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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6)화 (6/129)

6화

욕조 안에 들어가 온수에 몸을 담그니 피로가 확 몰려왔다. 제니가 뒤로 조용히 다가와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제니라고 했지. 몇 살 때부터 여기 있었니?”

“공작님이 계실 때부터니까, 한 오 년쯤 된 것 같아요.”

제니의 외관상 오 년 전이라 하면 꽤 어릴 때일 것이다. 나는 그녀의 사정을 묻기보다는, 조금 더 내 일신에 중요한 이 집 사정에 대해 묻기로 했다.

“이 집에 고용된 사람은 총 몇 명이지?”

“음, 가만있어 보자. 엊그제 첼시가 그만뒀고, 한 달 전에 소피가…….”

“잠시만, 왜 그렇게 많이 그만두는 거야?”

“그건…….”

제니는 한참 동안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내가 눈을 뜨고 뒤를 돌아보자 그녀는 그제서야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하녀장님이 엄하신 것도 있고, 또…….”

나는 제니를 보고 있다 문득 그녀 뒤에 걸려 있는 가운으로 시선이 갔다. 저건 내가 걸치고 온 가운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군데군데 사용 흔적이 남아 있는 욕실 용품들도 눈에 들어왔다.

“여길 내가 오기 전에 누가 썼니?”

“네? 아, 그게 저…….”

내 목소리가 화 난 것처럼 들렸는지, 제니의 목소리가 점점 더 답답하게 기어들어 갔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며 다시 평정심을 되찾고는 물어보았다.

“혹시 지금 별채에 있는 사람과 관계가 있니?”

제니의 눈이 크게 번쩍 뜨인 것으로 대신 대답이 되었다. 나는 확실히 하고자 한 번 더 확인했다.

“침실도?”

그녀는 고개를 작게 끄덕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소공작님도 종종 함께…….”

설마 그럼 아까 그 침대 위에서……. 욱, 갑자기 속이 안 좋아졌다.

나는 서둘러 목욕을 끝내고 에린의 낡은 잠옷 위에 겉 가운을 걸쳐 입었다. 그래도 이건 이 몸의 주인이 입던 잠옷이라 그런지 별로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솔직히 이 집이 어떤 방식으로 돌아가든 상관하지 않으려 했다.

마음 같아서는 정말 계약이고 뭐고 간에 당장 이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안 된다면 당분간 내 일신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조금은 환경을 개선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나는 일단 루퍼트의 방으로 향했다.

노크를 했지만 기척이 없어 허락도 없이 문을 벌컥 열었다.

마음대로 열었다고 화내는 건 겁나지 않았다. 나에겐 그보다 중요한 용무가 있었다.

“없네, 어디 갔지?”

그렇게 내뱉은 스스로의 질문에 곧 답을 얻었다.

별채에 클로에가 있다는 걸 기억해 낸 것이다. 어찌할까 망설이다 겉 가운의 끈을 단단히 허리에 묶었다.

껍데기뿐이든 허울뿐이든 간에 나는 이 집의 안주인이었다. 못 갈 이유가 뭐야? 더군다나 머리채 잡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내일 아침에도 루퍼트가 저택에 있을지조차 모를 노릇이니 오늘 밤 해결을 해야 했다.

제니가 막 나가려는 나를 보더니 후다닥 뛰어나왔다.

“마님, 어디 나가시게요?”

“별채에 가려는데.”

“앗, 거기는…….”

“괜찮아, 다 알고 있으니. 넌 여기 있어.”

“잠시만요, 마님!”

제니는 급하게 나를 부르며 램프 같은 것을 손에 쥐여 주었다.

“밖에 램프가 다 고장 나서요. 이걸 들고 나가세요.”

“응? 아, 그래.”

이 세계에는 전기 같은 건 없을 텐데. 그러고 보니 뭐로 불을 밝히는 거지?

내가 이리저리 살펴보니, 제니가 그런 나를 보다 설명해 줬다.

“마법석으로 만든 램프예요. 저택에 딱 두 개밖에 없죠.”

“아, 그래, 그렇구나.”

