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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4)화 (4/129)

4화

나는 결국 다시 물었다.

“……안 되나요?”

그러자 내가 본 눈빛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다시 황태자 특유의 온화한 표정이 그의 얼굴에 자리 잡았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가 마차의 벽을 두어 번 두드리며 마부에게 말했다.

“클리포드 공작저로 가자.”

“예, 전하.”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말발굽 소리와 사람들이 걷고 뛰는 소리가 제각각 일정한 간격으로 마차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황태자를 호위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아마 주위가 그렇게 조용했던 건 이 사람의 배려 덕분이었겠지.

“전하는 참 좋은 사람이군요.”

“…….”

그는 딱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마차의 일정한 흔들림 속에 나도 눈을 감았다. 고맙게도 그가 말을 걸지 않아 준 덕분에 생각할 틈이 생겼다.

이곳으로 오기 며칠 전, 나는 오래 사귀다 헤어진 남자친구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나랑 그토록 오래 사귀어 놓고서 헤어진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어느 날, 그가 결혼을 했다.

딱히 슬프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몇 날 며칠 동안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너무 잠들고 싶은 마음에 그날은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마셨고,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처방받은 수면제를 함께 삼켰다.

음, 그렇다면 나는 깊고 깊은 수면 상태가 아닐까? 그래서 이런 꿈을 꾸고 있는 거고.

하지만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하다.

그럼 답은 한 가지. 술과 함께 마신 약의 부작용으로 인해 그대로 죽은 모양이다.

남들이 보기엔 전 남친의 결혼에 비통함을 이기지 못한 여자의 자살로 보였겠다.

으음, 이건 좀 별론데.

아무튼 이 상황이 너무 비현실적이라 오히려 무덤덤했다. 이건 내 성격이기도 하다. 지나치게 큰일이 닥쳐 올 때면 오히려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긴, 그래서 그놈이 나한테 질린다고도 했었지.

그건 그렇고, 그렇다고 하더라도, 왜 하필 이 소설 속으로 들어오게 된 거지?

그것도 클로에가 아닌 에린 스필렛의 몸속이라니.

슬그머니 눈을 떠보니, 황태자는 자는지 어떤지 미동도 없이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아직 갈 길이 꽤 남은 모양이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피곤하긴 했지만 지금 잠들면 곤란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이 소설 원작의 내용을 되짚어 보았다.

다행히 이 소설을 본 지 오래되지 않아 어느 정도는 머릿속에 남아 있었지만, 또 그다지 자세히 보지도 않아 드문드문 기억이 이어졌다.

특히나 에린 스필렛은 주인공도 아니었으니, 주인공과 엮인 일화가 아니라면 별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부분이 나를 답답하게 했다.

대충 기억에 남는 부분은 이거였다.

루퍼트를 짝사랑하던 에린 스필렛이 루퍼트의 아버지인 클리포드 공작에게 클로에와의 관계를 폭로하겠다고 협박했다. 당시 루퍼트와 클로에는 몰래 사귀고 있었다.

클리포드 공작 가문과 베레지안 남작 가문은 격도 맞지 않았지만, 서로 지지하는 후계자도 달라 절대 어울릴 수 없었다.

클리포드 공작은 황태자를 지지했고, 베레지안 남작은 다른 황자를 지지했다.

만일 공작이 알게 되면 클로에는 무사하지 못하리라.

그래서 에린은 루퍼트에게 계약 결혼, 그리고 거액의 돈을 거래 조건으로 요구했다.그녀에게는 큰 빚이 있었기 때문이다.

에린은 그 자신이 스필렛 백작이었고, 스필렛 백작 가문은 클리포드 공작 가문과 대대로 지지하는 노선이 같았다. 공작의 눈을 가리기에는 아주 좋은 패였다.

루퍼트는 결국 클로에를 지키기 위해 그녀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대신 1년이라는 기한을 두었다.

나는 당시에 이 부분에서 남주인공이 좀 비겁하지 않은가 생각했다. 결국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다는 거지. 사랑도, 자신이 누리고 있는 지위와 권력도.

어쨌든 결혼 후에 에린은 약속과 달리 돌변하여 클로에를 가만두지 않는다. 그녀를 납치하기도 하고, 그녀의 목숨을 위협하기도 한다.

