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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화 (251/262)

257화

“후우.”

과거에서 현실로 돌아온 아델은 긴 한숨을 내쉬며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아버지가 살아 계신 모습을 봤으면 좋겠다고 수색 번도 더 생각했지만, 막상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좋으면서도 슬프고, 아쉬웠으며 동시에 화가 났다.

“미치겠네.”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감정의 호수에서 허우적거리던 아델은 문득 자신이 있는 방이 기억했던 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썹을 찡그렸다.

전체적으로는 똑같았지만, 딱 한 곳이 달랐다.

바로 체르노서가 남긴 걸로 추정되는 피 글씨가 있는 바닥이었다.

갈라진 바닥 틈 사이로 붉은색 빛이 새어 나왔다.

“이게 뭐지?”

아델이 빛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손을 가져다 대는 순간.

“……!”

붉은 빛이 시커먼 아귀를 벌리며 그녀를 삼켰다.

반항할 틈도 없이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간 아델은 하늘은 시뻘겋고, 땅은 새카만 이상한 곳에 내던져졌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장소였지만, 그녀는 본능적으로 이곳이 시간의 틈이라는 걸 알아챘다.

지하실에서 사라진 자들이 머무는 곳이기도 했고.

그 증거로 호기심이나 기타 여러 가지 이유로 경고를 무시하고 지하실에 들어갔던 자들의 시신이 이곳저곳에 보였다.

그중에는 체르노서의 시신도 있었다.

아델은 뼈가 드러날 정도로 앙상하게 마른 체르노서의 시신 앞에 섰다.

체르노서의 몸에는 검붉은 무언가가 잔뜩 묻어 있었다.

그게 피라는 걸 알아채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델은 누구의 피인지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아빠의 피겠지.’

황제가 체르노서를 공작저의 지하실에 들여보내기 위해, 그의 몸에 부친의 피를 잔뜩 묻힌 게 분명했다.

그 피를 얻기 위해서 부친을 살해했고.

“개자식.”

비틀린 입술에서 싸늘한 비평이 흘러나왔다.

달리 건질 만한 게 없을지 체르노서의 시신을 뒤지던 아델은 그의 주머니에서 종이와 펜을 발견했다.

종이에는 미처 다 적지 못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누구라도 좋으니 날]

그다음에는 구해 줘겠지.

체르노서가 가지고 있던 종이는 이전에 한 소년이 가져다주었던 유리병의 쪽지와 재질이 똑같았다.

설마 여기서 쪽지를 보낸 건가?

그렇다면 근처에 바깥세상과 연결된 강이 있다는 의미이니, 아델이 그걸 찾고자 고개를 돌리는 순간.

“……!”

새카만 그림자가 재빠르게 날아와 아델을 덮쳤다.

아델은 곧바로 대응하려다, 익숙한 얼굴을 확인하고 그만뒀다.

“대현……”

“쉿.”

대현자, 비블로스가 다급하게 아델의 입을 막으며 어딘가를 응시했다. 그의 표정은 잔뜩 굳어 있었다.

뭐 때문에 저러는 걸까.

아델은 비블로스가 바라보는 쪽을 쳐다봤다.

“……!”

그곳에는 상체는 인간이지만 하체는 뱀의 모습을 한 괴물이 있었다.

힘은 어찌나 센지 괴물이 꼬리를 휘두를 때마다 땅이 움푹 파이며, 사방으로 파편이 튀었다.

끔찍한 혼종의 모습을 한 괴물 자체도 충격적이었지만, 더 놀라운 게 있었다.

‘뭐야, 저게.’

바로 괴물의 얼굴이 황제와 똑같다는 거였다.

설마 저 괴물이 황제인 건가?

부친이 황제는 영생을 얻기 위해 인간이길 포기했다고 했으니,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페르데스도 지하실에서 황제의 허물을 봤다고 하지 않았던가.

저 괴물이 정말 황제라면, 그들이 말한 게 전부 일치했다.

* * *

내 입을 꽉 틀어막고, 숨을 죽이고 있던 비블로스가 떨어진 건, 괴물이 저 멀리 가 버렸을 때였다.

시야에서 보이지 않는 건 물론, 기척도 느껴지지 않자 비블로스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후, 별 이상한 게 꼬여서 식겁했네.”

“대현자님이 무서워하는 것도 있네요.”

스스로 강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서, 전혀 안 무서워할 줄 알았는데.

신기해서 묻자, 비블로스가 손사래를 쳤다.

“나라고 무적은 아니야. 이런 곳이라면 더더욱.”

“이런 곳이요?”

“현실과 이상이 공존하는 시간의 틈. 인간 마법사들의 말을 빌리자면 또 다른 차원이라고 하지.”

알 것 같으면서도 이해가 안 되는 어려운 말이었다.

그래도 이곳이 현실 세계가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알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선 내 힘을 전부 발휘할 수 없어.”

본체로만 돌아갈 수 있다면, 저런 놈은 아무것도 아닐 텐데.

비블로스가 제 손을 바라보며 푸념하듯 중얼거렸다.

“그럼 이곳을 나가면 되는 거 아닌가요?”

“나도 그러고 싶은데, 시간의 틈을 벌리려고 하면 저 빌어먹을 자식이 자꾸 방해해서 그럴 수가 없어.”

