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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화 (254/262)

260화

황제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자, 아델이 뒤집어쓰고 있던 용의 거죽이 사라졌다.

눈동자가 다시 초록색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쥐고 있던 검도 제 역할을 다했다는 듯 한 줌의 재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붉은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점점 밝아지는 하늘을 바라보던 아델은 이내 눈을 감았다.

그토록 바라던 복수를 성공했는데도 속이 시원하긴커녕 오히려 답답하고 허전한 건, 너무 커다란 걸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페르데스.

황제와 치열하게 싸우는 와중에도 잊지 못한 이름이 가슴에 사무쳤다.

아델은 페르데스가 있는 쪽을 돌아봤다.

“아가씨.”

어느덧 뒤로 다가온 알도르가 작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그러나 아델은 알도르를 돌아보지 않았다.

하염없이 페르데스 쪽을 바라보다가 못을 박은 것처럼 땅에 붙이고 있던 발을 뗐다.

저벅, 저벅.

그녀가 남긴 발자국을 따라 작은 불꽃이 춤을 추듯이 일렁거렸다.

쓰러진 페르데스의 앞에 서 있던 비블로스가 아델을 돌아봤다. 항상 의기양양했던 눈동자가 서글프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눈빛이 의미하는 바를 알 것 같아 아델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비블로스가 와서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하긴 드래곤이 신도 아니고,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건 알지만, 막상 그 사실을 마주하니 참담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깊은 상실감이 발끝부터 기어올라 왔다.

‘그냥 실패할 걸.’

그래서 죽었더라면, 다시 회귀해서 페르데스도 살았을 텐데.

복수해야 한다는 사실에 눈이 멀어, 더 큰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때늦은 후회가 그녀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페르데스의 곁에 주저앉은 아델은 두 팔을 뻗어 그를 꽉 끌어안았다.

“죄송해요.”

투명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페르데스의 옷깃을 적셨다.

“저 때문에…… 제가 괜한 욕심을 부린 탓에……. 정말로 죄송해요.”

아델은 자신의 마음을 좀 더 제대로 표현하고 싶었지만, 머릿속이 온통 슬픔에 젖어 죄송하다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버티지 말고 말할 걸 그랬어요.”

그랬더라면 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을까.

모르겠다.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일이니, 어떤 결과가 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나 확실한 건 말하지 않은 게, 복수에 눈이 멀어 소중한 걸 잃고 나서야 그 사실을 깨달은 게 몹시 후회가 된다는 거였다.

“좋아해요.”

뒤늦게라도 솔직하게 말하면 무거운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해질까.

뼛속 깊은 곳까지 파고든 후회가 조금은 날아갈까.

“정말로 좋아해요, 페르데스 님.”

“…….”

“당신과 같은 마음으로 좋아하고 있어요.”

미리 말하지 못해서 죄송해요.

정말로 죄송해요.

줄곧 외면했던 감정들을 입 밖으로 뱉어 봤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오히려 이 와중에도 지독한 이기심을 버리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해서, 아델이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던 그때.

“……정말?”

“!”

기적이 일어났다.

아델은 깜짝 놀라며 페르데스를 내려다봤다.

그러자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라고 생각했던 황금색 눈동자가 보였다.

황제와 닮은 것 듯하지만, 전혀 다른.

자신이 너무나도 사랑하는 눈동자가.

“죽은 거…… 아니었어요?”

혼잣말하듯이 중얼거린 말에 페르데스가 눈썹을 찡그렸다.

“멋대로 사람을 죽이지 마.”

진짜 살아 있다고?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란 말이야?

제 두 눈으로 확인하고도 믿기지가 않아, 아델은 비블로스를 돌아봤다.

비블로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난 아무 말도 안 했다. 너 혼자 착각한 거지.”

누가 봐도 착각할 만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으면서!

아델이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비블로스를 쳐다보고 있는데, 페르데스가 그녀의 옷깃을 잡았다.

깃털이 내려앉듯이 미약한 손길이었지만, 아델은 바로 페르데스를 쳐다봤다.

혼란스럽게 흔들리는 초록색 눈동자와 마주친 페르데스가 웃었다.

그 미소를 마주하는 순간, 감정이 울컥 치솟았다.

살아 있다.

그가 살아 있어.

“다행이다……!”

아델은 두 팔을 뻗어 있는 힘껏 페르데스를 끌어안았다.

이대로 지속됐다면 감동적인 재회가 됐겠지만.

“악!”

“죄, 죄송해요!”

애석하게도 뼈와 근육이 드러날 정도로 깊게 입은 상처가 감동적인 재회를 방해했다.

조금 짜증난다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던 비블로스가 비로소 만족스럽게 웃었다.

* * *

페르데스를 병원에 데리고 가야 하기도 하고.

제국의 일도 마무리해야 하는 터라, 영지의 뒷수습은 알도르 경에게 잠시 맡기고 황급히 수도로 돌아왔다.

페르데스는 비블로스와 함께 병원으로 갔고, 나는 황궁으로 향했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프로페테스 4세가 다른 마음을 먹었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왔네.”

그런 내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그는 처음 약속한 그 자리에서 묵묵히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도 듣는 귀가 있을 테니, 내가 없어졌다는 걸 모를 리는 없고.