그리고 결국 에린의 최후가 어땠더라. 느긋하게 생각하던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에린은 결국 일 년이라는 기간을 채우지 못한 채 이혼당하고, 빚에 허덕이며 매음굴에 팔려간 후 그곳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그것을 떠올리자 소름이 끼쳤다. 그 순간 갑자기 마차가 멈췄다.

“……백작, 스필렛 백작.”

“네?”

“수도 내에 있는 공작저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괜찮으십니까?”

“뭐가…요?”

“안색이 창백합니다.”

그의 말에 나는 내 상태를 깨닫고는 손으로 뺨을 문질렀다.

“괜찮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괜찮다면 다행입니다, 그런데…….”

그가 슬쩍 마차 창문에 드리워진 커튼을 걷으며 바깥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나는 그의 시선을 따라 창문 밖을 보았다. 그리고 바로 혀를 찼다.

내 반응이 신기한 듯 에녹이 나를 빤히 보는 게 느껴졌다.

“그 난리를 치더니, 마중 나왔네요.”

“괜찮겠습니까?”

“네, 어차피 한집에서 살게 될 텐데요.”

“만일…….”

그가 단어 하나만 힘주어 말하고는 잠시 뜸을 들였다.

나는 끈기 있게 그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눈치 없는 루퍼트는 그렇지 못했다. 마차 곁으로 온 그가 밖에서 차체를 두들겼다.

에녹의 눈동자에 드물게도 불쾌감이 서렸다.

그는 눈을 한 번 깊게 감았다 뜨더니, 하려던 말을 마저 이어 갔다.

“만일 견디지 못하시겠다면, 언제든 찾아오셔도 좋습니다. 스필렛 백작이라고 기별을 주십시오.”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전하.”

아마도 빈말이겠지만, 어쨌든 그의 걱정하는 마음 씀씀이는 진심으로 다가왔다. 내가 감사 인사를 끝내며 살짝 웃어 보이자, 그도 살짝 고갯짓을 하더니 마차의 문을 활짝 열었다.

“전하.”

루퍼트는 일단 한발 물러나 황태자인 에녹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에녹이 루퍼트를 향해 한 번 시선을 던진 후, 마차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먼저 와 있었군.”

“예, 제 아내를 데려다주셔서 고맙습니다, 전하.”

나는 루퍼트의 쓸데없는 강조에 피식 웃고 말았다. 에린에게 마음은 없지만 이 상황이 자존심 상하는 거겠지.

내 웃음이 불쾌한지, 루퍼트는 나를 한 번 쳐다보다 짜증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까지 거기 타고 있을 거야? 전하께 이미 너무 많은 폐를 끼친 것 같은데. 빨리 내리지 그래.”

저 귀족은 에스코트가 뭔지도 모르는가 보다.

주섬주섬 무거운 드레스를 한 손에 쥐고 내리려는데, 역시 우리의 자상한 서브 남주 에녹이 손을 내밀었다.

루퍼트가 그것을 보고 움찔하는 게 또 우스웠다. 대체 아까부터 왜 저러는 거야. 하나만 해라.

나는 에녹에게 눈으로 인사를 한 후 그 손을 잡고 내려왔다.

어느샌가 날이 저물었는지 꽤 어둑해져 있었다.

땅에 발이 닿기가 무섭게 루퍼트는 나의 반대편 손목을 잡고 에녹에게서 나를 떼어 냈다.

나는 잠시 휘청했지만, 곧 중심을 잡았다.

그 모습을 본 에녹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가 오늘 보인 행동은 옳지 못한 것이었네. 적어도 공식 석상에서는 아내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어떤가.”

에녹은 그 예쁜 입으로 구구절절 옳은 말만 했다. 확실히 루퍼트가 앞으로도 이런 식이라면 좀 곤란하다.

루퍼트와의 달콤한 신혼 생활은 절대 사양이지만, 또 그런 망신을 당하는 것도 못할 짓이었다. 적어도 밖에서만큼이라도 그럴듯하게 연기해야 하는 거 아닌가.

“전하께는 못 볼 꼴 보여드려 송구합니다. 하나 집안일이오니 너무 심려하지 않으셔도 될 줄로 압니다.”

건방진 놈. 그나저나 둘이 친한 사이 아니었나.

루퍼트의 딱 선 긋는 행동은 나까지 눈치 보이게 만들었다. 오냐오냐 자란 소공작이라 그런지, 건방진 남자 주인공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황태자하고도 맞먹으려 들었다.