마법석이라. 신기한 물건이었다. 하긴 여기는 소설 속이었다. 마법도 있었고, 언뜻 용이나 마물들도 존재했던 것 같다.

아무튼 그 앞에서 계속 감탄할 순 없는 노릇이고, 나는 본채를 박차고 나와 별채로 향했다.

딱 두 개뿐이라는 마법 램프 중 하나는 별채 앞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깜깜한 와중에도 길을 잃지 않고 저쪽까지 갈 수가 있었다.

별채 입구를 지키는 병사들과 기사들이 몇몇 나와 있었다. 내 얼굴은 몰랐겠지만, 지금 본채 쪽에서 걸어오고 있는 새로 온 여자가 누구인지 정도는 아는 모양이었다.

기사 하나가 다가와 공손히 말을 붙였다.

“저, 작은 마님. 맞으십니까?”

“그래, 맞아.”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이 기사도 연신 뒤를 보며 눈치를 보는 게, 아직 둘이 함께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잠시 소공작님을 뵈러 왔으니 길을 비키게.”

“저어, 그런데…….”

“다 알고 있으니 상관없단다. 소란을 피우러 온 게 아니야.”

기사가 안절부절못하는 걸 보고 있다 결국 답답해진 나는 그를 밀치고 지나갔다. 그는 그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루퍼트가 아무도 오지 못하게 막으라고 명령한 적은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여기를 오긴 누가 오겠어.

별채로 들어서며 보니 언뜻 본채보다 더 잘 관리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는 것은 클로에가 이곳에 온 게 처음이 아니라는 소리다.

왜, 아예 본채로 들일 생각은 못 했나 보지?

코웃음을 치며 현관을 열고 들어서니 안락해 보이는 응접실이 나왔다.

“루퍼트!”

응접실에는 없고, 그럼 저쪽 방인가?

그때, 안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들렸다. 아무리 그래도 방문을 벌컥 여는 건 좀 옳지 못한 행동이란 생각에 나는 노크를 했다.

“루퍼트, 나와 보세요.”

뭔지 몰라도, 둘은 꽤나 놀란 모양이었다.

쿵쿵 소리도 나고, 여자 목소리도 들리는 것 같고. 이거 뭔가 남편의 불륜 현장을 급습하는 아내가 된 기분…인 게 아니라, 그게 맞는 건가?

“갑자기 무슨 일이야?”

맨몸에 가운만 걸친 루퍼트가 문을 열더니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나도 조금 놀라 주춤 뒷걸음질 쳤다.

물론 남녀가 방 안에 있으면, 음음, 뭐 그런 일이 벌어질 거라 예상은 했지만. 게다가 내 침실에서 둘이 그렇고 그랬다는 사실에 열이 뻗쳐서 뛰어나온 거였지만, 그렇다 해도…… 내가 본 건 분명히 전연령가였는데?

루퍼트 뒤로 토끼 눈을 뜬 채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우리의 여주인공 클로에도 보였다.

“분명 이곳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별수 있나요, 당장 할 이야기가 있는걸요.”

“무슨 일 있어? 그게 이 밤중에 이야기할 만큼 급한 일이라는 건가?”

“저한테는요. 당신을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모르니까요.”

“후, 에린. 일 년간은 어차피 부부로 한집에서 살 텐데 그렇게 급하게 굴 거 없어. 보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아.”

나는 루퍼트답지 않은 말에 정색하며 그를 봤다. 그리고 그것을 말한 루퍼트도 순간 놀라며 바로 뒤에 있는 연인을 바라보았다.

내 쪽에서 클로에가 제대로 보이진 않아 표정을 알 순 없었지만, 그런 말은 연인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긴 내가 지금 누굴 걱정하고 있는 거야, 신경 쓰지 말자.

“후, 젠장.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그제야 그가 항복하고는 다시 들어갔다. 먼저 클로에를 달래야겠지.

아무튼 나는 줄곧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루퍼트보다 먼저 거실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애처롭게 서서 이쪽을 바라보는 하녀에게 말했다.

“가서 차를 가져오렴.”

“……네? 아, 알겠습니다!”

