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1화
대륙의 절반을 지배했던 제국이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그 사실도 놀라웠지만, 더 놀라운 건 이번 전쟁을 주도한 사람이 제국의 검이라고 불렸던 레오폴드 공작가의 가주인 아델 레오폴드라는 거였다.
레드 드래곤의 축복을 받고 퓨라를 대부분 독점하며 기고만장하더니, 기어코 제국까지 삼키는구나.
은혜를 몰라도 유분수지,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면 안 된다던데.
다들 혀를 내차는 가운데, 황제가 저지른 만행들이 대륙 전체에 낱낱이 밝혀졌다.
황제는 영생을 살고 싶어 디아볼로스라는 끔찍한 마법을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선대 레오폴드 공작을 죽이고, 그의 자식들도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가 그 사실을 안 아델 레오폴드까지 죽이려고 했다는 사실까지 밝혀지자 그녀를 욕하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다물었다.
그 와중에 사람들의 관심은 아델과 페르데스에게 옮겨 갔다.
과연 아델 레오폴드는 패전국의 황자인 페르데스와 파혼할 것인가.
아니면 결혼할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연히 파혼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델의 입장에서 이 약혼 관계를 유지할 이유가 없으니까.
일부는 진심으로 사랑해서 한 약혼이니, 결혼까지 갈 수 있다고 말했고.
또 일부는 페르데스가 먼저 아델을 버릴 거라고 말했다.
어찌 됐건 간에 아델은 그의 부친과 가족들을 죽였으니까.
병원으로 이송되자마자 의식을 잃었던 페르데스는 사람들의 어마어마한 관심 속에서 눈을 뜨게 되었다.
제국이 무너진 지 약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 * *
페르데스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아델은 하던 일도 내팽개치고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페르데스 님!”
아델이 병실 안으로 들어오자, 그의 상태를 진찰하던 의원들이 조용히 자리를 비켰다.
성큼, 침대맡으로 다가온 아델이 페르데스의 상태를 요목조목 살폈다.
“괜찮으세요? 어디 아픈 곳은요?”
페르데스가 창백한 얼굴에 미소를 그렸다.
“없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러기엔 온 몸이 다 아파.”
당연히 그렇겠지.
그의 상태를 본 의원들이 살아 있는 게 신기하다고 할 정도로 심각한 부상이었으니까.
나 역시 그가 죽은 줄만 알았었고.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지 말씀하세요. 가져다드릴게요.”
“내가 말하는 건 뭐든지 가져다줄 거야?”
“제가 구할 수 있는 거라면요.”
“그럼…….”
페르데스가 가까이 다가오라는 의미로 손을 까딱였다.
아델이 상체를 기울이자, 페르데스는 그녀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좋아한다는 말, 다시 해 줘.”
“……!”
느닷없는 말에 아델은 깜짝 놀라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삽시간에 그녀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왜? 이전에는 잘 해 줬잖아.”
“그때는 페르데스 님이 죽은 줄 알고…….”
“그럼 나는 죽어야 좋아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거야?”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 거지.
할 말을 잃은 아델이 입을 다물자, 페르데스가 푹 고개를 숙였다. 그사이 마른 어깨가 축 늘어졌다.
이에 아델은 안절부절못하며 두 손을 꼭 움켜쥐었다.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해 놓고, 왜 또 그러고 있는지.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진심을 말하는 건데 뭐가 두려워서 이리 망설이는 건지.
아델은 크게 심호흡하며 울렁이는 마음을 진정시킨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좋아해요.”
처음은 어려웠지만, 두 번째는 쉬웠다.
“페르데스 님, 좋아해요.”
약간 떨리던 마른 어깨가 멈췄다.
다시 고개를 든 페르데스의 얼굴에는 슬픈 기색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설마?
“슬픈 척 연기하신 거예요?”
“음.”
페르데스는 아델의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피웠다.
긍정이라는 의미.
“하.”
그런 줄도 모르고, 혼자 자책했던 저 스스로가 바보같이 느껴져 아델은 헛웃음을 지으며 마른세수를 했다.
그리고 페르데스에게 한마디 하려는데, 눈치 빠른 페르데스가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버석하면서도 뜨거운 열기가 손등을 스치고 지나가자, 거짓말처럼 화가 가라앉았다.
“미안. 이렇게 하지 않으면, 좋아한다는 말을 들을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랬어.”
“…….”
“정말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 테니까, 화 풀어. 응?”
애교 섞인 말에 남아 있던 화조차 완전히 사라졌다.
아델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두 번 다시 그러지 마세요.”
“응. 약속할게.”
“다치지도 마세요.”
이어진 당부에 페르데스는 잠시 멈칫했다가, 그녀의 양손을 완전히 감싸 쥐었다.
“그대도 다치지 않는다고 약속한다면.”
“저는 괜찮아요.”
“그럼 나도 괜찮아.”
괜찮기는. 심하게 다쳤으면서.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날의 일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끔찍했던 황제의 모습이나 그와 치열하게 싸웠던 일은 조금씩 잊혀 가는데.
