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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2)화 (2/129)

2화

실제로는 입술이 닿지도 않았으니 뭐, 나는 결백하다. 루퍼트에게도 이 고통스러운 결혼식을 빨리 끝내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하지만 슬쩍 본 루퍼트는 매우 불쾌한 듯 나를 흘끔 보면서도 별로 탓하지는 않는 눈치였다. 그는 몇 번이고 흘끔흘끔 나를 보더니, 신관의 말이 다시 이어지고 나서야 앞을 봤다.

“이제 두 사람의 결혼이 성사되었음을 알립니다. 신랑, 신부는 앞으로 함께할 미래를 그리며 행진하겠습니다. 모두 축복해 주십시오.”

관현악단의 힘찬 행진곡이 울려 퍼지고, 나는 가자는 신호로 슬쩍 루퍼트를 보았다. 그는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휙 하고 눈을 피해 버렸다.

그렇게 그의 팔짱을 끼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맨발로 밟는 카펫은 생각보다 부드럽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폭죽이 터지고 꽃가루가 하늘에서 휘날렸다.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있으면서도,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에린 스필렛, 소설 속에서 그녀의 삶은 결코 녹록지 않았고, 나는 솔직히 그 삶을 견뎌 낼 자신이 없었다.

나는 행진 중간쯤에서 고개를 돌려 여주인공 쪽을 바라보았다. 우연인지 시선을 돌리자마자 그녀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런데 그녀의 표정이 이상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결혼식에 참석해서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의 마음은 애석하게도, 나 역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내가 겪어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 느꼈던 수많은 감정 중에 놀라움과 경악스러움이 있었던가?

여주인공이라 추정되는 갈색 머리 사람의 표정은 경악을 넘어서 공포에 질린 표정이었다. 그녀는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오렌지색 눈을 크게 뜨고 날 바라봤다. 대체 뭐지?

차라리 화가 났거나, 슬퍼서 먹먹하거나, 담담하거나, 아니면 아무렇지 않은 척 웃고 있거나…… 여기까지는 이해 가능한 범주였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아무튼 나는 여주인공의 경악스러운 표정을 뒤로한 채 남주인공의 팔을 잡고 앞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완전히 끝까지 걸어가자마자 갑자기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활짝 열리는 문 사이로 빛이 쏟아지며 그 사이로 누군가 걸어 들어왔다.

검은 머리가 빛 사이로 찰랑거리는 것이 묘한 대조를 이루며 잠시 시선을 사로잡았다.

누구…지?

그 사람을 보자마자 여자들은 무릎과 허리를 굽혔고, 남자들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에녹 드웰 리케포로스 전하.”

그리고 마찬가지로 루퍼트도 무릎을 꿇고 팔 하나를 들어 올린 채 깊게 머리를 숙였다. 나는 주변 눈치를 보다 다른 여자들과 비슷하게 인사를 한 후 일어났다.

그 와중에 재빨리 머리를 굴려 그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기억해 내려 애썼다. 에녹 드웰 리케포로스. 에녹이라면…… 아, 그는 황태자였다. 소설 속 포지션은 서브 남주였다.

남자 주인공인 루퍼트는 사랑에 열정적이면서도 다소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면이 있어 때때로 허점을 보였다. 물론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로맨스 소설 남자 주인공으로는 그가 적합했는지도 모른다.

반면에 서브 남주인 황태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했다.

온화한 것 같으면서도 누구에게도 곁을 주지 않는 냉정한 면이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주에 대한 사랑은 지고지순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질척거리지 않았고, 그녀가 부담스럽지 않을 거리에서 위기에서 구해 준다든지, 필요한 것을 챙겨 주는 역할을 맡곤 했다.

그중 가장 큰 역할은 남주인공의 질투를 유발하여, 여주인공에게 집착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에는 결국 여주인공의 마음이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걸 알고는 깔끔하게 물러나는 캐릭터였다.

남들은 루퍼트를 응원하고 사랑했지만, 나는 사실 따지자면 황태자 에녹 쪽을 응원했다.

작중에서 루퍼트가 싫은 건 아니었지만, 그는 다소 자기 멋대로인 면이 있어 가끔 거슬렸기 때문이다.

지금 이곳에서 직접 보고 나니 나의 그런 생각은 아주 탁월했던 것 같다.

기럭지하며, 몸매하며, 얼굴하며 황태자는 루퍼트에게 어느 하나 꿀리지 않았다.

굳이 차이를 말하자면 루퍼트가 조금 더 남자다웠고, 황태자 에녹 쪽의 얼굴이 조금 더 유려한 편이었다.

“전하, 어찌하여 이런 누추한 곳까지 오셨습니까.”

“자네 결혼식에 내가 어찌 참석하지 않을 수 있겠나. 그만 일어나게, 오늘의 주인공을 이렇게 무릎 꿇리려는 게 아니었네.”

황태자는 루퍼트의 어깨를 잡아 직접 일으켰다.

“와 주셔서 무한한 영광입니다, 전하.”

“폐하께서도 자네에게 축하를 전하셨네. 아무튼 축하하네, 언제 일이 이렇게까지 된 건가? 인사 한번 시켜 주지 않고선.”

