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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7)화 (7/129)

7화

“결국 그거였군, 돈이 필요한 거였어.”

“싫다면…….”

다시 한번 루퍼트의 뒤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어두운 복도 저편에서 클로에가 벽을 짚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이제 숨어 있을 마음이 없는 모양이었다.

“어쩌겠어요, 공작님께 말씀드릴 수밖에. 이 집의 안주인으로서 타운하우스를 관리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고, 좀 말씀드려 볼까요?”

고자질이 취미는 아니었지만, 지금의 에린이 쥐고 있는 패는 너무 한정적이었다. 그것은 내가 클로에와 루퍼트의 관계를 공작에게 발설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루퍼트가 입을 딱 다물고 나를 쳐다봤다. 클로에가 완전히 응접실까지 나왔을 때, 나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루퍼트는 아직 그녀가 나왔다는 걸 모르는 눈치였다.

“그런 김에 이 집에 대한 청소도 좀 부탁드리고요. 아마 클리포드 공작님께선 번잡스러운 걸 싫어하시니 깔끔하게 처리해 주실 것 같네요.”

“할 말은 그것뿐인가?”

루퍼트는 미동도 없이 그 푸른 눈동자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남주인공이라 그런지 눈빛 하나만큼은 정말 장난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기죽지 않으려 애쓰며 그와 눈을 마주쳤다.

“당신의 대답이 먼저죠.”

“재정권은 아직 곤란해.”

“그렇다면 계약은 무효예요. 나는 당신께 돈을 돌려드리고 이 집을 나가겠어요.”

나는 그때 루퍼트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솔직히 나로선 도박을 한 셈이었다. 루퍼트가 여기서 그러자고 한다면 솔직히 막막했다.

“정말 막 나가는군.”

“내가 할 말인걸요.”

나는 가운 안에서 달랑거리는 귀걸이를 꺼내 탁자 위에 던지듯이 내려놨다.

“당신이 결혼 첫날부터 정부를 별채에 숨겨 두든, 누구랑 뒹굴든 별로 상관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저 본채는 일 년 동안 내 공간이에요.”

루퍼트가 그 귀걸이에 시선을 두는 것을 보며 계속 말했다.

“이런 게 굴러다니지 않게 하라고, 저 귀걸이의 주인에게 좀 전해 줬으면 좋겠네요.”

이제 클로에는 완전히 나와 루퍼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정말 아픈 건지 뭔지, 안색이 창백해 보이긴 했다.

“루퍼트.”

그때 클로에가 루퍼트를 불렀다. 루퍼트는 사색이 되어서 클로에에게로 황급히 다가갔다.

“이런, 좀 더 쉬라니까 왜 나왔어.”

“그냥 내가 나갈게요. 그녀의 말이 맞아요.”

“안 돼, 이 몸으로 어딜 가려고.”

아주 둘이 내 눈앞에서 깨를 볶고 있었다. 어지간히도 안쓰러운 모양이다.

“들어가 있어, 금방 따라갈 테니.”

“나 때문에 무리하지 마세요, 루퍼트.”

가녀린 그녀의 목소리는 정말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힘이 있었다. 여기에 예쁘고 처연한 얼굴이 더해지니 과연 여주인공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청초한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들어가는 클로에를 봤다.

루퍼트는 힘없이 돌아서는 클로에를 보며 분노에 찬 시선을 내게 돌렸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정말 무자비한 사람이로군. 이렇게 쳐들어와서 아픈 사람을 몰아세울 줄이야.”

“저도요, 직접 보니 정말 실감이 나네요.”

“어쨌든 다음에 다시 얘기해. 이 밤중에 할 이야기가 아니야.”

나는 결국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저 두 사람을 봐서 그런지 갑자기 엄청난 피로가 몰려왔다.

“내일 중으로 답을 받았으면 좋겠군요. 당신 말대로 겉보기라도 일 년간의 결혼을 유지하려면, 어느 정도 구색은 갖춰야 하지 않겠어요?”

나는 그렇게 말을 마치고 미련 없이 별채를 나서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 있던 루퍼트가 나를 불러세웠다.

