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2화
지금 내가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거지.
도저히 믿기지 않는 말에 약간 얼을 먹고 쳐다보자, 프로페테스 4세가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당장은 선포할 수 없지만, 조만간, 늦어도 5년 내에 선포할 거야. 그대도 알다시피 아르티나 왕국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되잖아.”
그건 나 역시 알고 있었다.
그래서 프로페테스 4세가 아르티나 왕국이 아닌 제국이라고 부른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놀라지 않았다.
“저보고…… 시황후가 되어 달라고요?”
내가 놀란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정확하게 지적해서 되묻자, 프로페테스 4세는 약간 긴장한 듯 입매를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계세요?”
“알고 있지. 지금 그대한테 청혼하는 거잖아.”
잘 알고 있네.
하긴 명색의 국왕이 저런 중요한 말을 함부로 뱉을 리가 없지.
“이런 식으로 청혼하는 게 무성의하다는 건 알아.”
프로페테스 4세가 약간 억울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하지만 공이 갑자기 연방국을 설립한 데다가, 의회까지 뚝딱 만들어 내니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그래. 왕국 귀족들이 얼른 나보고 돌아오라고 성화이기도 하고.”
“왕국을 오래 비우긴 하셨죠.”
제국과 전쟁한 시간까지 다 합하면 석 달 가까이 비웠으니, 아르티나 왕국 귀족들이 성화인 것도 당연했다.
“그래서 공에게 말하는 거야. 나랑 결혼해 달라고.”
“…….”
“물론 정말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건 아니야.”
프로페테스 4세가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열었다.
그 안에는 커다란 다이아와 작은 루비가 촘촘하게 박힌 반지가 있었다.
솜씨를 봐서 절대 하루아침에 만들 수 있는 작품은 아니었다.
못해도 6개월은 걸렸을 것 같은데, 그 말은…….
“예전부터 저한테 청혼하실 생각이셨군요.”
“맞아. 아카데미에서 공과 계약을 한 그날부터, 공을 내 곁에 두고 싶다고 생각했어.”
그렇게 오래됐을 줄이야.
프로페테스 4세가 내게 마음이 있다는 건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지만, 얼마 되지 않았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니 조금 놀라웠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해서 그럴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
프로페테스 4세의 표정이 보기 드물게 진지했다.
“오히려 더욱 간절해졌어. 공과 남은 인생을 함께 살고 싶다는 마음이 더욱 커졌다고.”
그는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반지 상자를 내밀었다.
“그러니 나와 결혼해 주겠어? 평생 그대를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할게.”
애절하게 부딪쳐 오는 마음이 버거웠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단호하게 거절했겠지만, 프로페테스 4세에게 도움을 받은 게 많으니 그럴 수가 없었다.
되도록 그가 상처받지 않는 쪽으로 거절하고 싶었다.
참으로 웃긴 생각이지.
세상에 상처받지 않는 거절 같은 건 없는데.
나는 프로페테스 4세가 내민 반지 상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저는 레오폴드 영지를 비롯한 연방국 소속 영지들을 돌봐야 해요.”
프로페테스 4세가지지 않고 대답했다.
“황후가 되어도 그건 할 수 있어.”
“그리고 레오폴드 영지를 떠날 생각도 없고요.”
그는 이번엔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나는 떨리는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국왕 전하께서 왕국을 버리고 레오폴드 영지로 오실 수 있나요?”
“……!”
“그러면 전하와 결혼하는 걸 생각해 보겠어요.”
진심이 아닌 빈말이었다.
프로페테스 4세가 절대로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서, 그가 스스로 마음을 단념할 수 있게 던진 거짓말.
“……국왕이 나라를 버리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이것 봐. 예상했던 결과에 나는 웃으며 반지 상자를 덮었다.
“이 반지가 좋은 주인을 찾아가길 진심으로 바랄게요.”
* * *
“프로페테스 4세가 청혼했다며?”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청혼할 때, 그 방에는 나와 프로페테스 4세 밖에 없었는데?
혹시 몰라 밖에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들도 물린 터라 엿들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페르데스가 어떻게 안 거지?
깜짝 놀라며 되묻자, 페르데스가 불만스럽게 대답했다.
“어떻게 말했긴. 그 놈의 호위 기사라는 자가 떠벌리고 다녀서 알게 됐지.”
“호위 기사라면 로고스 경이요?”
“로고스인지 로구스인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놈이 떠들었어.”
로고스 경이 약간 입이 가벼운 편이긴 하지만, 설마 이런 것까지 떠들고 다닐 줄이야.
조금 곤란하네. 나중에 로고스 경을 만나면 입단속을 시켜야겠어.
“그래서, 반응을 보니 정말 그 놈이 청혼했나 보네?”
“하긴 했는데, 거절했어요.”
“……그래?”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기분이 풀렸는지 페르데스는 웃었다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하여간 그 놈,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는데 역시 다 이유가 있었어.”