사실 황태자와 루퍼트는 어릴 적부터 친구였다.

루퍼트는 황제파의 수장인 클리포드 공작의 자식이었고, 공작 부인과 황후 또한 우애가 깊은 사이였다.

둘은 어려서부터 같이 크다시피 했기 때문에 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루퍼트가 일언반구 하나 없이 갑작스레 누군가와 결혼을 한다고 하니 에녹으로선 서운하다 할 만했다.

“뭐하는가? 소개해 달라니까.”

황태자가 에린을 전혀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사교계 행사며 뭐며 여러 번 마주쳤겠지. 다만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누거나 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소개를 청한 것이다.

“아, 예. 이 사람은 에린 스필렛 백작이라 합니다. 스필렛 백작이 작고한 이후 작위를 물려받았습니다.”

“에린 스필렛, 아니, 오늘부터는 에린 클리포드 소공작 부인이라 합니다, 전하.”

에녹은 에메랄드빛 눈동자로 나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느리게 입을 열었다. 그는 신중하게 말을 고르는 것 같았다.

그는 내가 굳이 소공작 부인이라고 못 박은 이유에 대해 아는 듯했다.

“……클리포드 소공작 부인이라. 전대 스필렛 백작이 그리된 건 나도 참 유감입니다.”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그는 나에게도 역시나 한결같이 정중했다. 과연 누구누구 하고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니…… 둘의 사이가 소원해진 건, 그래, 바로 오늘.

황태자의 눈에 여주인공이 들고부터였다. 어디 있으려나, 아아, 저기 있구나.

여주인공은 이미 꽤 가까이 다가와 우리들의 모습을 초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여주인공의 이름은 클로에 베레지안이었고, 그녀는 남작가의 영애였다. 내가 애써 떠올리기가 무섭게 황태자의 시선이 여주인공에게 닿았다.

이쯤 되면, 클로에가 쓰러지고 황태자가 달려가야 하는 건데.

“그런데…….”

드디어 황태자가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왜 구두를 들고 계신 겁니까?”

그는 아직까지도 내 손에 들려 있던 구두를 가져가 살펴보았다.

“아, 구두 굽이 부러져서…….”

“설마 지금 맨발이신 겁니까?”

솔직히 그가 이런 것까지 신경 쓸 줄은 몰랐다.

여기 있는 그 누구도 신부가 지금 맨발로 걷고 있고, 한 손에 구두가 들려 있다는 걸 신경 써 주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니 좀 서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겁이 났다.

에린 스필렛은 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왔길래 이런 취급을 받는 걸까.

구두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황태자는 인상을 확 찌푸렸다.

“누군가 일부러 구두 굽에 칼자국을 냈군요.”

그의 목소리가 조용하던 홀 안에 나지막하게 울려 퍼졌다. 당연하게도 모두가 숨죽이며 우리를 주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털썩-

“어머, 어떻게 해!”

예상대로 클로에가 쓰러져 있었다.

주위의 귀족들이 웅성거리는 와중에, 나는 내 옆에서 빠르게 뛰쳐나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보았다.

루퍼트 클리포드, 지금 막 결혼식을 마친 신랑이었다.

“클로에, 클로에. 정신 차려……!”

사실 모두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저기 저 클로에가 루퍼트의 진짜 사랑이며, 에린 스필렛은 껍데기뿐인 부인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짐작으로만 알고 있는 것과 이렇게 공공연하게, 하필 이 자리에서 드러내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아무리 내 일이 아니고, 내가 루퍼트를 사랑하지 않는다지만 기가 차 말문이 막혔다.

에녹도 그의 행동에 놀란 듯 딱딱하게 얼굴을 굳히다 천천히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부인, 아니, 스필렛 백작.”

황태자가 부르니 대답을 해야 했지만 어쩐지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를 부르는 그의 호칭이 바뀌어 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황태자는 시종이 가져온 신발을 내 앞에 내밀었다.

“아름다운 레이디에게는 어울리지 않지만, 일단 이거라도 신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제 밖으로 나가셔야 하니까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나는 울컥 새어 나오려는 울음을 꾹 눌러 참았다.

울 일이 아니다. 나는 루퍼트에게 상처받은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이건 에린의 일이지 나의 일이 아니다.

나는 그녀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하나의 관객으로서 에린의 일에 깊이 공감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 계시겠습니까, 밖으로 나가시겠습니까.”

황태자는 정중한 태도로 내 의중을 물었다. 원한다면 에스코트해 주겠다는 의미였다.

그는 이 자리가 나에게 어떤 의미이고, 또 내가 지금 어떤 심정일지 헤아리고 있었다. 이 와중에 다정하기도 하셔라.

확실히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건 에린 스필렛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 뿐이었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고 나긋한 목소리로 그에게 대답했다. 하나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식이 끝났으니 제가 더 있을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에녹이 우아하게 손을 내밀었다. 혹시나 해 루퍼트 쪽을 보니, 그는 이쪽에는 관심도 없었고 오로지 클로에를 소중하게 껴안은 채 연신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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