나는 거실의 한가운데 있는 일인용 소파에 앉아 등을 기댔다. 하녀가 차를 내오는 동안을 기다리며, 한 손으로 가운 안에 있는 귀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아마 이 귀걸이도 클로에의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원작을 떠올리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드레스 룸도, 욕실도, 침실도, 에린이 오기 전까지 클로에는 마치 이 집의 안주인처럼 지내고 있었다. 그럼 이 상황에서 정말 에린만 악의를 가졌을까?

클로에는 루퍼트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도 자신의 것이라 여기던 것을 몽땅 뺏기고 말았다. 그런 그녀는 정말 여리고 착하기만 해서 에린을 털끝만큼도 미워하지 않았을까.

나는 앉아서 별채를 훑어보았다. 침실이 있었고, 그 너머에 있는 방이 드레스 룸일 것이다. 아직 방 안의 불이 켜져 있었고 부산스럽게 어른거리는 그림자도 보였다. 아까 가져간 물건들을 정리하는 모양이었다.

나도 모르게 입가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이런 마음 먹으면 안 되는데, 이런 상황이 되고 보니 자꾸 막 방해하고 싶고 그러네.

아, 안 돼. 죽고 싶지 않으면 자중해야지.

곧 하녀가 차를 내왔고, 나는 좀 더 여유로운 자세로 앉아 찻잔을 들었다.

그때 저쪽에서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일부러 옆에 오도카니 서 있던 하녀에게 말을 걸었다.

“손님께서는 편히 지내고 계시는지 모르겠구나. 지내시는 동안 불편하지 않게 네가 잘 돌봐드리렴.”

“……아, 그, 네. 알겠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루퍼트가 굉장히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다가왔다.

아까와 달리 옷도 갖춰 입은 상태였다. 자기 입으로 부부라면서 내외하는 게 우스웠지만, 그래도 아까보단 편히 시선을 둘 수 있어 다행이었다.

당연하게 소파 가운데 앉으려던 그는 내가 앉아 있는 모습을 보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옆에 있는 긴 소파 위에 걸터앉았다.

“차 한 잔 드릴까요?”

생긋 웃으며 묻자, 루퍼트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못마땅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벌써 이 집의 주인처럼 행세하는군. 그렇게 적응력이 빠른지 미처 몰랐어. 이렇게 막무가내일 줄도.”

“당신이 나에 대해 모르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내가 당신에 대해 잘 모르듯이.”

한마디도 지지 않고 맞받아치는 나에게 루퍼트는 이를 갈면서도 감정을 꾹꾹 누르고 말했다. 여기서 소리친다면 방에 있는 클로에가 들을까 봐 참는다는 게 눈에 보였다.

“그래서, 이 밤에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우리의 거래 조건을 상기시켜 주려고요.”

이왕 이렇게 됐으니 될 대로 되라지. 나는 푹 기대앉은 채 다리까지 꼬며 차의 향을 음미했다.

“거래 조건? 돈이라면 이미 절반을 줬을 텐데.”

“그래요, 일 년의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말이죠.”

“그래서 지금 나와 잠자리라도 하겠다는 건가?”

“어휴, 그런 끔찍한 농담 하지 말아요.”

나는 달칵 소리가 나게 찻잔을 내리며 입꼬리를 고요히 들어 올렸다. 루퍼트의 한쪽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내려왔다. 에린에게 이런 말을 들으니 자존심이 퍽 상한 모양이다.

“끔찍한 농담이라, 결혼한 건 사실이야.”

“그래요, 사실이죠. 그런데 이상하네요, 당신이 이 말에 반박할 줄이야. 지금 당신의 연인이 이 말을 들으면 얼마나 상처받겠어요.”

나는 복도 뒤편에서 아른거리는 그림자를 보며 말했다. 그러자 루퍼트가 퍼뜩 뒤를 돌아보았다.

그와 동시에 그림자는 문 안으로 사라졌다.

시선을 다시 돌린 루퍼트가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며, 나를 바라봤다.

“제대로 하고 싶은 말을 해.”

“타운하우스에 대한 재정권을 내가 갖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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