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솔직히 반신반의했었는데, 정말로 레오폴드 공작저에 도착할 줄이야.
놀랍고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심됐다.
“일단 저택으로 내려가…… 페르데스 님!”
그제야 페르데스가 바닥에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 내쉬고 있는 걸 발견하고 깜짝 놀라며 그를 부축했다.
“괜찮으세요?”
“괜찮…… 윽.”
페르데스는 미처 말을 잇지 못하고 손목을 움켜쥐었다.
나는 황급히 그의 손바닥을 확인했다.
“세상에.”
벌겋게 익은 손바닥은 진물과 핏물이 뒤엉켜 엉망진창이었다.
그냥 봐도 심각한 화상이었다.
“언제부터 이런 거예요? 아니, 그것보다 어서 주치의한테 가요.”
“됐어. 이건 마법 반동으로 생긴 거라, 평범한 방법으로는 못 고쳐.”
“마법 반동이요?”
“응. 주제에 맞지 않게 강력한 마법을 쓴 대가지.”
그러니까 텔레포트 마법진을 썼기 때문이라는 건가.
나 때문에 그가 이런 심한 화상을…….
“괜찮아.”
페르데스가 식은땀으로 범벅된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그리며 멀쩡한 손으로 내 눈 밑을 훑었다.
“난 괜찮으니까, 울지마.”
내가…… 울고 있다고?
그러고 보니 눈시울이 조금 축축하긴 했다.
나도 모르게 울컥해서 눈물이 나온 모양이다.
“그럼 이 상처는 어떻게 치료해요?”
“치유 마법으로 치료하거나, 시간에 맡기는 수밖에 없어.”
“신관한테 보여 줘야 한다는 거네요.”
페르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한데 보통 신관은 안 돼. 드래곤들만 아는 강력한 마법의 반동이라, 아마 대신관 정도는 되어야 할 거야.”
“아…….”
레오폴드 영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신전이 있긴 하지만, 그곳엔 대신관이 없었다.
대신관이 있는 가장 가까운 신전은 바로 수도였다.
그 말인즉, 페르데스의 손을 치료하려면 다시 수도로 돌아가야한다는 의미.
그러나 당장 수도로 돌아가는 건 무리였다.
비블로스가 말한 강력한 침입자가 황제인지 확인하고 물리치는 건 둘째 치더라도, 수도로 돌아가는 텔레포트 마법진을 그릴 수가 없었다.
설령 그린다고 해도, 페르데스에게 그 마법진을 다시 작동시켜 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었고.
그럼 어떡하지.
“괜찮아.”
고민하고 있는데, 페르데스가 말했다.
“말했다시피 이건 마법 반동으로 생긴 상처라 여기서 더 심해지거나 하지 않아.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다녀 와.”
“그래도 고통스럽잖아요.”
“전혀. 이 정도는 참을 만해.”
새빨간 거짓말.
식은땀으로 범벅된 창백한 얼굴이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그러니까 얼른 다녀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그런데도 페르데스를 여기 두고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가슴에 사무쳤다.
누군가 날카로운 바늘로 계속 심장을 찌르는 느낌이 들었다.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금방 다녀올게요.”
그러나 달리 방도가 없으니, 어쩔 수 없이 페르데스를 두고 공작저로 향했다.
얼른 해결하고 돌아가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늦은 시각. 어둠이 내린 공작저는 고요했다.
사용인들이 자고 있을 시간이니 조용한 게 당연했지만,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건 조금 이상했다.
경비는 어디 있는 거지?
남아 있는 레오폴드 기사들이 교대로 야간 경비를 서야 하는데?
뭔가 이상했다.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불안한 느낌도 들었다.
지하실을 가기 전에 하네스나 사라 등 믿을 만한 사람을 만나서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을 들어야겠어.
우선 가장 가까이 있는 사라의 방으로 향했다.
“뭐야, 비어 있네.”
온기조차 남아 있지 않은 걸 봐서, 방을 비운 지 꽤 오래된 모양이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딜 갔을 리는 없고,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해.
서둘러 사라를 찾으러 가려는 그 순간,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살기는 없었지만, 혹시 모르니 검을 뽑아 상대에게 겨눴다.
창문으로 들어온 흐릿한 달빛 아래, 상대의 모습이 보였다.
“사라?”
바로 사라였다.
게다가 그녀의 옆에는 다른 하녀들도 있었다.
“늦은 시간에 다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
“왜 대답이 없지. 뭐 하는 거냐고 물었을 텐데?”
몇 번을 물었는데도,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흐느적거리며 걷는 모양새가 굉장히 이상하고 수상쩍었다.
뭔가 있다. 나는 느슨하게 풀었던 긴장의 끈을 다시 조이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뒤에서도 사용인들이 사라와 하녀들처럼 흐느적거리며 걸어온 탓에 얼마 가지 못하고 멈춰 서야 했다.
그중에는 레오폴드 기사들도 있었다.
“모두 정신 차려!”
“……”
“내 말이 안 들려? 정신 차리라니까!”
복도가 쩌렁쩌렁하게 울리도록 소리를 쳤지만, 그 누구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거리를 좁힌 하인이 날 잡으려는 듯 손을 뻗자, 나는 재빠르게 피하며 하인의 뒷목을 세게 내리쳤다.
