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5화 (249/262)

255화

설마 했는데 정말로 사용인들의 시간이 멈출 줄이야.

그것도 놀라웠지만, 더 놀라운 건 루센 공작과 내 시간만 멈추지 않았다는 거였다.

“마법에도 능통할 줄은 몰랐는데.”

“아아, 내가 능통한 건 아니고. 그런 사람의 도움을 좀 받았지.”

그런 사람?

“모래시계의 유효 시간은 30분 밖에 안 되니, 아쉽지만 단판 승부를 해야겠군.”

루센 공작은 아쉽다고 중얼거리며, 마법 주머니에서 체스판과 말들을 꺼냈다.

평소에도 저런 걸 들고 다니는 건가.

보통 사람이 저러면 이상하게 보였겠지만, 루센 공작이니 납득됐다.

나와 루센 공작은 체스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앉았다.

내 말은 흑색, 루센 공작은 백색이었다.

“원래 내가 먼저 선이지만, 아델 양에게 양보하도록 하죠.”

“그러지.”

비꼬는 듯한 말투에 자존심이 약간 상했지만, 지금은 자존심을 지키는 것보다 이기는 게 중요하니 사양하지 않았다.

* * *

단판 승부인 만큼 신중해야 하지만, 시간이 얼마 없어 오래 고민할 수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 게임은 진행됐다.

나는 이전에 페르데스와 루센 공작이 체스를 뒀을 때를 떠올리며 신중하게 체스 말을 움직였다.

그 덕분인지 초반에는 내가 우세했지만, 점점 밀렸다.

공격은커녕 막는 데에만 급급했다.

“체크.”

결국 체크까지 당하자,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체크메이트가 아니니 당장은 막을 수 있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그냥 피했다간 또 체크를 당할 테고, 결국은 질 텐데 어떻게 하면 좋지.

“빨리 안 하면, 시간이 다 돼서 결국은 게임이 무산될 텐데. 괜찮겠어?”

쉽게 수를 두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자, 루센 공작이 비아냥거리듯이 말하며 내 속을 긁었다.

“나도 알고 있으니까, 그 입 다물어.”

머리 위로 기분 나쁘게 웃는 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쓸 틈은 없었다.

어떻게 하면 루센 공작을 이길 수 있지?

페르데스라면 어떻게 했을까.

- 킹을 한 칸 앞으로.

“……!”

순간 페르데스의 목소리가 들리자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그러나 시간이 멈춘 채 쓰러진 사용인들만 있을 뿐, 그는 보이지 않았다.

“왜 그러지?”

“아니, 아무것도.”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나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체스판을 내려다봤다.

환청인지, 아니면 정말로 페르데스의 목소리가 들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대로 해 볼까.

다른 방법도 없으니, 일단 킹을 움직였다.

“체크.”

루센 공작이 기다렸다는 듯 룩을 움직여 다시 공격했다.

- 나이트로 막아.

그러자 페르데스의 목소리가 또 들렸다.

역시 착각이 아니었어.

- 그걸 화이트 룩이 먹고, 다시 체크를 외칠 거야.

“체크.”

- 그걸 비숍으로 먹으면 돼.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페르데스가 말하는 대로 체스 말을 움직였다.

여전히 제대로 된 공격은 하지 못한 채, 너무 수비적으로만 움직이는 것 같아 불안했는데.

- 비숍을 왼쪽 대각선 위로 3칸 움직이고, 체크메이트.

“체크……메이트.”

어떻게 체크메이트가 된 거지?

내가 직접 체스 말을 움직였는데도 믿기지가 않아, 넋을 놓고 체스판을 바라봤다.

그건 루센 공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빠르게 굴러다니며 체스 판을 훑었다.

체크메이트인 걸 인정하지 못하고, 돌파구를 찾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완벽한 체크메이트였다. 빠져나갈 구멍 같은 건 없었다.

“하.”

결국 그 사실을 인정한 루센 공작이 헛웃음을 지으며, 양손을 어깨높이까지 들었다.

“내가 졌어.”

이겼다.

비록 온전히 내 힘으로 쟁취한 승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루센 공작을 이겼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내가 이겼으니, 황제에게 복수할 수 있게 도와주겠다는 약속 지켜.”

“물론 지켜야지.”

루센 공작이 주머니에서 또 다른 모래시계와 붉은색 열쇠를 꺼냈다.

“이 모래시계는 어떻게 사용하는지 직접 봤으니, 설명해 줄 필요가 없을 테고.”

루센 공작은 붉은색 열쇠를 내 눈앞에 흔들었다.

“이 열쇠는 공작저의 지하실로 들어갈 때 쓰면 돼. 그러면 황제에게 복수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어디서 많이 본 열쇠라고 생각했는데, 예전에 어머니가 들고 있던 것과 똑같았다.

그게 지하실의 열쇠였던 건가?

그런데 어째서……

“이걸 당신이 들고 있는 거지?”

“받았거든.”

“누구한테?”

“그야 당신의 부친이지.”

……뭐?

“지금 사용한 모래시계도 선대 레오폴드 공작에게 받았어. 그 외에 이것저것 많은 것들을 받았지.”

