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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1)화 (1/129)

1화

눈을 뜨자마자 보인 건 거울이었다. 그 거울 속에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나는 눈을 몇 번인가 깜빡이다 다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곧.

짝짝-!

“아가씨, 일어나세요! 머리 망가져요. 아이참, 몇 시간이나 공들인 건데.”

“……어?”

“어서 고개 좀 똑바로 해 보세요.”

“여기가 어디…지?”

퍼프를 들고 있던 메이드 복장의 여자가 갸웃하다 살짝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기뻐서 지금이 꿈인가 싶으신 거예요?”

“하긴, 그러실 만도 하죠. 결국에는 소원을 이루셨잖아요. 대단하세요, 그 집념…… 아니, 그 사랑이.”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메이드 복장을 한 채 내 머리 위에 하얀 면사포를 씌우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 잠이 덜 깬 것처럼 기분이 멍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

“잠시만요, 움직이지 마세요. 이제 정말 다 됐어요.”

투명한 알이 엄청나게 큰 티아라가 정수리에 씌워지는 것을 끝으로 그들이 한 걸음씩 물러났다.

저게 진짜 다이아몬드는 아닐 거야, 라고 태평하게도 생각했다.

나는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바라보았다.

반짝거리는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거기에 면사포를 쓰고, 정수리엔 티아라까지.

이건 영락없는 신부의 모습이었다.

이 사실도 참 당황스러웠지만, 더욱 당황스러운 사실은 따로 있었다.

탈색과 염색으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찰랑거리는 로즈핑크 빛의 머리가 반은 묶이고 반은 어깨 양옆으로 곱게 빗겨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거울 속 여자와 눈을 마주했다. 이건 나였다, 하지만 내가 아니었다.

커다랗고 노란 황금빛 눈동자가 깜빡거리며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제야 흠칫,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다.

아, 그래. 이건 꿈이구나.

그러나 꿈에서 어떻게 깨어나야 하나 고민할 새도 없이, 열려 있는 문으로 누군가 들어오며 가볍게 노크했다.

“잠시 비켜 주지.”

묵직한 중저음이 울리고, 내 옆에서 재잘거리던 하녀들은 두말하지 않고 문밖으로 나갔다.

남자는 제복 같은 것을 갖춰 입고 있었다.

옅은 금발을 포마드로 넘겨 잘생긴 얼굴이 제대로 드러났다.

누구지, 저 남자는?

그는 벽에 기댄 채 비스듬히 서서 무감정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를 보는 푸른 눈동자가 시리도록 차가웠다.

“에린 스필렛, 잘 들어.”

그리고 눈빛만큼이나 무감정하고 딱딱한 목소리가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에린 스필렛, 이 몸의 이름이구나. 그런데 어디서 들어 봤더라. 나는 그를 모르는데, 그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네 소원대로 해 줬으니, 이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마.”

나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봤다.

여기가 무슨 상황인지, 어디인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막 결혼식을 치를 남자가 자신의 신부에게 할 말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내가 누굴 만나든, 어딜 가든, 절대로 알려고도 하지 말고 찾지도 마.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란 소리야. 알아들어?”

그렇게 자기 할 말만 마치고 남자는 뒤돌아 나가 버렸다.

쭉 어리바리하게 멍때리고 있다 남자의 말에 어딘가 얻어맞은 듯 정신이 돌아왔다.

“후우, 뭐…지, 저 새끼는.”

기분이 나빴다. 그러는 사이 아까 나갔던 하녀들이 들어와 옷이며 머리를 다시 만져 주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봤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문밖에서 다 들은 모양이군. 나는 어쨌든 생각나는 가장 무난한 대답을 했다.

“괜찮아요.”

“아, 안, 안 괜찮으신 것 같은데요? 왜 말을 높이시는 거예요?”

“충격이 크실 만도 하죠……. 자, 일어나세요, 이제 곧 신부가 입장할 차례예요.”

정말 괜찮은데.

왜냐하면 나는 저 남자를 모르니까. 남자만 모르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이 누군지도 잘 모르겠다.

에린 스필렛.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으며 홀로 중얼거렸다. 한 명은 내 앞에서 팔을 잡고 나를 인도해 주었고, 다른 한 명은 뒤에서 풍성한 드레스 자락을 들어 주었다.

길고 긴 복도를 지나자마자 이어지는 커다란 홀에서 밝은 빛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자연스럽게 눈을 찡그리며 그 홀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사람이 단상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배분되어 앉아 있었고, 화려한 샹들리에가 천장에서 반짝거렸다.

이미 신랑은 입장한 후였다.

곧 입장할 신부에게 시선이 몰렸다. 그들의 표정은 각양각색이었다. 경멸하듯이 바라보는 사람, 무표정한 사람, 부러워 죽으려는 사람, 그냥 아예 시선을 피해 버리는 사람.

익숙하지 않은 높은 구두가 벌써 발을 아프게 했다. 아픈 거로 봐선 정말 꿈이…… 아닌 건가?

내 앞에 일직선으로 깔려 있는 카펫 양옆에는 꽃들이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다.

나는 그 꽃길 맨 끝에 서서 기다리면서도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나는 누구이고, 여긴 어디인가. 계속해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그러는 사이 저 앞에 선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정말 보기 싫은 걸 봤다는 듯이.

나는 굳이 피하지 않았지만, 남자가 먼저 피했다. 그렇게 시선을 돌리던 남자의 굳은 표정이 어느 한 곳에 이르자 갑작스레 풀어졌다.

