설 속에서 직접 등장하진 않았다. 몸이 좋지 않아서 요양차 영지에 내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퍼트가 내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로서 존재감 자체는 매우 컸다.
죽기 전까지 어쨌든 에린의 방패가 되어 준 사람이었다. 미리미리 챙겨 두면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도 주기적으로 그에게 안부 편지를 보낼 생각이었다.
편지를 다 쓰고 펜을 놓고 보니, 방금 전 집사가 주고 간 우편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 상대적으로 화려해 보이는 봉투를 먼저 집어 들었다.
“허, 참.”
대충 훑어보다 책상 위에 툭 하고 내려놨다. 내용은 이랬다. 이제 소공작 부인이 되어 작위가 필요 없을 테니 스필렛 백작 작위를 팔라는 내용이었다.
더 두고 볼 필요도 없었다.
일 년 후 나는 소공작 부인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백작의 작위는 유지해야만 한다. 한번 잃어버린 귀족 신분은 다시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 힘들었다.
나는 읽고 있던 편지를 봉투와 함께 찢어 버렸다. 그리고 다음, 그저 하얗고 깨끗한 봉투를 살펴보았다.
“이번엔 또 뭐야.”
거기에는 ‘친애하는 스필렛 백작께’라는 글씨가 유려하게 쓰여 있었다.
나는 화려한 필체 위를 손가락으로 슬슬 쓰다듬었다. 그 글씨를 보니 누군가가 생각날 듯 말 듯했다.
그렇게 잠시 망설이다 봉투를 열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