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과연 아빠는 내 말을 믿어 줄까?
그가 믿어 주길 바라서 지하실에 있던 퓨라가 박힌 검을 보여 주었지만, 그래도 바로 믿을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10년 전이라면 나는 고작 11살이었다.
그런 딸이 갑자기 21살 어른이 돼서 눈앞에 나타났다는 말도 안 되는 사실을 믿을 수 있을 리가.
“결국 그렇게 된 건가.”
……없어야 하는데, 어째서 당신은 내 말을 믿는 거야.
당황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나자, 아빠가 흐리게 웃으며 날 바라봤다.
“네가 말해 놓고, 뭘 그리 놀라니, 아델.”
“……제 말을 믿어요?”
“믿어야지.”
벌린 거리를 좁힌 아빠가 검을 가리켰다.
“이 검을 들고 있다는 게 그 증거인데.”
“……도대체 이 검은 뭐예요?”
지금 기회가 아니면, 이 검의 정체를 알 수 없을 것 같아 속사포로 물었다.
“단순히 아빠가 쓰던 검 아니었나요? 이 검이 왜 지하실 가장 안쪽 방에 봉인되어 있는 거죠? 그리고 이 검에 박힌 퓨라가 드래곤 하트라는 말이 있던데……!”
“그만.”
아빠가 내 어깨를 부드럽게 감 싸쥐며 말을 잘랐다.
“묻고 싶은 게 많은 것도 알겠고, 나 역시 하나하나 차근차근 설명해 주고 싶지만 그러기엔 남은 시간이 없구나.”
“남은 시간이요?”
“내 예상이 맞다면, 모래시계를 들고 있을 거다.”
그 말에 나는 루센 공작에게 받은 모래시계를 꺼냈다.
그러자 후두둑 떨어지고 있는 모래알이 보였다.
다시 뒤집어도 모래알은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고 같은 방향으로 계속 떨어졌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네가 이곳에 올 수 있었던 건, 내가 이 모래시계와 열쇠에 걸어 둔 시간의 마법 덕분이란다.”
아빠가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설명했다.
“여기 모래알이 반대쪽으로 전부 이동하면, 넌 다시 원래 시간으로 돌아갈 거야.”
그래서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고 말한 거구나.
대략 계산해 봤을 때, 10분 남짓이었다.
결코 길지 않은 시간.
아빠에게 궁금했던 걸 묻기엔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이기도 했다.
꼭 알아야 하는 거나 중요한 것만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 뭐부터 물어보지?
시간이 얼마 없으니 초조해졌다.
고민하는 시간조차 아까웠지만, 아무거나 물었다가 정작 중요한 건 묻지 못할 것 같아 그럴 수도 없었다.
아니지, 아니야. 이럴 시간에 일단 뭐든 물어봐야지.
곧 생각을 고쳐먹은 나는 우선 순서대로 따지고 들어가기로 했다.
“레오폴드 공작가의 혈족이 사실 레드 드래곤의 축복을 받은 게 아닌, 피를 이어받은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맞나요?”
내 질문에 아빠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걸 어디서 들은 거니?”
“맞다는 거군요.”
그렇다는 건 역시 내가 알고 있던 레오폴드 가문의 신화도 전부 거짓이라는 거겠지.
그리고.
“여기 박힌 퓨라는 사실 퓨라가 아니라 드래곤 하트죠?”
“……그래. 맞아.”
아빠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레오폴드 가문의 초대 가주가 빌어먹을 욕심 때문에 드래곤에게 큰 실례를 저지르고 강제로 취한 전리품이지.”
“그리고 이 전리품을 황제가 노리고 있고요.”
아빠는 뭐라 대답하는 대신 눈을 지그시 감더니,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눈을 떴다.
“10년 뒤에 내가 죽었다고 했지.”
“네.”
“날 죽인 건 황제인가?”
“……역시 알고 계셨군요.”
그것도 황제가 아빠를 죽이기 훨씬 전부터, 아빠는 살해당할 걸 알고 있었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사실인 걸 확인하고 나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멱살을 잡고 왜 그랬냐고 물었을 텐데, 아빠라서 그러지 못하고 대신 맹렬하게 노려봤다.
“다 알고 계셨으면서 어째서 순순히 당한 거죠? 왜 저한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어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게 아니라 하지 못한 거란다.”
아빠가 씁쓸하게 웃었다.
“하나뿐인 소중한 딸에게 아빠가 곧 황제한테 살해당할 거라는 말을 어떻게 하니. 충격받을 게 분명한데.”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아빠가 죽어도 충격받는 건 똑같아요! 그리고 안 죽으면 되는 거잖아요!”
답답한 마음에 멱살 대신 아빠의 팔을 잡으며 소리쳤다.
“아빠 정도면 충분히 황제를 이길 수 있잖아요! 만약 이길 수 없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한다던가, 도망을 친다던가. 방법이 많았을 텐데 어째서 가만히 당하신 거예요! 어째서!”
“……내가 죽으면 다 끝날 줄 알았거든.”
아빠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듯이 말하며, 검을 가져갔다.
“내가 죽고, 황제가 이걸 가져가면 다 끝날 줄 알고 순순히 받아들인 건데……. 그게 아니었나 보구나.”
