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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5)화 (5/129)

5화

클리포드 저택은 크고 넓었다. 해 질 무렵 와서 보니 어디가 어디인지 헷갈렸지만, 별채와 본채 사이의 거리는 의외로 가까웠다.

멀리서 보니 두 건물 사이를 하녀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무언가를 나르며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별채에 클로에가 있다는 사실을 소설을 통해 알고 있었다.

내가 두리번거리다 그곳에 눈을 둘 때마다 루퍼트가 잔기침을 하며 내 시선을 떼어 냈다.

나는 그의 반응이 궁금해서 괜히 루퍼트에게 말을 건넸다.

“별채 쪽에 누가 있는 모양이군요. 누군가요?”

“신경 쓸 거 없어. 당신은 그저 쥐 죽은 듯이 이 집에서 일 년만 버티다 나가면 되는 거야.”

루퍼트는 그렇게 일갈한 후 걸음을 재촉했다.

이 상황을 내가 겪고 보니 한편으로는 에린의 그 질투와 클로에를 향한 분노가 이해가 됐다.

에린과의 결혼에 아무리 마음이 없다 해도 결혼 첫날부터 정부를 집안 별채에 들여놓다니, 루퍼트에게 품고 있는 마음과는 별개로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공작의 눈을 피한다기에는 너무 대놓고 들여놨다. 이 수많은 사용인 중 누구 하나 공작에게 보고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걸까.

그렇게 두리번거리며 건물 내로 들어서니 사람 둘이 나와 허리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소공작님, 작은 마님.”

주름이 자글자글한 집사가 제일 먼저 우리를 반겨 주었다. 그에겐 미안한 말이었지만, 그는 누굴 모신다기보다 이제 모셔져야 할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이 집 소공작이 무려 결혼식을 올렸는데, 고용인들은 아무도 안 와 본 건가? 설정상 공작은 지금 몸이 좋지 않아 영지에 가 있다고 했다.

영지에서 결혼식을 올리지 않은 것도 그렇지만, 이렇게 아무도 오지 않았다는 것도 그렇고,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저는 이 집의 하녀장 델마라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마님의 침실은 아직 정리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하루만 손님방에서 머물러도 괜찮으시겠죠?”

고동색 벨벳 원피스를 입은 여인이 마치 자기가 이 집의 안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거들먹거리며 나를 위아래로 빤히 훑어봤다.

“아니, 손님방이라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내가 옷을 갈아입고 목욕할 동안 방을 치워 놓도록 해.”

나는 그에 지지 않고 내 요구 사항을 전달했다. 어차피 내내 아무도 쓰지 않았을 방이 뭐 그리 치울 게 많다는 건지.

그리고 설사 그 말이 사실이라 해도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지녔다면 오늘 루퍼트와 에린이 결혼했으니 그와 방을 함께 쓰는 것을 권하는 게 맞다. 손님방을 권한다는 건 암묵적으로 이 집에서 에린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 줬다.

“하지만…….”

정색하고 거절할 줄은 몰랐다는 듯이 그녀가 대답을 미루며 우물거렸다. 나는 무언의 동의를 구하며 루퍼트를 봤지만, 그는 내 눈빛을 읽지 못하는 듯 어떠한 말도 없었다.

“루퍼트.”

이렇게 눈치가 없는 남자 주인공이라니, 답답함에 결국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제가 당신의 방에 가서 잘까요? 아니면…….”

“이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하라.”

내 말에 그가 움찔하는 게 느껴져 좀 우스웠지만, 그가 나와 함께 자겠다고 한다면 내 쪽에서 기겁할 일이기도 했다.

무슨 뜻인지 알아들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렇게 질색할 거면 알아서 눈치껏 했어야지.

“예, 알겠습니다, 소공작님.”

어쨌든 새로 온 작은 마님에게 토를 달던 하녀장 델마도 결국 소공작의 명령 앞에서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앞으로 이 집에서 해야 할 일들을 알 것 같았다. 원작의 에린처럼 마구 부릴 생각까지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윗사람으로서 위계가 바로 서게끔은 해야 할 것이다.

과연 소공작의 외면을 받는 그의 부인이 이 집에서 어디까지 가능할지는 의문이었지만 말이다.

“그럼 먼저 탈의부터 도와 드리겠습니다. 이 아이를 따라가시지요.”

하녀장은 자신의 뒤에 서 있는 하녀 중 하나를 가리켰다. 그녀는 그중 제일 몸집이 작고 어려 보였다.

“제니라고 합니다.”

하녀는 나에게 공손히 인사하고는 따라오라는 듯 뒤를 흘끔 돌아보며 앞서 걸어갔다.

나는 루퍼트를 로비에 세워 둔 채 제니를 따라 이 층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는 내내 루퍼트의 시선이 느껴졌다.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거지, 뭔가 이상한 걸 눈치챈 걸까.

앞서가던 제니는 조금 열려 있는 어느 문 앞에서 머뭇거렸다. 문틈 사이로 부산스러운 여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그게 다야? 왜 이렇게 뭐가 많은 거야?”

“그러게, 이게 다 누구 돈인데. 언제 이렇게 다 사들인 건지.”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마님.”

제니는 내게 돌아서서 양해를 구한 후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러자 갑자기 부산스럽던 소음이 일시에 잦아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벌컥, 문이 열리고 하녀 둘이 커다란 바구니를 들고 나왔다.

언뜻 보이는 바구니 안에는 여자의 장신구들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나를 보자 화들짝 놀라며 허리를 숙이고는 도망치듯 후다닥 달려나갔다.

“안이 정리가 다 안 됐었나 봐요. 이제 들어오세요.”

