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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3)화 (3/129)

3화

루퍼트의 얼굴에는 그녀에 대한 걱정이 가득해 보였다. 그러던 그가 문득 고개를 들어 나와 에녹을 쳐다보았다. 그제야 아차 싶었던 건지, 그는 클로에를 주위 하녀들에게 돌봐주길 부탁하고는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나는 자네가 바쁜 줄로만 알았지.”

“괜찮습니다, 전하. 당신은 이쪽으로 오지 그래.”

여전히 고압적이고 오만한 말투였다. 분명 소설 속에서는 매력적인 어투라고 했는데, 에린의 입장에서 내가 직접 들으니 반발심만 생겼다.

하지만 어쨌거나 내가 지금 당장 식을 치른 그의 부인임에는 틀림없었다.

황태자에게 양해를 구하려는데, 우리의 여주인공 클로에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루퍼트…… 하아. 어지러워, 루퍼트…….”

그녀의 애처롭고 가느다란 음성이 간절하게 루퍼트를 찾고 있었다.

그러자 루퍼트는 눈에 띄게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아까보다 이성은 돌아왔는지, 지금 막 자신이 결혼식을 마쳤다는 걸 인지하긴 했나 보다.

그래도 어쩌겠어, 가 봐야지.

둘은 운명이고, 나는 둘 사이의 방해꾼이니.

나는 아무 감정의 동요 없이 담담하게 루퍼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부르는데, 가 봐야 하지 않겠어요?”

그는 내 말을 듣자마자 아무 대꾸도 없이 다시 클로에에게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보니 소리 없는 한숨이 나왔다. 그렇게 홀로 나가려다 보니 갑자기 막막해졌다. 자연스럽게 아까 손을 내밀었던 황태자를 바라보게 되었다.

“황태자 전하, 다시 부탁드려도 될까요?”

내가 그에게 다시 슬쩍 손을 뻗자 황태자는 루퍼트와 클로에를 한 번 보더니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가시죠, 스필렛 백작.”

그의 손을 잡고 사뿐히 돌아서서 나오는 발걸음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았다.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건 조용히 생각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었다.

그런데 에녹의 손을 잡고 식장을 빠져나가자마자, 나는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아찔해졌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던 것이다.

식장 밖에는 광장이 있었고, 그 한가운데 천장이 없는 커다란 마차가 있었다.

그리고 이곳 입구부터 마차까지 레드카펫이 깔려 있었다.

누가 봐도 결혼식 피날레를 장식하기 위한 퍼레이드용 마차였다.

나도 당황했지만, 그곳에 있던 수많은 사람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당연히 신랑 신부가 나올 거라 생각했던 문으로 다른 남자의 손을 잡은 신부가 걸어 나왔다. 그런데 그 다른 남자는 다름 아닌 황태자였다.

기세 좋게 그의 손을 잡고 식장을 박차고 나온 나였지만, 그 수많은 사람의 시선에 조금 기가 죽고 말았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당황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스필렛 백작을 마차로 모실 것이다.”

그의 한마디에 호위 기사들과 시종들은 일사천리로 길을 뚫기 시작했다.

그들이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만들어 낸 길은 레드카펫과 다른 방향으로 뻗어 있었고, 그 길 끝에는 또 다른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옆에 서 있는 황태자 에녹을 흘긋 보았다. 소설 속에서도 그랬지만, 실제로 옆에서 느끼기에도 그는 쉽게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이 자못 든든했다.

그렇게 흐뭇하게 웃고는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걸어가고 있는데, 뒤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루퍼트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쏟아지는 햇살이 모두 그의 것이라는 듯 태양 빛에 그의 금발 머리가 반짝거렸다.

심지어 그의 품에 안겨 있는 파리한 안색의 클로에까지도 빛나 보였다.

“……하늘조차 주인공 편이라는 거지.”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 아닙니다, 전하.”

무시하고 가려다, 순간 묘하게 드는 기시감에 다시 몸을 휙 돌려 그들을 봤다.

떠올리고 나니 갑자기 초조해졌다.

이 장면은 원래 루퍼트와 에린의 결혼식에서 클로에가 쓰러지고, 그런 클로에를 황태자가 안아 데리고 나오는 장면이었다.

서브 남주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이라 이것만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굳은 표정으로 그들을 보다 고개를 휙 돌려 황태자를 봤다.

그러다 에녹의 에메랄드빛 눈동자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전하?”

“더 볼 장면이 아닌 것 같습니다, 스필렛 백작.”

“아…….”

온화한 표정 위로 미세하게 굳어 있는 얼굴 근육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어쩐지 에녹이 더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왜 그런 표정인지 의문이 들었지만 곧 납득할 수 있었다.

워낙 정의로운 사람이니, 그의 기준으로는 루퍼트가 지금 하는 행동들을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나 대신 화 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기분과 상관없이 머릿속은 더 엉망진창이 되어 갔다. 여기서 장면이 바뀌어 버리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가도 되겠습니까.”

나 때문에 함께 멈춰 섰던 황태자가 내 기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에게서 완전히 몸을 돌렸다.

루퍼트는 클로에를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하아, 정말.”

웨딩드레스는 정말 무겁고 걸리적거렸다.

그의 손을 잡은 채 발판을 딛고 올라서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내가 낑낑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던 에녹이 부드럽게 팔로 내 앞을 가로막았다.

“백작.”

내가 의아한 눈빛을 보내자, 황태자 에녹은 풍성한 드레스 자락째 내 무릎을 포개 안고는 나를 마차 위로 올려 주었다.