그사이 황궁을 장악하고, 제멋대로 주무를 수 있었을 텐데 어째서 묵묵히 자리만 지키고 있었던 건지 궁금해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왜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죠?”

그러자 프로페테스 4세가 웃었다.

“가지고 싶은 걸 얻기 위해선 인내해야 한다는 걸 배웠거든.”

“뭘 가지고 싶으신데요?”

“그건 비밀.”

웃는 얼굴이 굉장히 수상쩍었지만, 내게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 일단 묻어 두었다.

* * *

황제가 없는 제국을 장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황실에 충성심이 남아 있거나 혹은 제 밥그릇을 빼앗기고 싶지 않은 귀족들이 발버둥 치긴 했지만, 오합지졸이었다.

그들은 프로페테스 4세가 이끄는 아르티나 왕국군을 비롯한 연합군에게 쉽게 무너졌다.

국새를 빼앗고, 황좌와 황관을 부쉈다.

이로써 앞으로 만들어지는 대륙의 지도에는 더 이상 제국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패전국의 황족이나 왕족들은 무조건 죽게 되니, 황비를 비롯한 황족들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아등바등했다.

그건 황후 역시 마찬가지였다.

“황태자를 살려 주세요.”

다른 게 있다면 황후는 제 목숨이 아닌 자식의 목숨을 구걸했다는 점이다.

체르노서 때부터 알아봤지만, 황후는 참으로 모성애가 넘치는 여자였다.

“쓸데없는 욕심 부리지 않고 숨어 살 겁니다. 그러니 제발 황태자를 살려 주세요, 공작.”

“공작이 아니라 레오폴드 공입니다.”

레오폴드 영지는 황좌가 부서지기 전, 제국에서 독립했으니까.

“그리고 황태자를 살려 달라는 부탁은 들어 줄 수 없습니다.”

“그 아이가 황족이기 때문인가요?”

“아니요. 황태자는 이미 죽었거든요.”

“……!”

황후가 눈을 부릅뜨며 날 쳐다봤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

“정말로 죽었습니다. 물론 제가 죽인 게 아닌 황제가 죽였습니다.”

나는 알도르 경에게 들은 이야기들을 전부 황후에게 말해 주었다.

황궁 기사들과 함께 황궁을 나왔지만, 수도를 벗어나기도 전에 알도르 경과 함께 부대를 이탈한 것.

다시 황궁으로 돌아온 그 몸을 황제가 차지한 것까지 전부.

황제는 영생을 살기 위해 지금 쓰는 몸이 늙고 병들면 버리고 젊고 싱싱한 몸으로 갈아탔다.

페르데스가 봤던 허물들이 바로 황제가 버렸던 몸이었다.

물론 아무 몸으로나 갈아탈 수는 없고, 자식처럼 같은 피가 흐르는 몸만 가능했다.

그래서 황제는 레오폴드 공작가와 황실의 피가 흐르는 아이를 얻으려고 발악한 것.

그 몸으로 갈아타서, 드래곤 하트의 힘을 마음대로 사용하려고.

하여간 에런 경이 본 황태자는 사실 황태자의 거죽을 뒤집어쓴 황제였다.

내가 치열하게 싸운 황제 역시 동일 인물이었고.

“말도 안 돼. 거짓말이야!”

황후는 여전히 내 말을 믿지 못하고 격렬하게 부정했다.

그럼 직접 확인시켜 주는 수밖에.

“블랑드 8번지에 암흑 상단에서 운영하는 불법 카지노가 있어요. 그곳에 가면 황태자의 유품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황태자는 단순히 도박을 즐기고 싶어서 그곳을 드나든 게 아니었다.

그곳이 바로 황제의 실험실이라서, 황제가 벗어 둔 허물들을 숨겨둔 장소였기 때문에 드나든 거였다.

비록 에런 경과 페르데스에게 들키는 바람에 황제의 궁 지하로 옮기긴 했지만, 이 역시 들켜 다시 카지노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곳이 자신의 무덤이 될 거라곤 생각지 못한 채.

“지금은 현장 조사를 하는 중인지라 가져갈 수 없지만, 나중에 정리가 되면 드리죠.”

“…….”

“참고로 체르노서 황자를 죽인 범인도 황제가 맞았어요. 황제가 그의 시신을 가지고 노는 걸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황제가 날 공격하고자 조종했던 시신들 중에는 체르노서가 있었으니까. 물론 그를 고깃덩어리로 만든 사람이 나라는 사실은 숨겼다.

구태여 말해서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

여전히 내 이야기를 믿지 못한 듯 황후는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다가 다급하게 밖으로 나갔다.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코너 경이 다가와 물었다.

“쫓아갈까요?”

“아니. 괜찮아.”

황후가 어디로 갈지는 알고 있으니까.

“세 시간 정도 있다가 블랑드 8번지에 있는 불법 카지노에 기사들을 보내 황후를 데리고 오면 돼. 황태자의 시신도 수습하고.”

“네.”

너무 잔인하게 구는 것보다 온정을 약간 베푸는 것도 좋을 것 같아 그러려고 했는데.

“황후가 자결했습니다.”

자식의 끔찍한 모습을 본 어미는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자식과 같은 길을 가는 걸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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