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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8화 (252/262)

258화

황제가 드래곤 하트를 건드리자 새빨간 불꽃이 피어올랐다.

불꽃은 괴물의 몸을 양식 삼아 빠르게 몸집을 키웠다.

“키아아아악!”

황제는 무척 괴로워하며 뒤로 물러났다. 몸에 붙은 불을 끄려는 듯 바닥에 몸을 비비며, 마구 괴성을 질렀다.

그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아델이 아니었다.

땅을 박차고 허공에 뛰어오른 아델은 검을 수직으로 세워 빠르게 떨어졌다.

괴물의 몸이 강철처럼 단단하니, 무게와 가속까지 더해 한 번에 꿰뚫을 생각이었는데, 상대는 생각보다 더 녹록하지 않았다.

콰직-

회심의 공격은 목표했던 심장이 아닌 팔을 꿰뚫었다.

아델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검을 쭉 아래로 그어, 팔을 아예 잘라 냈다.

순식간에 팔을 잃은 황제가 눈을 희번덕하게 뜨며 다른 팔을 휘둘렀다.

아델은 재빠르게 뒤로 물러나며 황제의 공격을 피했다.

자신은 팔을 잃었는데, 아델은 아무것도 잃지 않은 게 퍽이나 억울했는지 황제는 분노에 찬 포효를 하며 꼬리로 땅을 세게 내리쳤다.

그러자 주변에 쓰러져 있던 시체들이 하나둘씩 일어났다.

흐느적, 걷는 모양새가 공작저의 사용인들과 비슷했다.

‘역시 사용인들을 조종한 건 황제였어.’

아델은 검을 고쳐 쥐고, 바로 뒤까지 접근한 시체의 목을 베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머리를 완전히 으깼다.

사용인들은 소중한 가족이라서 벨 수 없었지만, 이 놈들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미 죽은 사람이니 가책 같은 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델은 저를 향해 달려드는 시체들을 무자비하게 도륙한 뒤, 다시 황제 쪽으로 달려들었다.

* * *

인간이길 포기한 무지막지한 괴물과 싸우는 건 다소 버거웠지만, 그렇다고 아델이 밀리는 것도 아니었다.

드래곤 하트의 힘 덕분인가?

모르겠다. 지금 확신할 수 있는 건, 비블로스가 마법을 완성할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거였다.

쾅, 쾅, 쾅-

……벌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나.

어느덧 황제의 몸집이 집채만큼이나 커지자, 아델은 가볍게 혀를 차며 뒤로 물러났다.

저런 놈과 맞서 싸우는 건 무리니, 도망치면서 시간을 벌 생각이었다.

그러나 괴물이 생각보다 너무 빠르기도 했고, 잇따른 격전으로 많이 지친 탓에 계속 도망칠 수도 없었다.

도대체 언제 되는 거지? 궁금했는데, 때마침 비블로스가 소리쳤다.

“다 됐으니, 얼른 돌아와라!”

“적절한 타이밍이네.”

좀 더 늦었다면, 괴물에게 붙잡혀 혼쭐이 났을 것이다.

아델은 흙먼지를 내서 황제의 시야를 가린 뒤, 비블로스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금방 시야를 확보한 황제가 빠르게 쫓아왔다.

거리는 급격하게 좁혀졌고, 피와 흙먼지가 덕지덕지 묻은 거대한 손이 아델의 작은 머리통을 움켜쥐기 직전.

타악-

아델은 거의 몸을 날리다시피 해서 보라색 마법진 안으로 들어갔다. 비블로스는 즉시 마법진을 작동시켰다.

방어 마법도 같이 구성해 둔 덕분에 황제는 마법진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쾅, 쾅-

괴물은 보이지 않는 방어벽을 부수려는 듯 외팔로 세게 내려찍거나, 발로 걷어찼다.

어찌나 세게 내려치는지 보이지 않는 방어벽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는 게 느껴졌다.

“진짜 짜증 나고 성가신 놈이야.”

비블로스의 촌평을 마지막으로 보라색 빛이 그들을 감쌌다.

* * *

풀 한 포기 나지 못한 황량한 땅에 보라색 기둥이 생겼다.

기둥은 점점 얇아지다가 결국 사라졌고, 그 자리엔 비블로스와 아델만이 남아 있었다.

아델은 그녀를 둘러쌌던 빛무리 때문에 잠시 멀었던 시야가 돌아오자, 주변을 크게 둘러봤다.

익숙한 풍경. 레오폴드 공작저의 뒤에 있는 화산이었다. 화산 아래 정적에 휩싸인 레오폴드 공작저가 보였다.

“돌아왔네요.”

“그런 것 같군.”

비블로스는 흙먼지가 가득한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를 닦았다.

“도대체 아까 그건 뭐야? 태어나서 그렇게 흉측한 괴물은 처음 봤네.”

“흉측하죠. 영생을 살고 싶어서 인간이 되길 포기한 자니까요.”

비블로스가 눈썹을 치켜들며 아델을 올려다봤다.

“넌 그게 뭔지 알고 있나 보지?”

“네. 제국의 황제예요. 이제 곧 아니게 되겠지만요.”

“그런 게 제국의 황제라고?”

비블로스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묻자 아델은 말없이 웃었다.

그녀 역시 황제가 그런 흉측한 괴물이 됐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황제는 어떻게 되는 거죠? 계속 거기 있는 건가요?”

“아마도. 마법을 잘 모르는 것 같기도 하고, 디아볼로스를 쓰느라 마나는 물론 생명력까지 소모한 것 같으니까 빠져나오지 못할 거야.”

“인간은 디아볼로스를 쓰지 못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네요.”

