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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화 (247/262)

253화

아무리 황제를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지만, 누가 바로 뒤까지 다가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니.

적진의 한가운데에서 경계를 느슨하게 했던 내 잘못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상대가 기척을 잘 숨긴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즉, 상당한 실력자라는 의미.

나는 상대가 내 왼팔을 잡아끄는 그 순간, 검을 빼 들고 상대를 향해 찔러 넣었다.

그러자 상대는 내 팔을 놓고 재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재빠른 움직임에 쓰고 있던 로브가 펄럭거리면서 은발이 살짝 보였다.

은발이라니. 설마?

“알도르 경?”

“…….”

상대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내겐 긍정처럼 들렸다.

“알도르 경, 맞죠? 대답해 봐요, 알도르 경.”

내가 다가간 만큼 상대는 뒷걸음질 치며 거리를 유지했다.

왜, 왜 나한테서 거리를 두는 거지?

날 지켜준다고 해 놓고, 평생 내 기사가 돼서 내 곁에 있어 줄 거라고 해 놓고.

“어째서……!”

“아델!”

알도르 경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속에 담아 두고 있던 것들을 터뜨리려는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페르데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잠시 그 쪽을 쳐다보는 사이, 상대는 빠르게 사라졌다.

어디 간 거지?

나는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봤지만, 그 어디에도 상대는 보이지 않았다.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으니, 쫓아가는 건 불가능했다.

“알도르 경이 아닌 건가?”

그래. 그 사람은 알도르 경이 아닌 게 분명해.

알도르 경이라면 도망치지 않았을 테니까.

만약 디아볼로스 때문에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상태였다고 해도, 내게 얼굴은 보여 줬을 거야.

하지만 그 은발은 분명 알도르 경의 것이었는데.

“하…….”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을 받아들이려니 머리가 복잡하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벽에 기대서는데, 맞은편에서 페르데스가 뛰어오는 게 보였다.

한걸음에 달려온 페르데스는 가쁜 숨을 잠시 고른 뒤, 화를 냈다.

“기사들도 없이 혼자서 가면 어떡해!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했잖아!”

“……알도르 경을 봤어요.”

“그래. 당연히 황…… 뭐?”

“알도르 경이 여기 있었어요.”

내가 혼잣말하듯이 중얼거리는 걸 들은 페르데스는 깜짝 놀라며 주변을 살펴봤다. 그러나 그 역시 알도르 경의 흔적을 찾지 못하고 내게 되물었다.

“정말로 그 남자가 여기 있었어?”

“……확실한 건 아니에요. 로브 사이로 삐져나온 은발을 봤을 뿐이니까요.”

“그래?”

페르데스는 잠시 생각하더니, 내게 말했다.

“황제를 찾으면서 그 남자도 같이 찾아봐야겠네.”

그래, 맞아. 황제를 찾아야 해.

알도르 경을 봤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린 나는 곧장 레오폴드 기사들에게 황제를 찾으라고 명령했다.

동시에 알도르 경도 찾으라고 명령하고 싶었지만, 그가 황제의 편에 붙었을지도 모른다는 건 숨기고 싶어 말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여기 지하실에서 이상한 걸 봤다고 했죠. 그게 어디 있나요? 다시 보기 거북하시면 저 혼자 들어가도 돼요.”

“아니야. 같이 들어가자.”

기사들이 황제를 찾는 동안, 나는 페르데스와 함께 문제의 지하실에 내려갔다.

하지만 지하실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뭔가 있었던 흔적조차 없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몹시 당황한 페르데스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내게 해명했다.

“분명 여기 있었어. 황제의 거죽과 똑같이 생긴 껍질이랑 마법진이 있었다고.”

“믿어요.”

그래. 페르데스가 거짓말을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 황제가 내가 온 걸 알고 치웠겠지.

그런 것치고 너무 깨끗한 게 이상하긴 했다.

급하게 치웠다면 작은 흔적이라도 남았어야 정상인데 그조차도 없었다.

혹시 내가 발견하지 못한 흔적이 있나 싶어 계속 주변을 살피고 있는데, 페르데스가 외투 주머니에서 드래곤 페어리를 꺼냈다.

“그것도 계속 들고 다니신 거예요?”

주먹만 한 크기라서 주머니에 들어가긴 하지만, 그래도 계속 들고 다니기 번거로웠을 텐데?

“쉿.”

페르데스는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드래곤에 대고 말했다.

“네, 들립니다.”

나한테 하는 말은 아닌 것 같고.

그러고 보니 드래곤 페어리가 깨어 있잖아!

즉, 비블로스에게 연락이 왔다는 의미.

비블로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듣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내겐 들리지 않았다.

페르데스에게 물어보자니, 괜히 대화를 방해하는 것 같아 그럴 수가 없었고.

대신 그를 빤히 쳐다보자, 페르데스가 비블로스에게 말했다.

“마침 이곳엔 그녀와 저 뿐이니, 페어리 입을 통해서 말하셔도 돼요.”

[그래.]

페어리가 입을 움직이더니, 비블로스의 목소리를 뱉었다. 마법 전령새를 보는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내가 있다는 걸 확실히 알려 줘야 할 것 같아 인사를 건넸더니, 비블로스가 콧방귀를 꼈다.