정말 도움이 많이 됐다며, 루센 공작이 우스갯소리를 덧붙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하지만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언제, 무슨 이유로 아빠가 당신에게 이런 걸 준 건데?”

“언제냐고 물어본다면 선대 레오폴드 공작이 체스 대회에서 우승한 그 날이고, 무슨 이유냐고 물어본다면 아델 양을 도와준 거야.”

상당히 친절한 대답이었지만, 이해가 안 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가 한 말들을 되짚으며 해석하고 있는데, 루센 공작이 바닥에 내려놓은 모래시계를 집어 들었다.

“효과가 대략 3분 정도 남았군. 혹시 나한테 피해가 올 수도 있으니, 효력이 다하기 전에 떠나야겠어.”

“잠깐……!”

아직 그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이대로는 루센 공작을 보낼 수 없어 그의 팔을 붙잡았다.

펑-

아니, 붙잡으려고 했는데 루센 공작이 연기가 돼서 사라지는 바람에 그럴 수가 없었다.

이건 또 무슨 마법이란 말인가.

황당해서 주춤하는 사이, 시간의 마법에서 깨어난 사용인들이 다시 흐느적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나는 루센 공작에게 받은 모래시계를 황급히 돌렸다.

다시 시간 마법에 걸린 사용인들이 그대로 굳었다.

이 모래시계는 유효 시간이 짧은지, 모래가 빠르게 떨어졌다.

효력이 다하면 귀찮아지니까, 얼른 지하실로 가자.

나는 루센 공작을 그냥 보내 줬다는 아쉬움을 묻어 두고, 서둘러 지하실로 향했다.

* * *

지하실로 들어오자 모래시계의 모래알이 전부 떨어졌다.

시간을 딱 맞췄구나. 다행이었다.

나는 모래시계를 주머니에 넣고, 지하실 안으로 들어갔다.

지하실의 바깥 문에는 열쇠 구멍이 없었지만, 안쪽 문에는 열쇠 구멍이 있었다.

나는 그 구멍에 열쇠를 꽂기 전, 우선 문을 열고 안을 확인했다.

방은 예전에 봤던 그대로였다.

황제와 비블로스는 보이지 않았다.

황제는 그렇다 쳐도, 비블로스는 확실히 이곳에 왔을 텐데 보이지 않는 게 조금 이상했다.

“어디 있는 거지?”

검이 있던 안쪽 방까지 전부 확인해 봤지만, 그 어디에도 비블로스는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된 거, 일단 루센 공작에게 받은 열쇠부터 써 봐야겠어.

나는 다시 밖으로 나와 열쇠 구멍에 붉은색 열쇠를 꽂았다.

달칵, 무언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열쇠가 혼자서 돌아갔다.

긴장감이 차오르면서 입안이 바짝 말랐다.

나는 혀로 마른 입술을 축이며, 천천히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아까와는 다르게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순간 눈이 멀 정도로 강렬한 빛이었다.

손등으로 눈을 가리고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서서히 빛이 사라졌다.

곧 시야가 확보되면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풍경이 보였다.

“여긴…… 아빠의 집무실이잖아.”

정확히는 수도 레오폴드 공작저에 있는 레오폴드 공작의 집무실이었다.

내가 인테리어를 싹 바꿔서 지금은 볼 수 없는, 예전의 집무실 모습.

도저히 믿기 힘든 상황에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던 내 눈에 들어온 건 책상 위에 있는 달력이었다.

달력의 날짜는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이었다.

그 옆에 놓인 서류들도 10년 전의 것이었다.

“또 회귀한 건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죽지 않았는데, 회귀했을 리가 없다고.

그럼 이 상황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지?

혹시 루센 공작이 준 붉은색 열쇠가 나를 과거로 데려다준 건가?

만약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뭔가 단서를 찾고자 계속 주변을 둘러보고 있던 와중,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아빠……?”

내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젊은 모습의 아빠였다.

두 번 다시는 살아 숨 쉬는 아빠를 만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다시 만나니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눈물이 차올라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이대로 있었다면, 바보 같이 눈물을 펑펑 흘렸을 텐데.

“넌 누구냐.”

뒤이어 아빠가 한 말에 다행히 그건 막을 수 있었다.

“누구길래 주인도 없는 집무실에 있는 거지?”

“제가 누구일 것 같아요?”

바로 당신 딸이라고 말하기엔, 지금이 정말 10년 전이라면 믿을 리가 없으니 되물었다.

그러자 아빠는 조금 당혹스럽다는 듯 턱을 쓰다듬으며 날 유심히 바라봤다.

“흐음, 그러고 보니 내 딸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닮은 게 아니라 같은 사람이에요. 당신 딸이니까.”

나와 똑같은 싱그러운 초록색 눈동자가 커졌다.

빠른 걸음으로 아빠의 앞까지 다가간 나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그에게 보여 주며 말을 이었다.

“10년 뒤의, 아빠가 죽고 난 뒤에 레오폴드 공작 위를 이어 받은 아빠의 딸, 아델 레오폴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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