갑자기 왜……?

남자의 시선이 머문 곳에는 가녀린 갈색 머리 여인이 앉아 있었는데, 뒤통수밖에 보이지 않아 정확히는 몰라도 그 여자 또한 남자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남자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아련해진 얼굴로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벙긋거렸다.

나는 똑똑히 봤다.

남자는 저 멀리 앉아 있는 여자에게 ‘사랑해’라고 말하고 있었다.

기가 막히는군. 그 말을 꼭 이 자리에서, 이 순간에 해야만 하나.

너무 어이가 없어 실소가 나왔다.

솔직히 말하면 내 일이 아니라서 그런지, 한 편의 코미디 영화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는 와중 신부의 입장을 알리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곡조를 따라 한 발 내딛는 순간 몸이 휘청하며 무너져 내렸다.

결혼식에서 신부가 넘어지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넘어지던 순간, 기억이 떠올랐다.

에린 스필렛.

이 이름은 어느 소설 속 조연의 이름이었다.

에린은 남주인공과 계약 결혼한 후, 여주인공에 대한 질투에 미쳐 버렸다.

그녀를 번번이 죽이려 하지만 매번 실패하자, 결국 짝사랑하던 남주까지 죽이려 드는 집착의 화신 같은 캐릭터였다.

지금은 에린 스필렛이 신부였지만, 이 소설 속에서 그녀는 명백히 불청객이었다.

저기 서 있는 내 남편이자 이 소설 속 남주인공과 하객으로 앉아 있는 여주인공이 주고받는 눈빛이 그 증거였다.

주위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이제야 제대로 들렸다.

정말, 내가 에린 스필렛…이라고?

믿을 수 없는 현실 속에 다시 일어나 걸으려는데, 한쪽 구두 굽이 부러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하, 이러니 넘어질 수밖에.

나는 그 자리에서 양쪽 구두를 벗어 손에 들었다. 휘둥그레지는 눈들이 나를 향했다. 드레스도 대충 구겨서 걷기 좋게 들고는 빠른 걸음으로 단상을 향해 걸어갔다.

누가 뭐라 하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나로서는 다 모르는 사람들이었으니.

남주인공에게도 이 자리에서 이 결혼 무효로 돌리고, 그냥 저 여자랑 결혼하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간신히 떠올린 원작에서, 에린 스필렛에게는 나름 이 결혼을 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에게는 엄청난 빚이 있었고, 그것을 갚지 못하면 당장이라도 팔려 갈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 결혼식은 그 엄청난 빚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나는 남주인공 앞에 마주 서고 나서야 잡았던 드레스를 내리고 똑바로 섰다.

그는 내 장갑 낀 손끝을 아주 살짝 잡고 단상을 향해 나란히 섰다.

나는 부케 대신 한 손에는 굽이 부러진 구두를, 다른 손에는 나를 싫어하는 남자의 손을 잡고 있었다.

“루퍼트 클리포드 소공작은 에린 스필렛 백작을 아내로 맞이하여…….”

소설 속이라 그런지 익숙한 대사들이 귓가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남자의 이름만큼은 똑똑히 머릿속에 박혔다.

루퍼트 클리포드 소공작.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정말 여기가 소설 속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등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 와중에도 루퍼트는 어떻게든 뒤를 보려 애쓰고 있었다. 잘생긴 남자가 그러고 있는 게 참 안쓰러워, 어쩐지 나는 그때 그의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아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대신관의 길고 긴 축복 연설이 끝나고, 이제 키스타임이었다.

“신랑 신부는 여신 테르사와 여기 계신 모든 하객 앞에서 입맞춤하여 이 혼인이 성사되었음을 증명하라.”

아, 이번엔 얼마나 싫어하려나.

마주 보고 서자, 그의 찌푸려진 미간이 제일 먼저 들어왔다.

나라고 좋을 리가 없는데.

아니지. 에린 스필렛은 그래도 루퍼트를 좋아한다는 설정이었으니, 좋아했겠구나.

루퍼트가 이를 악물고 주먹까지 꽉 쥐고 있는 걸 봤다. 나는 드레스 자락을 꽉 잡고 눈을 감았다.

어차피 그냥 보여 주기 용이니까 입술만 대거나, 아니면 대는 척만 하고 끝날 수도 있었다. 그렇게 위안하며 눈을 감고 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닿는 감촉이 없었다.

살짝 실눈을 뜨고 보니 루퍼트는 여전히 꼿꼿이 선 채였다.

뭐야, 안 할 거야?

나는 언뜻 보이는 하객들의 표정에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결혼식에서 여자 혼자 눈 감고 입술 내밀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웃기고 처량해 보일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화도 나고 창피하고 울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불쌍한 척하는 건 에린 스필렛에게도 나에게도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남에게는 들리지 않을 조용한 목소리로 루퍼트에게 말했다.

“답답하게 굴지 말고 대충 하는 척만 하면 되잖아요? 그것도 못해요?”

내 목소리를 들은 루퍼트가 눈을 크게 떴다. 하, 이런 게 무슨 남자 주인공이야.

결국 내가 먼저 손을 뻗었다. 그의 옷자락을 확 잡아당긴 후, 아주 잠깐 입맞춤을 하는 척만 하고 떼어 냈다.

후, 이게 뭐 별거라고 그리 뜸을 들인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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