[안녕하긴 개뿔. 웬 놈 때문에 시간의 틈에 갇혀 죽을 뻔했는데.]

“시간의 틈이요?”

[그래. 여긴 시간의 결계가 있어, 바깥과 시간의 흐름이 완전히 다르거든.]

그건 그렇지.

[그래서 억지로 시간의 틈을 벌려 조사하고 있었는데, 이상한 놈이 결계 안으로 들어와서 방해하는 바람에 정신력이 흐트러져서 틈에 갇힐 뻔했어.]

“그 말은 대현자님 말고 다른 누군가가 공작저의 지하실로 들어왔다는 건가요?”

[아마도 그렇겠지.]

그럴 리가. 지금 레오폴드 공작저에 남아 있는 사람 중 지하실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하네스뿐이었다.

설마 그가 지하실에 들어가서 비블로스를 방해했을 리는 없고.

그럼 누구지? 누가 지하실에 들어간 거지?

[누군지 몰라도 상당히 강력한 놈이야.]

비블로스는 보기 드물게 잔뜩 긴장하며 말했다.

[젠장. 얼른 나가든지 해야지. 아니면 갇……]

드래곤 페어리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눈이 스르륵 감긴다.

“잠깐만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나는 다급하게 비블로스를 불렀지만, 드래곤의 눈은 이미 감긴 후였다. 통신이 끊겼다는 의미다.

“비블로스 님, 비블로스 님!”

페르데스가 수차례 불렀지만, 감긴 눈은 떠질 줄 몰랐다. 페르데스는 황망하다는 얼굴로 날 쳐다봤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하지만 레오폴드 공작저에 무슨 일이 생긴 건 확실하네요.”

황제와 관련이 있는 것 같은 건, 내 기우일까.

“혹시 황제가 레오폴드 공작저로 간 게 아닐까?”

페르데스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조심스럽게 말했다.

“비블로스 님이 긴장할 정도로 상당히 강력한 놈이라면, 인간이 아니라는 건데 황제도 인간이 아닐 가능성이 크잖아.”

“그렇죠.”

게다가 지하실에 들어간 걸 보면 그곳에 있는 물건을 노린다는 건데, 그런 짓을 할 만한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황제 밖에 없었다.

정말로 황제가 레오폴드 공작저에 간 건가?

내 저택을, 소중한 저택을 황제가 구둣발로 짓밟고 있는 거야?

“당장, 당장 공작저로 돌아가야 해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당장 돌아가는 게 불가능하다는 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수도에서 레오폴드 공작저까진 아무리 빨리 가도 사흘이 걸렸으니까.

사흘이면 황제가 레오폴드 공작저는 물론 레오폴드 영지까지 전부 부수고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건 안 돼. 안 돼……!”

“진정해, 아델.”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나와 달리 페르데스는 침착하게 말했다.

“늦지 않게 레오폴드 공작저로 데려가 줄 테니까, 진정해.”

“……늦지 않게?”

“그래.”

뭘 어떻게 하려고 저렇게 확답하는 거지?

나는 의아해하며 페르데스를 쳐다봤다.

그러자 페르데스는 씩 웃으며 마나 펜을 꺼내 들더니,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법진에 대해서 아는 건 없지만, 굉장히 어렵고 복잡한 마법진이라는 건 겉모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뭘 그리시는 거예요?”

“텔레포트 마법진.”

“네? 그건 짧은 거리밖에 이동하지 못하잖아요.”

“인간들에게 알려진 마법진은 그렇지만, 이건 드래곤에게 직접 전수받은 마법진이라 달라.”

드래곤이라면 비블로스를 말하는 거겠지.

페르데스에게 좀 더 묻고 싶은 게 있었지만, 그가 마법진을 그리는 데 워낙 집중하고 있는 터라 괜한 방해가 될까 봐 잠자코 있었다.

“후, 다 됐다.”

이윽고 마법진을 완성한 페르데스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쳐 냈다.

“마나 펜에 든 마나로만 작동시키는 거라 제대로 작동할지는 조금 불안하지만……. 만약 안 된다면 황궁에 굴러다니는 퓨라들을 들고 와서 여기 박지 뭐.”

퓨라. 그 말에 시선이 자연스럽게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으로 향했다.

“한 열 개쯤 박으면 마나가 부족하지 않겠지.”

“……그냥 처음부터 박고 시작하죠.”

“응?”

“어디 박으면 돼요?”

페르데스가 얼떨떨해하며 마법진의 중앙을 가리키자, 나는 거기에 차고 있던 검을 꽂았다.

그러자 검 손잡이에 박혀 있던 커다란 퓨라가 붉은 빛을 뿜어냈다.

마법진은 퓨라와 공명하듯이 같은 빛으로 반짝였다.

“이 정도면 충분한가요?”

“충분해! 지금 바로 마법진을 작동할게!”

서둘러 마법진에 올라온 페르데스가 뭐라 중얼거리자 붉은빛은 점점 강해졌고, 곧이어 눈앞이 새빨갛게 변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건 물론, 페르데스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새빨간 공간에서 얼마나 허우적거렸을까.

“……성공했어.”

낮은 탄식이 들리면서 온통 새빨갰던 세상이 점점 갰다.

다시 정상으로 돌아온 시야에 새카만 어둠에 휩싸인 레오폴드 공작저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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