보통 사람이라면 바로 기절해야 정상인데, 하인은 비틀거리기만 할 뿐 다시 움직였다.
그건 다른 사용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제야 나는 그들이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몽유병에 걸린 환자처럼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즉, 단순히 기절시키는 걸로는 그들을 제압할 수 없다는 의미.
적이라면 사정을 봐주지 않고 죽였겠지만, 내게 가족 같은 사람들인지라 그러지 못하고 애꿎은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다.
일단 피해서 지하실로 가자.
아마 이들을 조종하는 자는 비블로스가 말한 강력한 방해꾼일 테니까.
걸음이 느리니 충분히 피해서 지하실로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다.
“놔, 이거 놔!”
사용인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 피하기 힘들뿐더러, 찰거머리처럼 붙은 그들을 다치지 않게 떼어 내는 것도 힘들었다.
내 가솔들과 무의미한 사투를 벌이고 있으니, 황제가 시간을 끌려고 그랬다는 루센 공작의 말이 떠올랐다.
설마 이것도 시간을 끌기 위한 황제의 작전인가?
“하하, 그렇게 사람들이 붙어 있으니, 마치 문어 같군요. 아니, 오징어인가?”
“……!”
나는 이곳에서 들리면 안 되는 목소리가 들리자 깜짝 놀라며 그쪽을 바라봤다.
그러자 내 쪽으로 오려고 아우성치는 사용인들 뒤로 여유롭게 웃고 있는 루센 공작이 보였다.
설마 했는데, 진짜 루센 공작일 줄이야.
“당신 뭐야. 어떻게 여기 있는 거야?”
“그야 공작을 도와주기 위해서지.”
내가 말을 놓았기 때문인지, 루센 공작도 바로 말을 놓았다.
거기다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늘어놓으니, 나는 인상을 팍 쓰며 그를 노려봤다.
그러자 루센 공작이 뭔가 깨달았다는 듯, 박수를 짝 쳤다.
“아, 그러고 보니 공작은 황제가 준 작위라 호칭이 마음에 안 들겠군. 그럼 편하게 아델 양이라고 불러 줄까?”
“개소리는 거기까지 하지.”
나는 그새 더 달라붙은 사용인들을 떼어 내고 루센 공작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고 다시 사용인들이 달라붙는 바람에 멈춰야 했다.
“이야, 사용인들이 그대를 엄청 좋아하는 모양이야. 이렇게 사랑받는 가주가 되는 건 엄청 힘든 일인데, 부럽군.”
“개소리 집어치우라고 했지. 여기 어떻게 온 건지, 그리고 온 목적이 뭔지 제대로 말해.”
“말했잖아. 아델 양을 돕기 위해서 온 거라고.”
“네가 날 돕는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뭘 어떻게 돕는다는 거지?”
“그대가 황제에게 복수할 수 있게 도와주지.”
역시 저 남자는 내가 황제를 노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구나.
동시에 내 저택에 황제가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정확히는 내 저택의 지하실에.
“그래도 괜찮겠어? 당신은 황제 편이잖아.”
“아까도 말했지만, 난 황제 편이 아니야.”
“그럼 누구 편이지?”
“일단 아델 양을 도와주러 왔으니, 그쪽 편이라고 해 주지.”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내가 황당해하며 쳐다보자, 루센 공작이 킥킥 웃었다.
“물론 그냥 도와줄 생각은 없어. 아델 양이 체스 게임에서 날 이긴다면, 도와주지.”
“……이 상황에서 체스를 두자고?”
“못할 건 뭐야?”
저 남자, 진심이구나.
루센 공작이 체스에 미쳤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어떻게 할래? 나랑 게임하겠어?”
“글쎄. 나도 하고 싶지만, 보다시피 움직이기가 힘든 상황이라서 말이지. 게임 진행도 불가할 것 같은데.”
“걱정하지 마. 게임이 시작하면 그들은 전부 움직이지 못할 테니까.”
“어떻게 할 생각이야? 설마 죽이거나 다치게 할 생각이라면 가만히 있지 않겠어.”
내가 매섭게 쏘아붙이자, 루센 공작은 으쓱이더니 주머니에서 모래시계를 꺼냈다.
“이 모래시계를 돌리면, 주변 시간이 멈춘다. 즉 저들의 시간을 멈춰서, 방해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거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시간을 멈춘다니. 그런 게 가능하단 말인가?
의아했지만,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회귀도 4번이나 한 마당에, 시간을 멈추는 모래시계가 존재하는 게 무에 대수라고.
“만약 내가 체스에서 지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럼 안 도와주는 거지, 뭐.”
루센 공작이 정말로 도와준다면 좋은 일이고, 설령 도와주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손해 볼 건 딱히 없었다.
“좋아, 그렇게 하지.”
단지 마음에 걸리는 건, 루센 공작의 체스 실력이 굉장히 뛰어나다는 거지만, 일단 부딪쳐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제안을 받아들였다.
“잘 선택했어.”
루센 공작이 씩, 웃으며 모래시계를 뒤집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주변 기류가 한순간 변하더니 내게 거머리처럼 붙어 있던 사용인들이 우스스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