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화
검은 드래곤 하트에서 흘러나온 붉은 빛을 휘감고 마치 피를 머금은 것처럼 변했다.
그 검을 바라보는 비탄으로 얼룩진 초록색 눈동자에 이내 분노가 깃들었다.
아델은 페르데스의 상태를 살피느라 잠시 내려놓았던 검을 쥐고 일어섰다.
여전히 의식이 없는 페르데스를 일별한 아델은 여전히 공간에 반쯤 끼어 발버둥 치는 황제를 향해 달려갔다.
바람을 가르며 쇄도했지만, 그녀의 공격은 황제에게 닿지 못했다.
카캉-
후드를 깊게 눌러 쓴 누군가 막은 탓이었다.
아델은 강하게 상대를 밀어냈고, 맥없이 뒤로 밀려난 인영의 후드가 벗겨지면서 시린 은발이 드러났다.
“……알도르 경.”
아델이 이름을 불렀지만, 알도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검을 고쳐 쥐었다. 검 끝에서 아델을 반드시 죽이겠다는 살기가 묻어났다.
그런 알도르의 주변으로 공작가의 사용인들이 하나둘씩 등장했다.
사용인들은 전투 능력이 거의 없으니 몇 명이 나타나도 그다지 상관없었지만, 문제는 알도르였다.
알도르를 상대하면서 황제를 상대하는 건 불가능했다.
알도르를 쓰러뜨릴 때까지 황제가 기다려 줄 리도 없었고.
그냥 알도르를 무시하고 황제를 상대해야 하나.
알도르는 잠깐 고민하는 그 찰나를 기다리지 못하고 다시 아델에게 덤벼들었다.
아델의 검과 알도르의 검이 맞부딪쳤다.
확 가까워진 거리에서 아델과 정면과 눈이 마주친 알도르는 눈썹을 찡그리더니, 이내 눈물을 뚝뚝 흘렸다.
“……죄송합니다.”
작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애처로운 음성이 흘러나온다.
“저도 ……싶지 않은데…… 아가씨를……”
말이 스타카토처럼 끊겼지만, 아델은 알도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가 지금까지 한 일을 사과하고 싶은 거겠지.
황제에게 붙는 척하며 이중 스파이 노릇을 했던 걸.
아델은 알도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그게 맞다고 생각해서 움직인 것일 테니까.
그것만이 나를 지킬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일 테니까.
정말로 두 번째 생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면 더더욱 불안하고 초조했을 것이다.
“저를…… 죽여야 합니다.”
“알도르 경.”
“저를 죽이지 않고는…… 아무것도 끝낼 수가 없습니다.”
알도르가 순간 힘을 빼자, 맞대고 있던 아델의 검이 그의 옷자락을 베었다.
아델이 당황하며 황급히 검을 뒤로 빼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그의 살갗까지 베었을 것이다.
벌어진 옷깃 사이로 드러난 알도르의 가슴에는 디아볼로스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걸 본 아델은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알도르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애원했다.
“제발 저를…….”
“죽이지 않을 겁니다.”
아델은 단호하게 말하며 알도르를 꼭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알도르의 눈이 커졌다. 검을 쥔 그의 손이 움찔했지만, 위로 올라가지는 않았다.
“난 더 이상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아요.”
아버지와 페르데스를 잃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니 죽겠다는 말보다 오래오래 살아서 내 곁을 지켜 주겠다고 말해 주세요.”
아델의 뺨을 타고 흘러내린 붉은 눈물이 황량한 땅을 적셨다.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나와 함께 있어 주겠다고 말해 줘요.”
“아가……씨.”
“제발 부탁할게.”
아델의 간절한 바람을 하늘이 알아 준 걸까.
그녀의 눈물에 젖은 땅을 중심으로 붉은 빛이 폭발하듯이 뿜어져 나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붉은 빛에 닿은 사용인들은 끈이 떨어진 마리오네트처럼 픽픽, 쓰러졌다.
알도르의 가슴팍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던 디아볼로스도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아델을 죽이라는 명령도 완전히 사라졌다.
황제의 복종에서 벗어난 것이다.
두 번 다시 벗어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도저히 믿기지 않는 현실에 알도르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남아 있던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아델도 알도르와 사용인들이 황제의 복종에서 풀려났다는 걸 알았지만, 얼싸안고 기뻐하거나 감격할 시간 같은 건 없었다.
“아델 레오폴드!”
기어코 공간을 부수고 밖으로 나온 황제가 화산이 울릴 정도로 크게 포효했으니까.
아델이 잘라 냈던 두 팔은 어느새 새로 생겼고, 덩치는 더욱 커졌다.
황제가 발을 구르자 쿵쿵,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울렸다.
아델은 검을 고쳐 쥐고 황제를 응시했다.
알도르도 황제와 싸우려고 했으나, 아델이 막았다.
“알도르 경은 쓰러진 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 주세요.”
이대로 있다간 전부 황제의 발에 밟혀 죽을 수도 있으니까.
알도르도 그게 맞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돌아오겠다는 말이 왜 이렇게 기쁘게 들리는 건지.