“제가 시간을 벌어 주면 가능할까요?”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문득 아래로 내려간 비블로스의 눈이 화등잔만큼 커졌다.

내 검 손잡이에 박힌 드래곤 하트를 보고 놀란 것이다.

“너, 그거……!”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저도 이게 드래곤 하트라는 걸 최근에 알았어요.”

나는 검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제가 이 하트의 주인이 됐다는 것도, 이걸 남에게 주면 제가 죽는다는 것도 알았죠.”

“……한마디로 나한테 드래곤 하트를 넘겨줄 수 없다는 거구나.”

“지금은요.”

살고 싶어서 황제와 맞서 싸우는 건데, 복수에 성공한 뒤 죽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지만 나중에. 충분한 시간을 보내고 죽음을 맞이할 각오가 된다면, 그땐 하트를 돌려드릴게요.”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지? 인간들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종족인데.”

“아니라고 부정하지는 않겠어요.”

나 역시 비블로스에게 거짓말을 했으니까.

“하지만 한 번만 더 믿어 주시면 안 될까요? 이번에는 반드시 약속을 지킬게요.”

“…….”

“부탁드려요, 비블로스 님.”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까지 간곡하게 말한 게 먹힌 걸까.

비블로스는 짜증스레 한숨을 뱉으며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일단 저 녀석을 해치우고 난 뒤에 생각하자. 내가 보기엔 저 끔찍한 혼종 녀석이 노리는 것도 드래곤 하트인 것 같으니까.”

“맞아요. 영생을 얻고 싶어서 이걸 노리는 거죠.”

“참으로 정신 나간 짓을 하는군. 영원히 사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닌데.”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내가 공감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비블로스는 내 쪽을 흘겨보곤 엄지손가락을 세게 깨물었다.

그리고 흘러나온 피를 이용해서 바닥에 마법진을 그렸다.

“내가 마법을 사용하면 마나를 느낀 괴물이 다시 돌아올 거다.”

비블로스가 마법진을 그리며 내게 작전을 말했다.

“그럼 넌 저 녀석이 절대 내게 오지 못하도록 막아야 해. 할 수 있겠지?”

“무조건 해야죠.”

“각오는 좋네. 뭐, 그 힘을 잘 이용한다면 이기겠지만.”

비블로스가 말하는 그 힘은 드래곤 하트의 힘이겠지.

나는 검 손잡이에 박힌 드래곤 하트를 내려다봤다.

무조건 그 괴물을 막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조금 불안했다.

아니, 많이 불안했다. 그냥 봤을 때, 내가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비블로스는 드래곤 하트의 힘을 잘 이용하면 이길 거라고 말했지만, 문제는 한 번도 이 힘을 써 본 적이 없다는 거였다.

이럴 줄 알았다면 마법 공부 같은 걸 해 둘 걸.

뒤늦은 후회를 하는 와중, 뒤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황제의 모습을 한 괴물이었다.

살기를 느끼지 못하더라도, 땅이 쿵쾅쿵쾅 울리니 괴물이 다가오는 걸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괴물을 보기 전에는 이길 수 있을지 걱정됐는데, 막상 마주하니 무조건 이겨야겠다는 각오가 들었다.

전부 저 재수 없는 황제의 얼굴 덕분이었다.

황제한테는 절대 질 수 없어.

나는 검을 뽑아 괴물 쪽으로 달려가며 비블로스에게 물었다.

“얼마나 버티면 돼요?”

“20분만 버티면 돼!”

20분만이라니. 말이야 쉽지.

나는 가볍게 혀를 차며 괴물이 휘두르는 꼬리를 디딤대 삼아 밟고 뛰어올랐다.

그대로 괴물의 가슴을 베어 내려고 했지만, 괴물이 단단한 꼬리로 재빠르게 막았다.

괴물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나를 밀쳐 냈다.

“윽!”

무지막지한 힘에 뒤로 밀려났지만, 재빨리 낙법 한 덕분에 크게 다치지 않았다.

“역시 만만치 않은 상대네.”

하긴 그러니까 비블로스가 짜증 나는 상대라고 했겠지.

불행 중 다행인 건 괴물이 비블로스는 신경 쓰지 않고, 온전히 내게 집중한다는 거였다.

“아……델……”

도저히 들어 줄 수 없는 기괴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면서.

“황제 폐하, 맞죠?”

“하, 하트를…… 내……놔.”

역시 황제가 맞구나.

나는 싱긋 웃으며 황제가 드래곤 하트를 잘 볼 수 있게 들어 올렸다.

“이걸 원하세요?”

“내놔!”

드래곤 하트를 본 황제는 이성을 잃고, 내게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황제의 공격을 받아쳤다.

카캉-

손톱과 부딪쳤는데, 강철에 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났다.

팔 전체가 저릿해서 순간 검을 놓칠 뻔했지만 이를 악물고 버텨 냈다.

“하트, 하트를 내놔라!”

가까이서 들으니 목소리가 더 거지 같네.

“그렇게 원하면 직접 가져가세요.”

아버지는 주인이 아닌 자가 드래곤 하트를 사용하려고 하면, 마법 반동을 겪는다고 했다.

어쩌면 그 효과가 지금도 나타나지 않을까.

그리 생각해서 피하지 않고 받아치며 도발한 거였는데.

“키아아악!!”

그 예상은 정확하게 적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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