“에린 스필렛, 정말 그것뿐인가?”

“흠, 글쎄요. 내일 당장 마차가 필요하다는 정도가 더 있을까요.”

“할 말이 그것뿐이냐는 거야. 오늘 우리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곤 있는 건가? 그게 네 협박 때문이었다는 것도.”

뒤돌아서서 마주친 루퍼트의 눈빛은 뭐랄까, 정해진 답을 내가 하지 않은 것처럼 독촉하고 있었다. 왜 저러는 거지?

“…물론이에요, 조금 전에 그걸 상기시키러 왔다고 했잖아요? 그럼, 좋은 밤 되시길.”

더 입씨름하기도 귀찮아서 그대로 문밖으로 나와 버렸다.

“하아, 공기가 맑네.”

이전에 살았던 세계와 달리 여기는 밤하늘에 별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나는 한참 동안 그것들을 바라보다 안으로 들어갔다.

***

아무래도 꺼림칙하다는 생각에 결국 그날은 손님방에서 잠을 청했다. 재정권이고 뭐고 눈 뜨자마자 일단 침대부터 바꿔야 할 것 같았다.

뭘 모르면 몰랐지, 남들이 그렇고 그런 걸 했다는 걸 알고도 그 침대에서 자기엔 나의 섬세하고 예민한 신경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찌뿌둥한 몸으로 일어나 대충 세수를 하고 나와 보니, 보기 싫은 사람이 식당 테이블에 앉아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바로 루퍼트였다.

생각해 보니 난 결혼식 때부터 지금까지 뭐 하나 제대로 먹은 게 없었다.

“마님, 식사하시겠어요?”

제니가 제일 먼저 다가와 싹싹하게 말을 걸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방으로 좀 가져와 줘.”

루퍼트는 신문에 눈을 고정한 채 빵을 우걱우걱 씹다 나를 흘긋 봤다.

“앉아, 할 얘기가 있어.”

그 말에 내 표정이 확 굳어 버리자 그는 못 본 체하며 다시 신문으로 눈을 돌렸다.

“오늘까지 대답해 달라고 한 건 당신이야.”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와 최대한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식탁이 매우 크다는 게 이럴 땐 참 좋았다.

식사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묵직한 목재 식탁을 톡톡 두드렸다. 눈 둘 곳이 없다 보니 흘끔 루퍼트를 보다 그와 시선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아, 그러고 보니 클로에 양은 식사했나요? 여기서 해서 거기로 갖다 주는 건가요? 아니면 별채에도 주방이 있나?”

정말 별 생각 없이 한 말이었다. 나는 아직까지는 그녀에게 한 점의 감정도 없었지만, 그래도 사람이니 배가 고프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그러자 루퍼트가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세게 쾅, 하고 내리쳤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장난하나? 위선도 작작 떨어.”

“하, 놀래라. 왜 죄 없는 테이블은 때리고 그래요?”

정말 그녀 자체에 대한 악감정은 없었다. 그녀는 그저 소설 속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는 여주인공이 아니던가. 하지만 짐작했던 것보다는 욕심이 많은 것 같아 오히려 의아했던 거지.

“봐 주는 것도 정도가 있어. 선을 넘지 마, 특히 클로에에 관해서는 신경 끄라고, 알아들어?”

나는 그 말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팔짱을 끼고 식당의 인테리어를 둘러보았다. 그런 내 모습에 루퍼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식사에 열중했다.

곧이어 내 앞에도 식사가 차려졌다. 갓 구운 빵과 버터, 치즈, 그리고 과일 정도로 차려진 간소한 아침이었다.

나는 빵 하나를 들고 손으로 뜯어 입 안으로 넣었다. 풍미 깊은 빵의 고소한 맛에, 웃음을 머금으며 하녀장 델마에게 말했다.

“가서 잼을 좀 가져와 주세요.”

“잼이요? 이 집에 그런 것은 없습니다. 먹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지요.”

델마는 꼿꼿한 태도로 일관하며 나의 청을 거절했다.

“아아, 내가 직접 주방으로 가서 찾아볼까요?”