“인간은 못 써.”

비블로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 녀석은 인간이 아닌 거지. 네 입으로 말했잖아. 인간이길 포기했다고.”

“그래도 태생은 인간이잖아요.”

“과거는 중요하지 않아. 지금 무엇인지가 중요하지. 너도 드래곤 하트의 힘을 이용하면 디아볼로스를 쓸 수 있어.”

그 말에 아델은 검 손잡이에 박힌 드래곤 하트를 내려다봤다.

이게 그렇게 대단한 물건인가. 그냥 봐서는 잘 모르겠는데.

“왜? 드래곤 하트의 힘이 탐나?”

“아니요.”

부친은 이 힘을 쓰면 쓸수록 인간이 아닌 자가 될 거라고 했다.

그렇다면 필요 없었다.

그녀는 인간으로 남고 싶었으니까.

황제처럼 괴물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 의지를 보여 주기라도 하듯 아델은 검을 검집에 꽂아 넣었다.

“아, 이럴 게 아니라 페르데스 님을 데리고 와야겠어요.”

뒤늦게 페르데스가 이곳에 있다는 걸 떠올린 아델이 그를 언급하자, 비블로스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뭐야. 그 녀석도 여기 와 있어?”

“네. 이곳으로 오는 텔레포트를 작동시키느라 마법 반동 때문에 손을 크게 다치셔서, 잠시 쉬고 계세요.”

“이곳으로 오는 텔레포트? 설마 내가 쓰는 그거?”

“거기까지는 모르겠는데요.”

“맞을 거야. 내가 이전에 그 녀석에게 텔레포트 마법진을 보여 준 적이 있으니까.”

그래. 말 그대로 잠깐 보여 주기만 했을 뿐, 따로 마법진에 대해서 알려 준 건 없었다.

그런데 잠깐 본 걸 따라 해서 작동시켰다니. 비블로스는 황망해하며 중얼거렸다.

“전부터 느꼈지만 그 녀석, 보통 놈이 아니군.”

“페르데스 님이 대단하시긴 하죠.”

“약혼자라고 너무 편애하는 거 아니야?”

비블로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되묻자 아델이 어깨를 으쓱였다.

“전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요.”

“그게 편애라니까.”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그것보다 페르데스 님을 데리고 올 테니, 수도의 신전으로 데리고 가 주세요.”

“마법 반동 때문이라면 내가 치료해 줄 수 있어.”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아델은 곧바로 페르데스를 찾아 나섰다.

분명 이 근처에 있었던 것 같은데.

“페르데스 님, 어디 계세요!”

페르데스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찾으러 다니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살기가 느껴졌다.

뭐지. 이 근처에도 적이 있는 건가?

아델이 재빨리 검을 뽑아 들고 주변을 둘러보는 그때.

“……!”

공간이 유리처럼 와장창 깨지더니, 거대하고 더러운 손이 튀어나왔다.

아델은 당황하며 황급히 몸을 뒤로 뺐지만, 팔을 붙잡히고 말았다.

하필 검을 쥔 손이라서 공격할 수도 없었다.

곧이어 인간의 형체를 반 정도 잃어버린 황제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황제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세우며 아델의 목덜미를 물어뜯으려는 그 순간.

“아델!”

페르데스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새카만 그림자가 그녀를 덮치듯이 끌어안았다.

덕분에 아델은 무사했지만, 대신 그녀를 감싼 페르데스의 어깨에 날카로운 송곳니가 박혔다.

그걸로는 만족을 하지 못했는지, 황제는 아델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대신 그림자의 등에 손을 박아 넣었다.

어깨부터 등까지, 살점이 통째로 뜯겨 나가면서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본 아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황제가 다시 페르데스를 공격하려 하자, 아델은 괴물의 팔을 베어 냈다.

아까는 흠집조차 낼 수 없었던 단단한 팔인데, 지금은 쉽게 잘렸다.

키에에엑!

황제는 공간의 틈에 몸의 일부가 낀 상태에서 괴로워하며 괴성을 질렀다.

아델은 페르데스를 들쳐 메고 빠르게 황제에게서 멀어졌다.

그리고 인근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페르데스의 상태를 살폈다.

상처 부위에서 흘러나온 뜨거운 피가 아델의 옷과 땅을 축축하게 적셨다.

반면 그의 몸은 점점 차갑게 식어 갔다.

그냥 보기에도 심각한 상황.

“정신 차려 보세요, 페르데스 님.”

“…….”

“페르데스 님, 페르데스 님!”

아델이 몇 번이나 불렀지만, 페르데스는 단 한 번도 반응하지 않았다.

미약하게나마 오르내리던 가슴이 어느 순간부터 멈췄다.

설마 죽은 건가?

아델의 눈동자가 정처없이 흔들렸다.

그녀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안 돼!”

아델은 절규하며 페르데스를 끌어안았다. 온몸에 그의 피가 묻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안 돼요. 안 돼! 죽지 마세요, 페르데스 님!”

덜컹, 내려앉은 심장이 가슴 깊은 곳에 꼭꼭 숨겨 두었던 판도라의 상자 위로 떨어졌다.

상자가 열리면서, 안에 담겨 있던 감정이 넘쳐흘렀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감정이.

* * *

사람은 왜 항상 잃어버린 후에야 그게 소중하다는 걸 깨닫는 걸까.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해 놓고, 또 그러는 이유가 무엇일까.

사람이라서 그런 거라면, 포기하겠어.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괴물이 될 수 있었다.

* * *

아델이 흘린 눈물과 의지를 삼킨 드래곤의 하트가 찬란한 빛을 뿜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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