“기다릴게요.”
아델은 웃으며 짤막하게 대답한 뒤, 황제를 향해 달려갔다.
* * *
뒤늦게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안 비블로스가 왔을 때, 아델은 괴물과 싸우고 있었다.
비블로스는 아까보다 더 커진 괴물을 보며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도대체 저 놈은 어떻게 빠져나온 거야?”
당연히 빠져나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의 결계를 뚫고 현실로 돌아오는 건 드래곤들도 어려워하는 일인지라, 절대 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저런 괴물 따위가 해내다니.
당황스러웠지만,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확실히 저 혼종을 처리할 수 있게 됐으니까.
비블로스가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려는데, 그가 온 걸 안 아델이 소리쳤다.
“나서지 마세요!”
비블로스는 내딛었던 발을 다시 거두며, 괴물과 싸우는 아델을 바라봤다.
때마침 비블로스의 옆에 착지한 아델이 재차 말했다.
“절대로 나서지 마세요. 여기서 대현자님까지 나선다면, 더 엉망진창이 될 거예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비블로스는 괴물과 싸우기 위해 현신하려고 했으니까.
현신하지 않는다고 해도 무지막지한 마법을 퍼부었을 테고, 그러면 화산의 절반이 날아갔을 것이다.
산사태가 일어나 밑에 있는 공작저는 물론 영지도 엉망진창이 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고.
그래도 괴물을 쓰러뜨리는 게 우선이라 생각해서 싸우려고 한 건데, 아델이 말리니 조금 의아했다.
“혼자 싸워도 괜찮겠어?”
“괜찮아요.”
“정말? 내가 보기엔 질 거 같은데.”
“진다고요? 누가요?”
아델이 약간 섬뜩하게 웃으며 되묻자, 비블로스는 흠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이길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무조건 이길 거다.
나를, 영지를,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절대로 질 수 없었다.
더불어 아버지와 페르데스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저는 이길 겁니다.”
아델이 강력한 의지를 담아 검을 움켜쥐자, 그에 호응하기라도 하듯 드래곤 하트에서 흘러나온 빛이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나를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나?]
낯선 듯 익숙한 목소리였다.
지하실에서 들었던 목소리.
아델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그 순간. 드래곤 하트가 깨지면서,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레오폴드 가문의 선조가 깨어났다.
* * *
쿠아앙-
레드 드래곤의 잔상이 포효하자 공기가 흔들렸다. 황제가 포효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잔상은 긴 메아리를 남기고 아델의 몸에 흡수됐다.
그러자 싱그러웠던 초록색 눈동자가 붉게 물들면서, 용의 가죽을 뒤집어쓴 것처럼 아델의 피부 위로 드래곤의 비늘이 돋아났다.
아델은 제 몸의 일부가 된 것 같은 검을 고쳐 쥐며, 마지막 전투를 위해 달려갔다.
“이런, 이런.”
잠깐이지만, 오래 전에 헤어진 동족을 만난 비블로스가 실소하듯이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애송이라고 했던 거, 취소해야겠네.”
마냥 어린 줄 알았던 아이는 어느덧 훌륭한 어른이 되어 있었다.
어쩌면 자신보다 더 훌륭한 어른이.
“내가 괜한 걱정을 한 거였어.”
이럴 줄 알았다면 나서지 않았을 텐데.
괜한 걱정에 나서서 귀찮은 일에 휘말린 건 성가셨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가리라.
돌아선 그는 곧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는 페르데스를 발견했다.
* * *
커다란 화산이 절반 이상 날아가고, 위풍당당했던 레오폴드 공작저의 일부가 부서질 정도로 아주 격렬한 싸움이었다고 했다.
영지 곳곳에도 싸움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영지민 중에 어떤 싸움이 있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상하게도.
* * *
쿵-
두 팔과 다리를 잃은 몸뚱이가 볼품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얻은 힘으로 다친 부위를 치료하고, 잘려 나간 부위를 재생했었지만, 모든 일에는 한계라는 게 존재하는 법이었다.
“아니야, 아니야!”
한계라니.
이 힘을 얻기 위해 어떤 짓을 저질렀는데, 고작 한계 때문에 모든 걸 잃을 위기에 처하다니.
“아니라고!”
황제는 도저히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마구 소리를 질렀다.
그 목소리가 쇠를 긁는 것처럼 끔찍해서, 아델은 눈썹을 찡그리며 촌평했다.
“시끄러워.”
그런 아델을 바라보는 황금색 눈동자가 분노로 일그러졌다.
이 모든 건 아델 레오폴드 때문이었다.
쟤만, 저 아이만 없었더라도 성공했을 텐데.
그토록 바라던 영생을 얻을 뿐만 아니라 시간을 되돌리는 힘까지 얻었을 텐데!
“너만 없었더라도……!”
“성공했을 텐……!”
콰직.
“시끄럽다고 했지.”
얼굴을 뭉개자 황제는 더 이상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지 못했다.
“이제야 조용하네.”
아델은 비로소 만족하며 저 멀리 떠오르는 해를 바라봤다.
유난히 길었던 새벽이 드디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