제니가 문을 열었고, 나는 그 문 안으로 들어서며 텅 비어 있는 옷장 안을 볼 수 있었다. 그 안을 보고 있다가 전신 거울 앞에 섰다.

“마님, 탈의를 도와 드릴게요.”

“그러렴.”

나는 거울을 통해 다가오는 제니를 유심히 살폈다. 아직 젖살도 빠지지 않은 어린 여자아이였다. 한 열여섯에서 열일곱 살 정도?

생각해 보니, 에린도 꽤 어려 보인다.

나는 조금 더 거울을 자세히 보며 볼 위를 만지작거렸다. 보들보들한 피부의 감촉이 손가락 끝에 느껴졌다.

몇 살일까. 작중에서 에린의 정확한 나이는 나오지 않았다. 클로에의 나이가 스물셋이었으니, 에린도 그쯤 어딘가일 거라 예상되었다.

그나저나 등을 조이던 매듭이 풀리고 나니 살 것 같았다.

“내 옷들은 어디 있니?”

제니가 빠르게 뒤돌아 문으로 가는 사이 그 문이 노크도 없이 벌컥 열렸다. 하녀장 델마였다.

“여기 마님의 짐을 가져왔습니다.”

그녀의 두 손에는 조금 커다란 가방 두 개만이 들려 있었다. 제니가 그걸 받아 내려놓고는, 안에 있는 옷들을 착착 옷걸이에 걸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화려한 드레스 룸을 채우기에는 에린의 옷이 너무 몇 벌 없어 보였다. 그러니까 하나, 둘……. 내가 손가락으로 다 셀 수 있을 정도의 옷가지 몇 벌을 꺼내는 것만으로 가방이 텅 비었다.

“이게 전부인가?”

“예, 스필렛 백작 저택에 있던 것들을 다 가져왔지만 저게 전부였어요.”

나는 대답을 하는 하녀장의 눈빛에서 비웃음 비슷한 걸 읽었지만, 딱히 뭐라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보기에도 백작 영애, 아니, 이제는 백작이 된 여자의 옷치고는 개수도 몇 개 없거니와 낡아빠져 보이기까지 했다.

생각해 보면 소설 속 에린은 늘 구두쇠 같고 억척스러운 이미지로 묘사되곤 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뭔가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을 텐데, 불행하게도 그런 것은 아주 간단하게 서술되어 있을 뿐이었다.

“아…… 그래.”

“오늘은 이 아이가 작은 마님을 도울 것인데, 혹 따로 전속 하녀를 지정하고 싶으시다면…….”

하녀장은 제니를 가리키면서도 여전히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제니는 그 와중에 뒤에서 흘끔거리며 나와 델마의 눈치를 봤다.

“제니로 결정했으니 이만 나가 보게.”

내가 델마를 차갑게 훑어보며 말하자, 그녀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그나저나 저 하녀장은 뭘 믿고 저렇게 건방진 거지.

아무리 에린이 루퍼트에게 외면받는다고 해도, 공작 부인이 없는 이상 소공작 부인이 유일한 안주인이었다. 아까 보니 루퍼트가 딱히 뒤를 봐주는 것 같진 않았는데, 다른 믿는 구석이 있는 걸까?

제니는 그 몇 벌 안 되는 옷 중에서 잠옷을 골라 내게 건네주었다.

“오늘 피곤하셨죠. 목욕물도 미리 받아 놓을까요?”

“그래, 욕실은 어느 쪽이지?”

“이 문 바로 오른편이 마님의 침실이고, 침실과 욕실이 바로 이어져 있어요.”

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고, 하녀가 쪼르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비로소 나는 혼자가 되었다.

얇은 슬립 하나만 입은 채 나는 전신 거울 앞에 섰다.

군살 하나 없는 몸매 하며, 비현실적인 장밋빛 머리카락, 태양처럼 빛나는 눈동자도 참 예뻤다.

그냥 악역으로 그렇게 살다 가기에는 아까운 인생이지 않은가. 소설 속 인물로만 볼 때는 아무 감흥 없던 존재가 나 자신이 되니 참 감회가 새로웠다.

“이게 뭐지?”

잠옷으로 갈아입은 후, 드레스 룸을 나서려는데 바닥에서 빛나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나는 허리를 숙여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건 빨간색 보석이 달린 작은 귀걸이였다. 이게 왜 여기 떨어져 있는 걸까. 에린의 것이라면 제니가 방금 모두 서랍 속에 넣어 놓았다. 사실 그것도 몇 개 되어 보이진 않았지만.

그럼 이 귀걸이는 이 드레스 룸을 쓰던 전 주인의 것일 텐데. 자세히는 몰라도 공작 부인이 죽은 지 꽤 오래된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순간 방금 하녀들이 들고 나갔던 바구니를 떠올렸다. 그 바구니에 가득 담겨 있던 장신구와 여자의 옷들, 그건 누구의 것이었지?

찝찝한 마음으로 귀걸이를 손안에 쥔 채, 가운의 주머니 안에 넣어 두었다. 그리고 제니가 알려 준 침실로 향했다.

정신없이 침대의 시트를 갈고 있던 하녀들이 나를 보고는 바짝 긴장하며 똑바로 섰다.

“됐으니 하던 거 계속하렴.”

“예? 예, 마님.”

나는 욕실로 향하며 유심히, 하지만 티 나지 않게 침실을 살펴보았다. 방 안의 공기며, 가구 같은 게 오랫동안 주인이 없던 방인 것 같지가 않았다.

특히나 하녀들이 걷어 한쪽에 놔둔 침대보는 귀족 여성이 좋아할 것 같은 하늘하늘한 레이스 무늬였다.

“…….”

나는 약간의 의아함을 남긴 채 욕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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