“그게 무슨 소리죠? 제대로 알아듣게 설명해 주세요.”
안 그래도 남은 시간이 얼마 없어서 초조한데, 이렇게 말을 돌리는 건 절대 사양이었다.
“드래곤 하트의 힘을 사용하기 위해선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다행히 내 마음을 이해했는지, 아빠가 퓨라, 아니, 드래곤 하트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하나는 레오폴드 가문의 가주일 것. 다른 하나는 몸에 레오폴드 가문의 피가 흐를 것.”
그래서 황제가 레오폴드 가문과 황족의 피가 섞인 아이를 원했던 건가?
이 드래곤 하트를 가져가 사용하려고?
하지만 그건 그 아이가 사용하는 거지, 황제가 쓰는 게 아니었다.
그 아이가 커서 드래곤 하트의 힘을 제대로 사용할 즈음엔 황제는 늙어 쇠약해졌을 가능성이 컸고.
어쩌면 죽었을 수도 있지.
“여기서 황제가 오해하고 있는 게 있단다.”
온통 의문투성이인 머릿속에 아빠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레오폴드 가문의 피가 흘러야 한다는 걸, 몸에 피가 묻기만 해도 된다는 걸로 오해하고 있어.”
“설마…… 그래서 황제가 아빠를 죽이려고 한다는 건가요?”
“그래. 황제는 날 죽이고 내 피를 몸에 묻혀, 드래곤 하트를 사용할 생각이란다.”
세상에.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믿기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황제의 행보를 생각해 봤을 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지라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니 황제가 내 피를 써서 이 드래곤 하트를 사용하면 강한 마법 반동을 당해 죽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예전의 나였다면 마법 반동이 뭐냐고 물어봤겠지만, 페르데스에게 설명을 들어 지금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 모든 게 깔끔하게 정리될 줄 알았는데…… 네가 공작이 됐다니. 그건 예상 밖의 일이구나.”
깊은 탄식이 담긴 목소리를 들으니 아빠가 썼던 일기가 떠올랐다.
“아빠는…… 왜 그렇게 제가 공작이 되는 걸 싫어하시는 거예요?”
가슴에 꾹꾹 담아 두었던 서러움이 치밀어 올랐지만, 애써 억누르며 물었다.
“어째서, 어째서 제가 공작이 되는 걸 탐탁지 않게 생각하시는 거죠? 저도 레오폴드 가문의 혈족인데, 아빠의 딸인데 어째서……!”
“이런.”
결국 참지 못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자, 아빠가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닦아 주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네가 공작이 되는 걸 싫어한다기 보다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는 걸 싫어하는 거란다.”
“인간이…… 아닌 존재?”
“그래.”
아빠가 드래곤 하트를 내려다봤다.
“이 드래곤 하트에는 강력한 힘이 있지만, 그 힘을 가진 대가로 소유자의 시간이 멈춰 사람들과 다른 시간을 살아가게 된단다. 늙지도, 스스로는 죽을 수도 없는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되지.”
영생. 그냥 듣기엔 좋은 것 같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을 보내고 혼자 긴 세월을 살아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사랑하는 사람을 몇 번이나 떠나보내는 게 얼마나 슬픈 일인지 잘 알고 있는 터라 더욱 영생을 사는 걸 원치 않았다.
“그래서…… 노트에 가문에 내려온 축복이 사실 축복이 아닌 저주라고 적으신 거군요.”
내가 혼잣말로 중얼거린 걸 들은 아빠는 머쓱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걸 봤구나.”
“다 봤죠. 아빠가 할아버지랑 동일 인물이라는 것도 알아요.”
“허허, 생각보다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는데.”
아빠는 곤란하다는 말과 달리 후련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긴 세월, 혼자서만 간직했던 비밀을 공유할 상대가 생겨서 그런 거겠지.
“그럼 황제가 노리는 건 영생이겠군요.”
“그래. 황제는 영생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심지어 인간이길 포기하기까지 했지.”
역시 황제는 인간이 아니었어.
“그럼 어떻게 해야 황제를 막을 수 있어요? 이 드래곤 하트를 황제한테 주면 알아서 자멸할까요?”
“아니. 네가 공작이 된 이상 그건 불가능해.”
아빠는 다시 내게 검을 쥐여주고, 내 양어깨를 잡았다.
“잘 들어라, 아델. 이렇게 된 거, 황제를 이겨야 한다. 그를 이기지 못하면 네가 죽을 거야.”
이미 3번이나 죽었다는 건 말하지 않는 게 좋겠지.
“어떻게 하면 황제를 이길 수 있는데요? 방법을 알려 주세요.”
“그건 네가……!”
아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처음 이 방에 들어왔을 때처럼 눈앞이 새하얗게 부서졌다.
설마 시간이 끝난 건가?
안 돼. 아직 아빠한테 물어보고 싶은 것도, 듣고 싶은 것도 많은데, 아직은 안 돼.
“안 된단 말이야!”
나는 손을 뻗으며 애타게 외쳤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새하얀 빛이 사라졌을 때, 나는 원래의 지하실 방에 우두커니 서 있었고.
내 발밑에는 루센 공작에게 받았던 모래시계의 파편이 너저분하게 굴러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