잔잔하면서도 묵직한 체향이 훅 풍겨 오자, 복잡했던 머릿속이 순간 하얘졌다.

그렇게 얼떨떨하게 앉아 있는 나를 향해 그가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는 양해를 구하면서도 내가 고개를 끄덕일 때까지 기다렸다 문을 닫았다.

비로소 나는 조용한 곳에 있을 수 있었다.

한숨을 푹 내쉬며,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

“내가 왜…….”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 지끈거리는 두통은 에린의 고통일까, 아니면 진짜 내 고통일까. 관자놀이를 누르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웅성거리던 밖의 소음이 점차 잦아들었다.

창문으로 밖이 보일까 싶어 기웃거리는 와중에 문이 열렸다. 문을 연 주인공은 에녹이었다. 그의 뒤로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그가 모두를 해산시킨 모양이었다.

에녹은 잠시 나를 보며 망설이는가 싶더니, 성큼 들어와 맞은편에 앉았다.

꽤 넓은 마차라 생각했는데, 에녹이 맞은편에 앉는 것만으로도 꽉 차자 이 공간이 좁게 느껴졌다.

잠시간의 적막이 흐르고, 이내 그에게서 짧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후, 저런 친구가 아니었는데.”

나는 말없이 그를 보다 떠보듯 입을 열었다.

“……어차피 허울뿐인 결혼이니까요.”

하지만 그가 즉각 반박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렇다 해도 이 자리에서 저런 행동을 하는 건 이해 받을 수 없을 겁니다.”

루퍼트가 클로에를 안고 사라진 건, 에녹이 클로에에게 가지 않아서였다. 무엇이 그를 이리로 오게 만들었을까.

“……전하께서는.”

마차 안을 울리는 내 목소리가 낯설었다. 나는 사실 내가 예법에 맞게 말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곧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 녹빛 눈동자에 결국 말을 이을 수밖에 없었다.

“어찌하여 저를 이곳으로 데려오셨습니까.”

“그건…….”

그가 처음으로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답을 고민하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시선을 한곳에 두지 못했다.

문득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미안해졌다.

“따지려는 게 아니었습니다. 늦었지만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내 인사에도 그는 말이 없었다.

“그러니까…….”

조금 더 설명을 덧붙이려는데, 그가 내 말을 가로막았다.

“……수많은 결혼식을 보았고, 그중에는 백작이 말한 것처럼 허울뿐인 결혼식도 있었습니다.”

그는 느리게, 그리고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허리를 숙여 앉은 그의 팔꿈치가 무릎 위에 얹힌 채였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사이가 꽤 가까웠다.

“귀족들의 결혼에 사랑이 있는 경우가 오히려 드물지요. 하지만 그런 결혼식이라고 해도, 신부가 신발조차 신지 못한 결혼식은 처음 보았습니다. 그뿐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대화는 또 끊어졌다.

그럼 구두 굽이 부러지고, 내가 그 구두를 벗어 들고 다녔기 때문에 원작이 틀어졌다는 건가? 아아, 지금의 나로선 모르겠다.

어쨌거나 황태자는 그 자리에 서 있던 에린 스필렛이 불쌍해 보였다는 것 같다.

솔직히 나를 그 자리에서 구해 준 그의 행동과 그 말에 감동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도리어 조금 착잡해졌다.

과연 에린이 루퍼트를 상대로 한 계약을 알았더라도, 황태자는 에린 대신 화를 내 주었을까.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이 결혼식에서 했던 루퍼트의 행동은 별개로, 에린이 루퍼트를 상대로 했던 협박과 거래는 나쁜 짓인 게 분명했다.

그 대가를 지금 내가 치르는 거고. 그렇지, 그게 답답한 거지.

거기까지 생각하니 피가 차갑게 식었다.

그래, 정신을 차려야겠다.

결국은 황태자도 이 소설 속 서브 남주였다. 바꿔 말해, 클로에의 남자라는 말이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내가 허리를 곧추세우고 자세를 바로 하자, 황태자도 따라서 상체를 세웠다.

하지만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결혼식은 끝났다. 그럼 보통 어디로 가게 되지?

“……어디로 갈 수 있죠?”

에녹이 그 아름다운 초록빛 눈동자로 나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바보 같은 질문이라는 거, 그래, 인정한다. 그런데 내내 평온하던 그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왜, 왜 웃으세요?”

“그 큰일을 겪고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던 백작이 지금 얼굴을 붉히시는군요.”

“아…….”

나는 손등으로 얼굴을 가리며 그의 웃는 얼굴을 봤다. 잘생긴 얼굴로 그렇게 웃으니 싱그러움이 절로 묻어나왔다. 그런 그를 보고 있다 나도 결국 웃고 말았다. 지금 웃을 때가 아닌데.

“공작저로 가시는 게 불편하다면, 오늘 밤은 황궁으로 모실 수도 있습니다.”

다행히 그의 말이 힌트가 되었다. 내가 갈 곳은 역시 루퍼트의 저택이었나 보다.

“이제 막 결혼식이 끝났는걸요. 그럴 수는 없어요. 전하, 혹 가능하시다면 저를 클리포드 공작 저택까지 데려다주실 수 있으실는지요.”

여기서 안 된다 할 리 없겠지만 그래도 정중히 부탁했다. 그의 신분이 높아서가 아니라 나를 배려해 주는 모습에 왠지 그러고 싶었다.

그런데 느긋해 보이던 그의 눈빛이 한순간 조금 초조한 눈빛으로 바뀌었다. 그 이후, 그는 영 대답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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