“그건 그냥 싫어했던 거 아니에요?”
“아니야. 그 놈이 그대에게 시커먼 꿍꿍이를 품고 있는 걸 알고 싫어한 거지.”
“시커먼 꿍꿍이를 품고 있는 건 페르데스 님 역시 마찬가지잖아요.”
정곡을 찌르자 할 말이 없는지, 페르데스는 입을 다물면서도 눈썹을 들썩이며 불만을 표현했다.
“내가 그대에게 처음으로 청혼 한 남자가 되고 싶었는데.”
뭐야. 그게 불만이었던 건가. 귀엽긴.
“국왕 전하가 청혼하지 않았더라도 페르데스 님이 처음이 되는 건 불가능해요.”
이미 수도 없이 청혼을 받았으니까.
“허, 뭐야. 도대체 어떤 놈이 또 그대한테 청혼을 한 건데?”
“워낙 많아서 다 말씀드릴 수가 없는데요?”
지난 생까지 더하면 두 자릿수가 훨씬 넘었으니까.
내 대답에 상당히 충격을 받은 듯 페르데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말도 안 돼. 이건 말도 안 돼.”
반응이 너무 귀여워서 더 놀리고 싶었지만, 그러면 진짜로 울 것 같으니까 그만둬야지.
“페르데스 님이 처음은 아니지만, 마지막은 될 수 있겠네요.”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사탕을 주듯이 말을 던지자, 페르데스의 눈이 함박만큼 커졌다.
나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부디 빨리 쾌차하셔서 제게 청혼해 주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 * *
“……그러고 보니까, 나 이제 황자 아니잖아.”
제국이 무너지고, 제국의 황족들은 모조리 신분을 박탈당했을 뿐만 아니라 평민 혹은 노예로 강등됐다.
페르데스는 아델의 약혼자이니 다들 어느 정도 예우를 해 주지만, 그를 황자 전하라고 부르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페르데스 님. 혹은 공자님.
다들 그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 어정쩡한 호칭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럼 난 이제 평민인가?”
“일단은 그렇죠.”
“그럼 앞으로 아가씨라고 불러야겠네. 아니, 불러야겠네요.”
아델은 질색하며 닭살이 돋은 팔을 쓰다듬었다.
페르데스가 제게 존댓말을 쓰는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닌데, 이상하게 소름이 끼쳤다.
“그냥 평소대로 말하세요.”
“일개 평민의 신분으로 어찌 아가씨에게 그러겠습니까?”
“하지 말라니까요.”
“이제 익숙해지셔야지요.”
아까 아델이 놀린 것에 대해 복수라도 하려는 건지, 하지 말라는 데도 페르데스는 계속 존댓말을 했다.
“자꾸 그러면, 저 화낼 거예요.”
“알았어. 안 할게.”
아델이 엄포를 놓은 후에야, 페르데스는 비로소 장난을 그만뒀다.
“하지만 분명 말이 나올 거야. 안 그래도 패전국의 황자였던 내가 그대와 약혼 관계인 것에도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내가 예전처럼 그대에게 반말을 쓰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할 거라고.”
“전 신경 안 써요.”
어차피 내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놈들인데, 구태여 신경 쓸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내가 신경 쓰여. 뭣도 아닌 놈들이 그대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걸 들으면 짜증이 치밀어 올라.”
아델은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만약 반대의 입장이었다면,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페르데스에 대해 떠드는 걸 들었다면 저 역시 화가 났을 테니까.
“그래서 존댓말을 쓰려고 했는데, 그대가 싫다고 하니 다른 방법을 쓰자.”
“다른 방법이요?”
“응. 그대도 나한테 말을 놓는 거야.”
이 무슨 황당한 방법인지.
아델이 어처구니가 없어 쳐다보자, 페르데스가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애초에 내가 그대보다 어리기도 하고, 이제 신분까지 낮으니 더 이상 존댓말을 할 필요가 없잖아.”
“그건 그렇지만…….”
“그러니 편하게 말을 놔. 그래도 수군거리는 사람은 분명 있겠지만, 그래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덜할 거야.”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선뜻 그러겠다고 하지 못하는 건 어색하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을 잘 놓는데, 이상하게도 페르데스에게는 그러는 게 어려웠다.
“얼른 해 봐.”
“…….”
“어서 해 보라니까?”
완곡한 강요에 아델은 더듬더듬 그의 이름을 말했다.
“페, 페르데스.”
평소와 달리 ‘님’을 빼고 그의 이름만.
그러자 페르데스가 봄날에 피는 꽃처럼 흐드러지게 웃으며 아델의 손을 붙잡았다.
“응, 아델.”
* * *
첫 번째 생의 끝은 겨울이었다.
두 번째 생의 끝은 여름이었고.
세 번째 생의 끝은 가을이었으니.
이번 생의 끝은 봄이려나,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영원히 끝나지 않는 아름다운 봄이 찾아왔다.
<내 남편은 내가 정한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