페르데스가 그녀를 구하기 위해 몸을 던졌던 그 순간은.
살갗이 뜯겨 나가고 사방으로 피가 튀었던 그 순간만큼은 절대 잊을 수 없었다.
피 웅덩이 위에 죽은 듯이 누워 있던 페르데스의 모습도 눈앞에 선명했고.
“아직 화났어?”
도저히 잊히지 않는 끔찍한 잔상의 주인공도 페르데스였지만, 그 잔상에서 꺼내 준 사람도 페르데스였다.
아델은 페르데스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그의 뺨을 만졌다.
따뜻하다.
그가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정말 무서웠어요.”
당신을 잃을까 봐, 정말로 무서웠어요.
아델이 미처 하지 못한 말이 뭔지 안 페르데스가 눈을 지그시 감고 그녀의 손에 얼굴을 기댔다.
“나도 무서웠어.”
두 번 다시 너를 보지 못할까 봐 정말 무서웠어.
하지만 그것보다는 아델을 구했다는 안도감이 커서, 페르데스는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있었다.
그래도 살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만약 기적적으로 살게 된다면, 다른 욕심을 부리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는데.
“정말로 좋아해요, 페르데스 님.”
“당신과 같은 마음으로 좋아하고 있어요.”
그 말을 들으니 욕심을 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좋아해, 아델.”
그는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기회를 발로 걷어차는 바보가 아니었다.
“정말로 좋아해.”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 교차했다.
페르데스는 일렁이는 초록색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그녀를 끌어당겼다.
커다란 두 손으로 아델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고.
곧이어 촉촉한 입술 위에 마른 제 입술을 가볍게 가져다 댔다.
마음은 조급하지만, 너무 갑작스럽게 다가가면 그녀가 놀랄 테니 시작은 가볍게.
어미가 아기 새에게 먹이를 넘겨주듯이 가볍게 입술을 베어 물자,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페르데스의 모습을 담고 있던 눈동자가 얇은 눈꺼풀 아래로 사라졌다.
아델은 그의 얼굴 주변에 어정쩡하게 대고 있던 손을 아래로 내려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지금보다 더 가까이 다가와도 된다는 무언의 허락.
그걸 바로 알아들은 페르데스는 좀 더 깊이 입을 맞췄다.
뜨거운 호흡과 열기가 얽히고설켰다.
페르데스의 문병을 온 니콜 테시스가 무심코 문을 열었다가 그 모습을 보고 기함하고 도망치는 줄도 모른 채.
두 사람은 오로지 서로에게만 집중했다.
* * *
연합국에 속한 나라들이 가장 탐내는 제국의 땅은 당연 레오폴드 영지였다.
퓨라 채굴권만 얻어도, 지금보다 몇 배는 더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으니, 다들 그걸 보고 전쟁에 참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제국이 멸망하기 전, 레오폴드 영지가 독립하면서 그들은 순식간에 닭 쫓던 개가 되어 버렸다.
그건 아쉬웠지만, 아델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애초에 성공할 수 없었던 계획이었기에 다들 억지로 아쉬움을 삼켰다.
레오폴드 영지를 가지지 못했으니, 다른 좋은 영지를 가져야지.
각 왕국에선 그렇게 생각했지만, 가지고 싶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공적에 따라 전리품을 선택하는 순서가 정해지니, 다들 제 차례가 오기 전에 좋은 전리품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랐다.
첫 번째로 전리품을 선택하는 영광을 가져간 사람은 아델이었다.
과연 아델은 어떤 전리품을 선택할까.
가장 좋은 땅을 가졌으니, 그다음으로 좋은 건 남겨 줬으면 좋겠는데.
모두 전전긍긍하는 가운데, 아델은 북부령을 가지겠다고 말했다.
다른 좋은 전리품을 두고 북부령을 선택하다니.
연합국 사람들은 의아해했지만, 거절할 이유가 없으니 기꺼이 찬성했다.
그리고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델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게 됐다.
“레오폴드 가문을 비롯한 대륙의 북부 가문들은 영지의 번창을 위해 연합했기에, 오늘부터 오르토스 연방국이라고 칭한다.”
* * *
“연방국을 설립한 걸 축하하네, 레오폴드 공.”
프로페테스 4세가 커다란 프리지어 꽃다발을 내밀며 말했다.
보석이나 그런 걸 들고 왔다면 부담스러웠을 텐데, 꽃다발이니 가벼운 마음으로 받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의회도 만들었겠다, 이제 의장이 되는 건가?”
“아무래도 그렇게 될 것 같아요.”
나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았지만, 다른 의회원들이 나 말고는 의장을 맡아 줄 사람이 없다고 만장일치로 찬성한 탓에 어쩔 수 없이 맡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흐음, 그래?”
프로페테스 4세는 뭔가 못마땅하다는 듯 눈썹을 찡그리며 턱을 쓰다듬었다.
“왜 그러세요?”
“고작 의장 자리에 만족할 수 있겠어?”
“네?”
“아르티나 제국의 시황후가 되는 건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