하긴, 원작에서도 이때쯤 둘 사이가 멀어진다. 그러나 그건 이런 상황 때문이 아니라, 클로에 때문이었다.

하지만 에녹은 불쾌한 기색 없이 달래듯, 루퍼트의 말에 대꾸했다.

“클리포드 공작가의 일이 꼭 자네 집안일이라고 할 수만은 없지. 내가 염려하지 않게 자네가 잘하면 되는 것 아니겠나.”

“……명심하겠습니다.”

에녹은 그것으로 루퍼트와의 대화를 끝내고 나를 돌아보았다. 다소 딱딱했던 그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리며 그가 내게 인사를 건넸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전하.”

그는 가볍게 내 손을 들어 손등에 입을 맞췄다. 루퍼트가 이번엔 어떻게 나올까 궁금했는데, 그는 의외로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이내 황태자가 탄 마차가 출발하고, 나는 그렇게 공작저 앞에 서 있었다.

움직이려는데 아직도 벗지 못한 웨딩드레스 끝자락이 발에 밟혀 순간 몸이 기우뚱했다.

나는 최대한 균형 감각을 발휘해 몸을 가눴다. 그 바람에 반사적으로 잡아 주려던 루퍼트의 손이 허공에서 맴도는 꼴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머쓱하게 손을 거뒀다.

새삼 이 웨딩드레스를 보자니 이 상황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지 문득 깨달았다.

에녹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없었다면 나는 정말 홀로 이 저택까지 와서 이 드레스를 질질 끌며 걸어 들어갔을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된 게 에린도 나름 귀족일 텐데 따라붙는 하녀조차 없는 걸까.

“들어가지.”

저택의 육중한 철문이 열리고, 나는 루퍼트의 뒤를 따라갔다.

나는 소공작 부인의 체면이고 뭐고, 식장에 들어갈 때처럼 무거운 드레스 자락을 최대한 들고 걸었다.

루퍼트가 뒤를 흘끔거렸다. 역시 에스코트가 뭔지 모르는 사람인 것 같다.

아니면 에린이라 해 주기 싫은 걸 테지.

여기는 아마 수도에 있는 공작의 타운하우스일 것이다. 가운데 덩치가 큰 저택이 있었고, 왼편에 그보다 작은 별채 같은 건물이 있었다.

그곳은 유난히 지키는 사람들이 많아 보였다.

내가 걷다 말고 별채 쪽을 보고 있자, 루퍼트가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쪽에 얼씬할 생각도 하지 말고 마저 걸어.”

저렇게 말하니 더 궁금했지만, 나도 원래는 관심을 두지 않으려 했다. 그 부분이 생각나지 않았더라면.

원작에서 클로에는 그날 쓰러지고, 황태자에 의해 실려 가지만 결국 루퍼트가 다시 그녀를 되찾아 온다.

그리고 자신의 곁에 두고 보살피고 싶어서였는지 에린 몰래 클로에를 의원과 함께 저택의 별채 속에 숨겨 놓는다.

아하, 그거였군.

그런데 저걸 숨겼다고 할 수가 있나? 저렇게 티가 나는데?

그저 웃음만 나왔다.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 다시 원작과 같아진 셈인가. 나는 착잡해진 마음으로 다시 루퍼트의 뒤를 따라갔다.

***

황태자를 태운 마차는 얼마 가지 않아 다시 멈췄다.

에녹은 에린과 함께 있던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부드러운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살얼음같이 차가운 얼굴로 커튼을 슬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어디에선가 검은색 옷을 입은 남자들이 나타나 그에게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호위 기사들은 익숙한 듯 그들을 막지 않았다.

에녹이 그들에게 고개를 한 번 까딱 움직여 보이자 그들은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또 소리 없이 사라졌다.

사라진 방향은 아까 그가 에린을 내려 줬던 클리포드 공작 저택이었다.

에녹은 그들이 사라지자마자 미련 없이 다시 커튼을 쳤다. 그의 시선이 잠시 의자 아래에 있는 상자로 향했다.

찰나에 미소가 그의 입가에 어리었다.

“……좋은 사람이라.”

그가 마차의 벽을 쿵쿵 두드리자 곧 마차가 출발했다. 마차는 덜컹거리는 소리도 없이 유연하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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