내가 이렇게 요청할 수 있었던 건, 클로에가 나중에 공작 부인이 되었을 때 잼을 듬뿍 바른 빵을 즐겨 찾았다는 것을 읽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원작에 따르면 결국 에린이 죽고, 공작도 죽은 이후, 클로에는 루퍼트와 결혼해서 공작 부인이 된다.

하지만 그건 먼 훗날의 일이고, 지금은 내가 이 집의 소공작 부인이다.

“찾아도 아마 없을 겁니다. 잼을 좋아하신다면 내일부터 구비해 놓겠습니다만, 없는 건 없는 겁니다.”

“만일 내가 찾으면 델마 당신은 거짓말한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거예요.”

나는 말한 즉시 일어났다. 그리고 내가 향한 곳은 주방이 아닌 별채로 나가는 길이었다.

식성이 중간에 변하는 게 아니라면, 클로에는 지금도 그것을 좋아할 것이고, 그렇다면 잼은 별채 쪽에 잔뜩 있겠지.

“잠시만요, 마님. 앉아 계세요. 창고에 조금 있던 것 같기도 하네요, 기다려 주세요.”

델마가 나를 말린 후 급하게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런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다시 앉아 식사를 이어 갔다.

그런 나를 빤히 보는 루퍼트의 시선이 느껴지자 갑자기 먹은 게 체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제부터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거지.

그러다 루퍼트가 무슨 말도 없이 우편물 중 하나를 나에게 툭 던졌다.

나도 그에게 이게 뭐냐고 묻는 대신에 조용히 편지를 집어 들었다.

언뜻 보기에 도장이 잔뜩 찍혀 있는 것이 여러 군데를 돌고 돌아 온 것 같았다.

대충 식탁에 있던 안 쓴 나이프로 봉투 끝을 자른 후 안의 내용물을 꺼내 들었다.

종이를 펼치며 나는 제일 먼저 내가 이곳의 언어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적지 않게 감사했다. 자연스럽게 편지의 내용이 줄줄 읽혀 머릿속에 들어왔다.

“하아…….”

하지만 곧 절로 한숨이 나왔다.

나는 그 편지를 읽어 내려가면서 잠시 잊고 있던 에린 스필렛의 처지에 대해 다시 실감하게 됐다.

그것은 스필렛 백작의 저택과 토지, 별장 등이 팔렸으며, 그로부터 발생한 금액만큼 빚에서 탕감되었다는 내용의 정산서였다.

“어제의 이야기는 허세였던 모양이군, 에린 스필렛.”

발끈하라고 한 이야기인 모양이지만, 어차피 내가 진 빚도 아닌 이상 그의 말에 동요할 필요는 없었다.

“그럴 리가요, 가장 중요한 패를 제가 쥐고 있는걸요.”

그때 막 델마가 잼 병을 들고 왔다. 불그스름한 병 안에서 상큼하고 달달한 냄새가 났다.

“언제까지 그렇게 나올 수 있는지 두고 보겠어.”

네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는 가능하겠지, 라고 마음 속으로 외치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조금은 의문이긴 했다.

공작은 거의 아파 거동을 못 할 지경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에게 아직 작위를 계승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두 부자 사이가 썩 좋지 않다는 것은 소설 속에 간략하게 설명되어 있다.

루퍼트가 공작이 되는 건 결국 공작이 죽고 난 이후의 일이다.

아무튼 애석하게도 에린이 그 많은 것들을 처분했지만, 지금으로선 갚은 것보다 갚아야 할 금액이 훨씬 컸다.

이렇게 큰 금액의 빚을 지게 된 건, 에린의 아버지인 전 스필렛 백작이 사업에 실패한 탓이었다.

너무 어마어마한 액수의 빚과 함께 마음의 병을 얻은 백작은 그만 홀로 자결하고 말았다.

에린의 어머니는 돌아가신 지 오래였고, 얼마간 함께 살던 계모와 그 아들은 작위 계승도 포기하고 가문을 뛰쳐나갔다.

그래서 에린은 허울뿐인 작위와 함께 엄청난 빚더미도 물려받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을 차분히 정리해 보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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